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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다시 찾아온 위기 (287/306)


#287. 다시 찾아온 위기
2023.05.14.


크르륵…….

잔뜩 흥분한 얀은 사납게 콧잔등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성이 난 놈의 시선은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아, 하아…….”

은하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그녀의 눈앞은 시뻘겋게 물든 상태였다. 주변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은하의 이마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는 탓이었다. 아까 얀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근처 기둥에 이마를 찍혀 버린 결과였다.

당연하게도 얀은 상처를 회복할 시간 따위 내어주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젠장.’

은하는 오른쪽 손등으로 거칠게 피를 닦아 냈다.

그녀의 손에는 망가진 양산이 쥐여 있었다. 손잡이와 뼈대만이 겨우 남아 있는 그것에 더 이상 무기로써의 기능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데바와의 전투로 이미 한차례 체력과 마력을 소진한 상태였던 데다 부상까지 입었다. 더군다나 현재 은하는 이준을 감싸고 있기도 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지?’

힐끗.

은하의 까만 눈동자가 조금 전 에단과 데바가 사라졌던 장소를 재빨리 확인했다. 문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진 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은하는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 보았다.

‘만에 하나 에단이 실패하고 돌아온다면…….’

그때는 정말로, 데바를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즉 이 사자를 상대로 사력을 다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소리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최소한의 체력과 마력은 남겨 두어야만 했으니까.

[언니!]

크와아아!

쿵, 쿵, 발을 크게 구른 얀이 크게 포효하며 은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하가 재빨리 왼발을 박차고 오른쪽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

놈은 은하가 아닌,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이준에게로 일직선으로 달렸다.

‘젠장!’

휘릭!

한 발짝 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은하가 공중에서 급히 방향을 꺾었다. 그러나 이미 얀은 입을 쩌억 벌린 채 이준을 머리째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안 돼! 그렇게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휘익, 채앵!

무언가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날아와 놈의 옆구리를 찔렀다.

칼? 아니다.

‘사슬?’

은하의 눈이 사뭇 커지는 것과 동시에 얀을 공격했던 사슬이 차라랑, 하며 거두어졌다.

은하는 저 사슬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님 등장!”

휘리릭! 작고 날렵한 그림자가 돌연 은하의 시야를 덮었다.

어딘가 조금 축축하게 젖은 듯한 항공 점퍼에 꾹 눌러쓴 야구 모자. 은하를 지키기라도 하듯 그 앞에 떡 하고 버티고 선 것은 은하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와우! 개 멋있는 타이밍에 등장했네. 음, 내가 생각해도 좀 멋있었다. 인정?”

아연은 사탕을 물어 볼록하게 튀어나온 뺨을 오른쪽으로 휙 돌렸다. 그에 따라 은하의 시선 역시 오른쪽으로 또르륵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괜찮으십니까?”

“차 헌터님! 무사하셨습니까!”

수많은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은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개중에는 처음 보는 얼굴도 더러 섞여 있었다.

“세상에, 얼굴에 피가……!”

가장 먼저 은하를 향해 냅다 달려온 것은, 군단 길드의 배준환과 함수현이었다. 은하는 그들을 보고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민주는 어쩌고…….”

“마스터라면 현재 백색 성 입구 부근에서 헤드 헌터 두 명과 함께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치료요?”

“네, 저희 군단에서 고용한 치유 헌터 소대가 이곳에 와 있습니다. 바깥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곧 이쪽으로도 올 겁니다.”

“아…….”

준환의 이야기를 듣던 은하는 살짝 눈을 돌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중성적인 외모의 남자,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뒤의 다른 이들은 아마…….’

은하는 안드레아 뒤쪽의 여러 인영을 힐끗 확인했다.

“【와, 저 사자가 조디악? 왜 저렇게 커?】”

“【실제로 보는 것은 저도 처음이군요.】”

안대를 쓴 덩치 큰 사내가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로 무어라 말하자, 그 뒤에서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청년이 대꾸했다.

다들 목에 은색 코인 형태의 펜던트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GIA의 멤버인 듯했다. 그중에는 은하와 안면이 있는 녹스도 섞여 있었으니 거의 확실했다.

