292. 저편의 은하(銀河)
(292/306)
292. 저편의 은하(銀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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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저편의 은하(銀河)
2023.05.19.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 데바의 눈빛이 미친 듯이 떨렸다. 데바는 뻥 뚫려 버린 왼쪽 가슴을 추스르는 것도 잊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슉, 슉, 슈욱─!!
또다시 빛의 창을 생성해 내는 그의 기색은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했다.
수없이 생성된 빛의 창들은 은하는 물론, 그녀 뒤쪽에 서 있는 다른 헌터들에게까지 쏟아졌다.
그녀를 포함한 이곳의 모두를 한 번에 쓸어 버릴 생각인 것이었다. 남김없이, 모조리 말이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른 창이 은하의 코앞까지 닿은 순간이었다.
“……!”
돌연 그녀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모든 빛의 창들을 무시하고 반격할 셈인가?
‘뒤?’
아니, 위쪽일지도 모른다.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한 데바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팟!
그러나 그런 데바의 예상과는 달리, 은하는 데바의 근처가 아닌 뒤쪽의 헌터들이 서 있는 곳에 나타났다.
화르르륵!
은하로부터 다시 한번 새까맣고 거센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 그것은 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검은 파도처럼 보였다.
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해일은 데바가 생성해 낸 빛의 창들을 흡수하듯 빨아들였고,
툭, 투두둑…….
새카맣게 탄 창들은 가루가 되어 바닥에 덧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
자신들을 등지고 선 은하의 뒷모습. 그리고 그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검은 불길.
그것을 응시하는 민주의 입술이 멍하니 열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 없었다. 은하는, 방금 자신을 포함한 이곳의 모두를 빛의 창으로부터 막아 준 것이었다.
“……네게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었다는 말이냐.”
분노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바의 눈에 형형한 안광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녀석을 휘감고 있던 분위기가 일순 달라졌다.
“좋다, 그렇다면……!”
궁지에 몰린 데바는 마치 남은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낼 기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부를 베는 듯한 살벌한 감각. 무언가 온다. 민주는 바주카를 쥔 손에 꾸욱 힘을 눌러 담았다. 그런데.
“……?!”
데바가 무언가 스킬을 사용하기도 전에,
뻐어어억─!!
데바의 목이 우드득, 살벌한 뼈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무슨…….’
어디에 가격당한 것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무참한 공격이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슈욱, 빠각! 콰지직……!
어둠 속에서 단단한 무언가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직후, 팔을 잃은 오른쪽 어깨가 관절째로 나선으로 비틀렸다.
“으윽……!”
데바가 고통에 젖은 듯한 신음을 흘렸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다시 복부를 강하게 가격당한 녀석은 종이 자락처럼 공중을 힘없이 날았고,
콰아앙!!
회전 계단에 등을 부딪혀 피를 울컥 쏟아 냈다.
‘말, 도……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력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다.
분명 보았으니까.
마력이 고갈된 저자는 자그마한 불씨조차 만들지 못했던 것을. 다 망가져 버린 양산으로 배를 찔렀던 것도, 심장이 멎은 것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데바는 반쯤 꺾여 버린 목을 움직여 무거운 눈꺼풀을 더듬더듬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
그녀의 배에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앙상한 양산이 아직까지도 인형의 태엽처럼 꽂혀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두 눈동자. 이렇듯 치렁치렁한 까만 드레스를 입은 똑 닮은 소녀를 기억하고 있다.
‘──쌍아궁.’
지금 은하의 모습은, 어딘가의 채널에서 데바가 주워 온 그 소녀와 같았다.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채 까맣게 타들어 가던 저택. 죽어 가는 쌍둥이 동생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소녀는 데바를 보고 물었다.
‘그곳에 가면 제 동생을 지킬 수 있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요.’
‘조디악이든 뭐든, 되겠어요.’
그때 만났던 소녀의 모습과, 지금 눈앞의 은하의 모습이 불현듯 겹쳐졌다.
‘……그렇군.’
인형을 부리던 그 꼬마처럼…….
피에 젖은 데바의 입술이 엷은 곡선을 그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그녀가 그녀 스스로 양산을 배에 꽂은 것도. 인간을 훨씬 초월한 능력을 일시적으로 가지게 된 것도. 마치 그렇게 입력하기라도 한 듯한 저 기계적인 움직임도.
지금 눈앞의 이 인간은 쌍아궁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인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 무얼 하나. 이제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정의도, 신념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상한 척 거룩한 척 해 대던 인간 나부랭이가 인격조차 잃고 그저 능력을 휘둘러 대고 있는 꼴이라니…….
“……하.”
엉망으로 뭉개진 데바의 얼굴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감정이라고는 깃들지 않은 공허한 두 눈에는 전에 없을 정도의 형형한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같다.
공허한 눈으로 낙원을 파괴하던 자신과, 초점을 잃은 눈으로 무자비하게 저를 공격하는 그녀는 같은 모습이었다.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 데바는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하는 충족감에 젖게 되었다.
네뷸러라는 이름의 낙원을 건설할 때도, 에단을 미궁에 가두었을 때도, 제 손으로 낙원을 파괴했을 때에도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이, 바로 지금.
“보아라, 에단! 네가 특별하게 여긴 그녀를!”
데바는 번쩍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같다! 나와 같지 않은가! 그녀는 내게 속해 있…… 큽!”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이미 꺾일 대로 꺾여 버린 목을 하고서도 허리를 젖혀 가며 웃던 데바가 돌연 뚝 하니 웃음을 멈추었다.
콰직!
목을 젖힌 채 웃고 있던 데바의 얼굴을 은하가 손바닥으로 집어 감싼 것이다.
콰직, 콰지지직……!
