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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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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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2023.05.15.
‘에단이 실패한 걸까?’
은하는 찬찬히 데바의 행색을 훑었다.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데바의 상태도 온전하지만은 않았다. 데바의 왼팔에 시선이 닿는 순간, 은하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얀에게 잘렸던 팔이 다시 생겼어.’
다시 돋아난 놈의 왼쪽 팔은 살갗이 없이 불그스름한 근육을 훤히 보이고 있었다. 마치 심한 화상을 입어 피부가 완전히 녹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창조’의 힘을 사용하여 스스로 팔을 재창조한 것이겠지.
문제는 나머지 한쪽 팔이었다.
분명 에단에 의해 으스러진 줄로 알고 있는데, 웬일인지 지금은 마치 짐승에게 뜯겨 나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왼손 대신 오른손을 저편에 두고 온 건가?”
은하가 데바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자 데바의 공허한 눈이 스르륵 그녀 쪽을 향했다.
“선물로 주었지.”
“……에단은 어디에 있지?”
“글쎄.”
은하의 물음에 데바는 입을 귀까지 길게 찢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어디선가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을까.”
그 기분 나쁜 미소를 마주한 은하는 싫어도 에단의 패배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함정이었나.’
은하가 살짝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자신의 고유 영역인 ‘무아의 영역’에서 에단은 절대적인 갑의 위치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도저히 가늠이 서질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또 한 가지 있었다.
놈은 얀에게 뜯긴 한쪽 팔을 재생했다. 하지만 ‘무아의 공간’에서 잃은 나머지 한쪽 팔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 있는 헌터들을 상대하는 건 한쪽 팔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육안으로 보이는 놈의 상태는 그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가설은…….
‘─마력이 얼마 남지 않은 거야.’
연속된 전투에 거듭된 부상. 놈에게는 양쪽 팔 전부를 다시 창조할 만큼의 여유분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추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꾸깃─
은하는 슬그머니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에 따라 검은 드레스 자락에 진한 주름이 졌다.
마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건 은하 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태의 데바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편 은하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네놈이 데바로구나.】”
철컹!
돌연 거대한 인영이 그녀를 빠르게 지나쳤다. 안대를 쓴 사나운 인상의 남자, GIA의 야고보가 제 몸집보다 큰 철퇴를 높이 들었다.
“【잘도 우리 보스를 저렇게 만들었겠다.】”
살벌한 안광을 번뜩인 야고보는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데바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안 돼, 야고보!】”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슈우욱, 콰직!
야고보의 철퇴가 데바에게 닿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로 빛의 창이 번쩍 떨어져 내렸다.
야고보 역시 범상치 않은 반사 신경을 가진 헌터였다. 그러나 은하조차 피하지 못한 창을 그가 회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커, 억…….】”
바닥에 쓰러진 야고보가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같은 GIA의 동료인 녹스는 허겁지겁 그를 향해 달려갔으나…….
“【오, 지 마……!】”
채앵, 챙, 채재쟁!
하늘로부터 빛의 창이 낙뢰하듯 무수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마치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금 빛의 소나기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 창은 그곳에 모인 헌터들을 심판하기라도 하듯 무참하게, 또한 거침없이 꿰뚫었다.
“이, 이게 뭐야!”
“피할 틈이 없…… 컥!”
그것들로부터 몸을 피하는 일은 천장이 없는 작은 집 안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는 일과도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요한!】”
뒤쪽에서 안드레아의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홱 고개를 돌리자, 이준을 향해 달리고 있는 안드레아가 보였다. 바닥에 쓰러진 이준을 감싸듯, 안드레아가 그를 껴안은 것과 동시에.
“……!”
콰직!
하늘에서 떨어지던 빛의 창은 이준 대신 안드레아를 꿰뚫었다.
안드레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이준을 껴안은 그 상태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은하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살짝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시야가 넓어지며 주변의 풍경이 일제히 까만 눈동자에 담겼다.
“헌터님! 가십시오! 바깥에 치유 헌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선 치료를…… 큭!”
어떻게든 은하를 내보내려 절박하게 외치고 있던 준환도,
“헌터님이 여기서 당하면 모든 게 끝입니다! 어서요!”
푸른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을 날아다니던 수현도,
“【──!】”
“【──, ───!!】”
이준과 안드레아 쪽을 향해 달리고 있던 다른 GIA의 멤버들도…….
콰직, 콰지직!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창에 신체를 꿰뚫려 낙엽처럼 힘없이 스러져 갔다. 모두를 은하 혼자서 구해 낼 방법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너의 그 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데바의 입가에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썩 마음에 드는구나.”
놈은 보란 듯이 조금 더 격렬하게 빛의 창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창들은 은하에게는 닿지 않았다. 지독할 만큼 그녀를 철저히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이를 휩쓸어 갔다.
눈앞의 광경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은하는 이 비슷한 광경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수도 없이 목격한 바였다.
‘으, 으악……! 괴, 괴물이……!’
‘은하야……! 사, 살려 줘……!’
30년 전, 그 끔찍한 시절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 은하의 발목에, 팔에, 양어깨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어둠에 붙잡혀 제자리에 덜컥 얼어붙어 버린 은하.
“……니!”
그런 그녀의 등을 누군가 다급하게 두드렸다.
“언니!”
아연이었다.
그녀 역시 빛의 창에 공격당했는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은하 앞에 섰다.
“이거 받아요.”
차라랑,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전달되었다.
“이 체인 로프는 성 밖으로 이어져 있어요. 이걸 따라가다 보면 트릭스터 쪽이랑 합류할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치유 헌터들도 같이 있으니까 우선 그쪽으로 가요.”