“언니! 얼굴이 왜 이래요? 으앙, 많이 다쳤어요? 이제 괜찮아요, 요니가 왔으니까!”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 대는 아연을 손짓으로 진정시킨 은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안드레아를 불렀다.

“안드레아, 백이준을 부탁합니다.”

“네?”

안드레아는 그제야 은하 뒤편에 쓰러진 이준을 발견했다.

“……! 요한!”

그에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GIA의 멤버들도 이준에게 몰려들었다. 일부는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또 일부는 붉어진 눈시울을 몰래 훔쳤다.

그들을 힐끗 바라본 은하는 다시 시선을 이준에게로 옮기며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발견했을 땐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숨은 아직 붙어 있으니, 어서 백이준을 데리고 성을 나가세요.”

은하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준을 부축하던 안드레아는 은하 쪽으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당신은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하는 자꾸 시야를 가리는 이마의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으며 답했다.

“이준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준다면 지금보다는 전투가 편해질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난관이었으니.

다만 은하는 이미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결코 그것을 내색하거나 표현하지 않은 채 담담히 두 다리로 섰다.

“괜찮으니 가세요.”

은하의 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들을 모두 보내고 자신만은 끝까지 이곳에 남아 있겠다는 올곧은 의지와 신념이, 저 등으로부터 강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은하의 등에 머무르던 안드레아의 시선이, 몇 초 뒤 이준에게로 스스륵 옮겨 갔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건, 은하의 세상이야.’

“…….”

툭.

안드레아는 조심스럽게 바닥 위로 이준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뒤쪽의 GIA 멤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계획대로 진행하자. 요한은 내가 돌볼게.】”

그러자 선두에 서 있던 안대를 쓴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그래야지.】”

그는 안드레아, 그리고 은하를 지나치고 걸어가 얀 앞에 섰다.

“【다들, 보스를 실망시키지 말자고.】”

그 말이 방아쇠였다.

땋은 머리의 동양인 여성, 마찬가지로 GIA의 멤버처럼 보이는 자가 얀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었다.

“잠깐……!”

은하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안드레아는 은하의 팔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그들이 GIA의 멤버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얀은 파괴력으로만 따지자면 데바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조디악이다. 그들만의 힘으로 놈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은하는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황하는 은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안드레아가 빙그레 웃었다.

“저걸 보십시오.”

슈욱, 팟!

여성이 쏜 화살은 얀에게 닿기 직전 번쩍 빛나더니,

피요오오!

사자인 얀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불사조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안대를 쓴 남자와 성경을 가진 남자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도움닫기 하여 불사조의 날개 위에 익숙한 듯 올라탔고, 그로부터 GIA와 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기요, 님들? 이 10억…… 아니, 사자는 내 건데? 스틸하려는 건가, 지금?”

아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큰 눈을 끔뻑이더니 그들에게 질세라 단검을 꺼내 들었다.

크와아아아─!

사방에서 쏟아지는 맹렬한 공격에 얀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크게 포효하는 얀의 손발은 어느새 아연의 체인 로프에 감겨 있었다. 웬만한 무기로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던 놈의 두꺼운 피부에는 붉은 줄이 수없이 그어졌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느려졌어.’

은하는 얀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매혹이 다시 걸린 건가? 하지만 페로몬 향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데바가 강제로 매혹을 해제하면서 얀의 신체에 어떠한 손상이 간 것일지도 몰랐다.

크르르……!

아연의 체인 로프는 얀이 움직일 때마다 미역처럼 들러붙어 놈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연은 무기에 미리 독을 발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쿵!

슬슬 독이 돌기 시작한 것인지 놈이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지금이다! 마지막까지 공격을 쏟아부어!】”

바르나바가 외치자 안대를 쓴 남자, 야고보가 철퇴를 높게 쳐들었다. 가시가 돋은 거대한 철퇴가 얀의 머리통을 깨부수기 직전.

콰직!

얀이 머리만을 움직여 철퇴를 한입에 씹어 버렸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철퇴를 들고 있던 야고보의 두 손마저 저 이빨에 박살 났을 것이다.

“와아, 너 좀 독하다. 치사량을 초과할 정도로 듬뿍 발랐는데 아직도 살아 있네?”