인간을 초월한 수준의 악력이 데바의 얼굴을 뒤덮었다. 데바의 이마로부터 울끈 돋아난 혈관이 관자놀이까지 터질 듯 내려온다.
“으, 읍…… 쿨럭!”
얼굴을 잡힌 데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놈의 입을 막고 있는 은하의 손가락 사이로 끈적하고 더운 피가 주르륵 떨어진다.
“읏, 읍! 읍……!”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경한 고통에 데바는 들끓듯 몸부림쳤다.
“…….”
그러나 은하의 표정에는 아주 작은 변화도 없었다. 분노도, 연민도, 증오도 남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 번쩍 빛났다.
화르륵!
은하의 신체를 휘감고 있던 불꽃이 팔목을 휩쓸 듯 지나쳐 손바닥으로, 그리고 데바의 얼굴로 옮겨 갔다.
살이 타고 근육이 녹아내린다.
그것은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서 피어난 흑염은 데바뿐만 아니라 은하 본인조차 집어삼키고 있었다.
데바의 얼굴을 잡고 있는 손바닥으로부터 은하의 팔목, 팔꿈치, 어깨를 타고 올라온 흑염은 기어코 전신을 휘감았다.
흑염에 지배당한 은하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형체를 띠고 있지 않았다.
조디악, 좀비,
……혹은 몬스터.
휘이이익, 콰앙─!!
은하는 데바의 얼굴을 손에 쥐고 근처 벽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졌고,
“커헉……!!”
벽에 크게 부딪힌 데바는 바닥에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벽 위로 놈의 새빨간 피가 튀었고, 그것은 곧 바닥에 흥건하게 퍼져 나갔다.
또각─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이 은하는 데바에게로 또다시 걸어갔다. 그녀의 흑염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은하야! 차은하!”
새까만 불길에 휩싸인 채 자신을 잃어버린 은하에게로 이준이 다급히 뛰어왔다. 그는 말리려는 듯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해, 차은하. 어차피 녀석은 이미…….”
화르륵!
기세를 더한 검은 불꽃은 은하를 붙잡고 있는 이준에게까지 옮겨붙었다. 그러나 이준은 그녀의 팔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흑염에 먹혀 들어가고 있는 낡은 소원 팔찌가 혹여나 타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기던 그 팔찌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안 돼! 이러다 너까지…… 크읏!”
그때였다.
“언니! 언니, 제발……!”
“누나! 누나, 잠시 멈춰 봐요!”
“차 헌터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아연도, 민주도, 준환도 은하에게로 다가왔다.
그들 역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자신의 몸을 돌보는 자는 없었다. 눈앞의 은하를 저지하고, 또한 감쌀 뿐이었다.
“어째, 서…….”
벽에 부딪힌 채 미동도 없던 데바가 더듬더듬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 주변에 하나둘씩 사람이 몰려들수록 곡선을 그리고 있던 데바의 입매가 천천히 굳어 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토록 텅 비어 버린 자에게 모여드는 저놈들이.
“…….”
빛을 잃은 데바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스르륵 움직였다.
바닥에 남은 흐릿한 물 자국, 그리고 저쪽 기둥의 커다란 발톱으로 새긴 상흔이 차례로 눈에 담겼다. 쌍어궁 셰이핌과 사자궁 얀의 흔적이었다.
우르르릉…….
검게 물든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사라진 조디악들의 흔적 위로 굵고 까만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남긴 흔적은 곧 시커먼 빗물에 녹아들 듯 희미해져 갔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쿨럭.”
턱을 떨어트린 데바가 입에서 울컥 피를 쏟아 냈다.
우르르르…….
메마른 하늘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며 굵고 검은 빗방울이 데바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들은 곧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까맣게 빗발치는 빗줄기 사이로, 데바의 시선은 여전히 은하와 동료들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 째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다. 결핍을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 놈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데바에게는 한 줌의 마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저들의 모습을 멀리서 응시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어째서일까.
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너, 낙원을 만들고 싶은 이유가 뭔데?’
언젠가 에단이 그렇게 물어 왔다.
‘난 간단해. 인간들이 많으면 재밌거든. 밤마다 내 영양분도 맘껏 흡수할 수 있고. 그런데 넌?’
‘나는…….’
데바는 그들과 달랐다. 누구와도 달랐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개미처럼 약하고 무능한 존재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동류를 찾아내고 창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풍요롭고 평화로운 낙원. 그 정점에 서는 일이, 정말 자신이 바라던 일이었을까.
─그래서 지금, 내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파스스…….
검은 비에 젖어 들어간 데바의 신체가 선단부터 서서히 마모되듯 바스러져 갔다.
데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더는 웃음을 터뜨리지도, 빛의 창을 소환하지도, 그 어떤 행위를 취하지도 않았다.
깜깜한 어둠이 드리웠던 눈꺼풀에 빛이 닿았다. 데바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두 눈동자는 아직도 오롯이 저곳, 은하와 동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데바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낙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파괴하고자 했던 것도, 지배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아니었다.
은하와 동료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바는 흐릿한 초점을 움직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낙원이. 같은 크기의, 같은 빛을 지닌 자들이 한데 모여 찬란한 빛을 이루는…… 바로 저곳.
“닿지 않, 는…… 은하(銀河), 로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유유히 떠 있던 별은 은하수를 건너 까만 어둠을 향해 끝내 홀로 저물어 간다.
외로이 떨어지는 하나의 별이 이윽고 완전히 그 빛을 멸하였을 때,
[별의 추락. 《Lv.99 흑염의 프린세스》에 의해 네뷸러 제2궁, 금우궁(金牛宮)이 봉쇄됩니다.]
비로소 검은 비가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