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공허 그리고 결핍
(286/306)
286. 공허 그리고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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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공허 그리고 결핍
2023.05.13.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광활하고 새까만 어둠에서 탄생한 태초의 별.
데바가 눈을 뜨고 가장 처음 눈에 담은 것은 먹색처럼 짙고도 깊은 허무(虛無)였다.
탄생의 기쁨도, 어둠에 대한 두려움도, 저를 둘러싼 적막에 대한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데바는 그저 쓸쓸하고 공허한 그 공간에 두둥실 떠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루하네.”
데바와 함께 탄생한 또 하나의 태초의 별, 에단이 말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에단의 말에 데바는 생각했다.
당시 자신의 가슴에 깃든 이 공허하고도 결핍된 감각이 ‘지루함’에서 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이 허무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두 태초의 별에 의해 네뷸러라는 이름의 낙원이 만들어졌다.
물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쌍어궁 셰이핌은 데바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공손히 굽혔다.
“축하드립니다, 데바시여. 네뷸러의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꼭대기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거대한 탑. 데바는 그곳의 가장 높은 장소에서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텅 빈 공간이, 이제는 꽤 생기가 생기며 그럴싸하게 완성되었다.
다른 차원, 즉 외부 채널에서 선별해 온 생명체들은 이곳의 주민이 되었고 그들 모두가 데바를 ‘아버지’로 부르며 경외하고 칭송했다.
그들 중 특히 우수한 개체들의 경우, 데바가 직접 가호를 내려 조디악의 일원으로 삼았다. 지금 데바의 뒤에 서 있는 셰이핌도 그렇고, 그리고 오른쪽 발아래에서 그르릉 소리를 내며 기분 좋은 단잠을 청하고 있는 사자 역시 그중 하나였다.
데바는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이곳에도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으며 바람이 불어오고 물이 흘렀다. 데바는 위로는 푸른 장막을 씌워 하늘이라는 이불을 덮어 주었고, 아래로는 구름을 깔아 하얀 바다를 만들어 두었다.
이곳은 더 이상 ‘공허’가 아니었다.
별들의 낙원(Nebula).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낙원이었다.
‘그런데 왜…….’
낙원을 응시하는 데바의 눈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공허했다.
이상했다. 네뷸러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달성감이나 쾌감, 충족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결핍감은 더욱 커졌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고민하는 데바의 시선은 자연스레 자신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탄생한 태초의 별인 에단에게로 향했다.
그는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쉽게 지루해하지만 그만큼 쉽게 즐거워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에단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생명체가 늘어날수록, 에단은 그들의 ‘수면’을 이용하여 힘을 키워 갔다. 그러니 불만족스러울 구석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바는 달랐다.
어째서 자신은 아직도 허무한 것인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에단을 보고 나니 어째서인지 가슴속에 깃든 허무감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왜 아직도 죽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그렇게 원하던 낙원을 만들었으면서.”
나는 이제야 좀 사는 맛이 나는데. 크게 기지개를 켠 에단이 덧붙였다.
“사는 맛이 난다…… 고.”
미묘한 얼굴을 한 데바가 중얼거리자 에단의 붉은 두 눈이 휙 그쪽을 향했다.
“이전까지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갇혀 있느라 갑갑했거든. 죽어 있는 거랑 뭐가 달라?”
에단의 말에 데바는 공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삶과 죽음. 그 단어에 대한 정의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피부로 느껴 본 적이 없었으니 딱히 가슴에 와닿지도 않았다.
데바는 다시 낙원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개체들 중, 자신과 비슷한 자는 없었다. 자신과 같은 시선을 가진 자도, 자신의 공허를 이해해 주는 자도 없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있는 대로 이곳에 있는 대로 쑤셔 넣었지만, 그 사실은 오히려 데바를 더욱더 허무하게 만들었다.
──즉 실패였다.
‘잘못 만든 것은 다시 만들면 그만일 뿐.’
데바는 낙원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낙원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기를 택했다.
푸르렀던 하늘이 다시금 검게 물들었고, 데바가 내린 ‘천벌’에 땅이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졌다.
“데, 데바시여! 어째서……!”
그를 추앙하고 따르던 이들은 살려 달라며 애원했으나, 데바는 물고기들이 뻐끔뻐끔 기포를 만들어 내는 소리 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유리창처럼 부서지는 하늘. 그 사이로 쏟아지는 검은 먹물이 은하수를 뒤덮는다. 몰락하는 땅과 함께 별의 무덤으로 함몰하는 수많은 생명체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낙원의 몰락을 응시하는 데바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하기만 했다.
자신이 아끼며 가꿔 왔던 낙원을 제 손으로 짓밟는 그 행위에 희열은 없었다. 그러나 후회나 안타까움 역시 없었다.
구름 아래에 위치한 별의 무덤으로 수많은 비명들이 아득히도 떨어져 내린다.
그곳에 여전히 남은 것은 단 하나. 고고하고 찬란한 황금 빛을 뿜어 대는 중앙 탑, 데바의 성 하나뿐이었다.
낙원이라는 이름의 수조는 하루도 되지 않아 무(無)로 되돌아갔다.
중앙 탑의 꼭대기, 하얀 로브를 유유히 휘날리며 선 데바는 낙원의 잔해를 응시했다.
“무슨 짓이야?”
그런 데바 곁에 에단이 찾아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무슨 짓이냐고.”
“작은 실패가 있었을 뿐이다. 낙원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야.”