아연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독은 놈의 미세 혈관 곳곳까지 침투할 것이다. 독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적어도 움직임을 느리게 할 수는 있을 터. 머릿수만 보아도 이쪽이 훨씬 우세하다.

시간적인 면에서도 전력 면에서도 질 수 없는 싸움이란 소리였다.

“끝난 것 같군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전투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 안드레아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손은 은하의 이마 쪽에 상냥하게 닿았다. 무언가 따듯한 감각이 들었다. 동시에 은하의 코끝에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스쳤다.

“전문적인 치유 헌터는 아니지만, 회복 스킬을 조금 가지고 있기는 해서요.”

“그렇다면 나보다는 백이준을─.”

“잊으신 건가요? 그날 저와 했던 약속.”

불쑥 은하의 말꼬리를 자른 안드레아가 시선을 들었다.

그날 했던 약속……? 은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하니까. 그것이 요한이 바라던 일이었으니까요.’

‘죽을 각오로 살아왔겠지만, 이번에는 살아남을 각오로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합니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히 입을 닫는 그녀를 본 안드레아는 그제야 다시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품었다.

“요한이라면 분명 자신보다 당신을 먼저 치료하라고 했을 겁니다.”

안드레아는 제 오른손 위에 왼손을 덧대었다. 이마 쪽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이 조금 더 진해졌다.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때, 말을 하다 만 안드레아가 움찔 손가락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대개 회복 스킬 보유자의 경우 스킬 사용 대상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안드레아는 본인도 말했듯 전문적인 치유 헌터가 아니었으나, 상처의 깊이라든지 남은 체력이나 마력에 대해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가 감지한 현재 은하의 상태는…….

“어떻게…….”

안드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지금 은하는 외견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

워낙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으나 손을 대어 직접 확인해 보니 남은 그녀의 체력은 아슬아슬하게 10%를 넘기고 있었다.

이 이상 전투를 이어 가는 건 무모한 짓이다. 아니, 전투는커녕 속도를 내서 뛰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었다.

“응? 언니가 왜요?”

귀가 얼마나 밝은지, 저 멀리서 단검으로 얀을 해부하다시피 찌르고 있던 아연이 휙 돌아보았다.

그 근처에 있던 준환과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헌터님 상태가 안 좋은 겁니까?”

“어디! 어디 봐요! 어디가 안 좋은 건데요?!”

“으헝헝, 언니이…… 죽지 마요……!”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그것 보라며, 내가 도망치자고 할 때 진즉에 도망치지 않고 무얼 했냐며 속상한 듯 땅을 팡팡 두드립니다.]

[언니가 없으면……! 언니가 없으면……! 나는 죽어 버릴 거라며 목 놓아 울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얀의 주변에서 경계를 취하고 있던 GIA의 멤버조차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니, 그것이 당장에 죽는다는 것은 아니고…….”

당황한 안드레아가 우선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양손을 들어 보이는 그때였다.

쿠구구구……!

“……?!”

“뭐, 뭐야!”

그곳에 서 있던 모두의 몸이 동시에 기우뚱하고 요동쳤다. 주변에 박혀 있는 기둥들이 갈대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차게 식은 바람이 기묘하게 불어온다.

바람이 닿은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온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안드레아의 곁에서 그의 치료를 받고 있던 은하가 팟, 하고 고개를 들었다.

‘별의 나들목’으로 이어지는 회전 계단. 그 앞에 황금색 빛 무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은하의 까만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녀는 곧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안드레아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고마워요, 안드레아. 훨씬 나아졌습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손잡이와 철로 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양산.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복부 부근의 상처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저도 모르게 은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지금 그 상태로는……!”

그제야 은하는 안드레아를 뒤돌아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두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휘오오오오─

바람이 거세졌다. 회전 계단 앞에 모여든 황금색 빛 무리 사이로, 흰 로브를 쓴 남성의 실루엣이 언뜻 비쳤다.

“저자가…….”

멍하니 중얼거린 바르나바가 저도 모르게 성경을 손에서 툭 떨어트렸다.

신비롭고도 장엄한 정적 속, 눈이 멀 것같이 찬란하던 빛 무리가 이윽고 걷혔다.

“…….”

“…….”

데바. 놈이 돌아온 것이었다.

‘에단은?’

그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은하의 검은 눈동자가 힐끗 옮겨 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에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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