아연은 은하의 손바닥에 체인 로프를 쥐여 준 뒤, 직접 두 손으로 은하의 손바닥을 꼬옥 말았다.
사슬을 쥐여 주는 아연의 두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하는 살짝 시선을 들어 아연을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아연은 두려움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늘 장난기가 가득하거나 귀찮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 지금 좀 멋있어요?”
그럼에도 아연은 웃고 있었다.
“나도 한 번쯤은 언니 흉내를 내 보고 싶었거든. 헌터잖아.”
손을 떨면서도, 잔뜩 굳어 버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그렇지 않다는 듯 이를 보이며 웃었다.
“아연─.”
그런 아연을 향해 은하가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푸욱!
은하의 뺨에 무언가 미지근하고 축축한 액체가 튀었다.
“……아.”
은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닦아 냈다.
──피.
새빨간 피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은하의 앞에 서 있던 아연이 실이 풀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털썩 쓰러졌다. 그녀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가 벗겨지며 은하의 발등에 툭 하니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다.
은하는 더듬더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연의 등을 관통해 배를 뚫고 나온 황금 빛 창이 서서히 사라졌다.
바닥을 타고 번지는 아연의 더운 피가 은하의 구두에 닿는 순간, 은하의 시야는 온통 붉은색으로 돌변했다.
새빨갛게 물든 시야 사이로 아연이, 이준이, 준환이, 수현이, 모두의 모습이 각인되듯 눈에 들러붙었다.
은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조금 떨어진 곳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데바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놈은 웃었다.
“나와 같은 눈이로구나.”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네가 살리지 못한 사람보다, 네가 앞으로 살릴 사람이 훨씬 많겠지.’
‘그게 네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삐이이이─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은하는 두 주먹을 터질 듯 꾸욱 거머쥐었다. 아연에게서 건네받은 체인 로프는 어느새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은하는 돌연 손에 쥐고 있던 체인 로프를 땅에 툭 떨어트렸다.
“좋다. 네 맘대로 해.”
맨손이 된 은하는 데바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별이든 달이든 되어 주겠어. 다만, 조건이 있다.”
엉망진창이 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텅 비어 버린 듯 초점이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희미한 결심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 채널을 파괴하지 마. 아니, 이 채널의 누구에게도 손대지 마. 더 이상은 말이야.”
[언니!]
띠링, 띠링, 띠링…….
노란 메시지창이 연속하게 시끄럽게 떠올랐지만 은하는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
데바의 기묘한 눈동자가 은하를 탐색하듯 훑었다. 끝도 없이 내려오던 빛의 창은 잠시 멎은 상태였다.
짧은 듯 긴 침묵 끝에, 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조건을 하나 걸지. ‘별의 나들목’에는 너만 와라. 다른 자들이 입장하는 순간, 나는 이 채널 전체를 파괴하겠다.”
띠링, 띠링, 띠링…….
눈앞에 떠오르는 노란 메시지창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은하는 여전히 그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게 하지.”
데바의 대답에 맞춰, 그 뒤에 있던 회전 계단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르륵드르륵…….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던 회전 계단은 이내 큐브가 끼워 맞춰지듯 완성되었다. 계단은 이 중앙 탑의 꼭대기보다 더 높이, 저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 너머가 아마도…….
‘별의 나들목.’
또각─
은하는 데바의 뒤를 따라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혼자서, 라고 했다.”
몇 걸음 앞서가던 데바가 걸음을 멈추더니 스르륵 뒤를 돌아보았다.
“네 몸에 깃들어 있는 쌍아궁도 마찬가지다.”
이미 데바는 은하에게 루시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은하는 데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루시.”
슈우우우─
은하의 왼쪽 가슴 부근에서 검고 탁한 연기가 뭉치더니 이내 그녀의 발아래로 가볍게 떨어졌다. 작고 새카만 그림자는 곧 방울이 달린 검은 고양이 인형으로 변했다.
「어, 언니…….」
솜으로 채워진 조그맣고 폭신한 고양이 손이 톡, 하고 은하의 종아리에 닿았다. 은하를 붙잡은 루시의 양손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시스템창 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그 녀석이 있으니까.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루나를 소멸케 한 데바가.
“…….”
은하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아 가냘프고 작은 루시를 응시했다.
「가, 가지…… 마.」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들어 있는 와중에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루시는 자신의 작은 솜 주먹에 꾸욱 힘을 눌러 담았다.
루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살짝 무릎을 굽혀 루시의 자그마한 머리를 짧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손길은 그다지 능숙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어색하고 뻣뻣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시는 그런 은하의 손길이 좋았다.
너무나도.
「히끅…….」
왕방울만 한 호박색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은하는 루시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다시 회전 계단을 올랐다.
또각, 또각, 또각─
은하의 검은 구두가 몇 걸음 계단을 좀 더 올라갔을 때쯤,
“……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미약하고도 어렴풋한 목소리였지만 은하의 귀에는 분명히 닿았다.
“차, 은…… 하.”
“……!”
우뚝.
일순 은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휘오오오─
계단 아래로부터 젖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동료들의 피 냄새와, 미미한 페로몬 향을 품고 있었다.
“…….”
바람에 따라 은하의 검은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휘날렸다.
“가지 않겠는가.”
데바가 재촉하듯 은하를 응시했다. 잠시 제자리서 굳어 있던 은하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아니, 간다.”
또각.
은하는 결국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그녀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뒤돌아보는 일 또한 없었다.
이윽고 바람이 멎을 때쯤, 회전 계단 끝에 도달한 은하는 눈부신 빛 무리에 휩싸인 채 데바와 함께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