“다시 만들면? 또 마음에 안 든다고 네 멋대로 부숴 버릴 생각인가?”
삐딱하게 서서 데바에게 반발한 에단은 휙 시선을 돌려 낙원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더럽게 허무하네.”
에단이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데바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허무하다고?”
돌연 데바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허의 공간에서 탄생한 이후 그가 그렇게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단은 기묘한 광경이라도 보는 것처럼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바는 한참 동안이나 웃어 젖혔다.
늘 공허하던 데바의 두 눈빛에 비로소 이채가 감돌았다.
같구나. 드디어 같아진 것이다.
자신과 에단이.
자신과 이 세계가.
데바의 웃음소리는 낙원의 잔해 앞에서 한참 동안, 아주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으로 채워진 결핍이었다.
* * *
“거짓말이었구나.”
제 팔을 잘라 낸 데바가 중얼거렸다.
그의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날을 세우기라도 한 듯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존재였다면 공기에 압도되어 입술조차 뻐끔거리지 못했겠지만 에단은 여상스러운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니, 진짜야. 난 은하를 내 신부로 삼을 거거든. 그리고 내 신부님은 네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
스르륵 벌어진 에단의 붉은 입술 사이로 뾰족하고 하얀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죽어 주라.”
“……은하, 라.”
데바가 곱씹듯 그 이름을 되뇌자 미소가 걸려 있던 에단의 입가가 단번에 무섭게 굳었다.
“야.”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앗!
제자리에서 번쩍 사라진 에단이 데바의 코앞에 나타났다. 데바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쥔 에단은 제 이마를 데바의 이마에 가까이 가져갔다.
핏빛으로 물든 홍채 가운데 새까만 그의 동공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어디서 함부로 불러.”
우드득.
에단은 데바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꺾이는 듯한 살벌한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데바는 미동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약하게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에단, 네가 그렇게 특별하게 여기는 그자는 조디악을 용서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더구나.”
로브 속에 숨겨져 있던 기이한 눈동자가 똑바로 에단을 향했다.
“거기에 네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뭐?”
에단의 가지런한 눈썹이 불쾌한 듯 움찔 떨렸다. 그것을 정확히 포착한 데바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네가 애정을 가진 그자는 널 결코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안다면 더욱더 널 경멸할 거고, 용서하지 않을 테지.”
그러자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에단이 코웃음을 흘렸다.
“……못 본 사이 혀가 꽤 길어졌네.”
붉은 눈매가 불현듯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그냥 뽑아 줄까? 네 왼손처럼.”
공격적인 눈빛에 평소처럼 여유가 섞인 말투였지만, 데바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힘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분명히 감지했다.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자라는 것을. 그 ‘은하’라는 자가 에단의 약점인 것과 동시에, 그의 공허를 채워 준 존재라고 말이다.
“여기서 나를 쓰러트리고 나간다면, 그자는 자신의 채널을 그 지경으로 만든 별들을 모조리 해치울 것이다. 너도 포함해서.”
“닥쳐, 은하는─.”
“그자가 특별한가?”
에단의 말꼬리를 잘라 먹고, 데바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너는 그자의 이해를 바라는가?”
데바가 대답을 구하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에단은 그런 그를 보며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대답을 들었다는 듯 데바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에단,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 아니, 다른 조디악조차 우리와는 다르지.”
탁.
데바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에단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우린 처음부터 이질적인 존재였다.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이해자다.”
그렇지 않나, 에단? 데바가 물었다.
잠시 후, 에단은 데바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곳에 숨은 붉은 눈동자가 어떤 빛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에단, 내게 돌아와라.”
데바는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과거의 과오 따위 잊고 너를 받아 주겠다. 그리하면 너는 앞으로 나의 낙원에서 그자와 영원히 함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원한다면 그자를 신부로 삼는 것도 좋다.”
그러자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에단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흐느끼는 것인가?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 못생긴 얼굴하며, 죽은 눈깔하며…….”
─아니,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헛소리를 장황하게도 늘어놓는 점도.”
에단은 곱게 휘어진 붉은 눈을 들어 데바를 바라보았다.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난 은하를 신부로 삼을 수 있어.”
“하지만 그자는 우리와는 다르다. 언젠가 늙고 병들고 죽을 테지. 하지만 별이 된다면…….”
“은하를 별로 바꿀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어.”
데바의 말을 잘라 먹은 에단이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애는 지금 그대로가 최고거든.”
“……그러한가.”
무심히 대꾸한 데바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홍채에 새겨진 복잡하고도 기묘한 문양, 그것과 상반되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눈빛이 쭈욱 에단을 훑었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슈르르르…….
데바의 머리 위에 검붉은 연기가 한 점에 밀집하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건…….’
그것을 목격한 에단의 눈이 커졌다.
검붉은 연기는 곧 주먹 크기만 한 구슬로 변모했다. 거무튀튀하고 끈적거리는 먹물에 피를 섞은 듯한 기분 나쁜 색을 한 그것은 데바의 ‘정신의 핵’.
‘핵을 직접 소환했다고?’
데바는 에단과 동일한 태초의 별인 데다 ‘창조’의 힘을 가진 자였다. 원리와 구조만 알고 있다면 핵을 만들어 소환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저것이 부서지면 데바는 정상적인 뇌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그저 숨만 붙어 있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꼴이 된다. 데바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너…….”
에단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른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 위에 떠오른 핵을 쥐어 든 데바는,
콰직!
──제 손으로 그것을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