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 언젠가 너에게 닿을 바람 (283/306)


#283. 언젠가 너에게 닿을 바람
2023.05.10.


제주도에 처음으로 데바가 모습을 드러낸 날.

이준은 대규모 스킬 ‘얼루어 스프레드’를 이용하여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침몰하는 제주도에서 탈출시켰다. 물론 은하까지도.

바다 위로는 이준의 페로몬에 이끌린 해양 생물들이 거대한 다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다리 너머로 은하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이준은 그곳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이준은 거대한 도끼를 든 미노타우로스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해치웠다.

“자멸(自滅)해라.”

조금 전 사용한 ‘얼루어 스프레드’가 놈들에게도 통했기 때문에 굳이 번거롭게 전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페로몬의 효과가 끝난 지금, 다리를 놓아 주었던 해양 생물들은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얼루어 스프레드’를 한 번 더 사용하기에는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무너져 내린 한라산은 이제 성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준은 저벅저벅 그쪽으로 향했다.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이준은 오랫동안 은하를 지켜봐 왔다. 은하에게 ‘매혹’을 걸어 억지로 돌려보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준이 알고 있는 그녀라면 분명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때를 대비하여 지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둘 생각이었다.

한라산 자리에 나타난 저 정체불명의 성은 높은 확률로 조디악, 그리고 데바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곳에서 아주 작은 힌트라도 얻고, 추후 이곳에 도착할 은하를 위해 무언가 표식을 남겨 둘 생각이었다.

백색 성에 진입한 이준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사자궁 얀이었다.

붉은 갈기의 사자는 단잠에 들어 있던 중 불청객의 방문에 스르륵 눈을 떴다. 불행 중 다행히도 놈이 먼저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이준은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놈의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닌 이곳을 수호하는 것이리라고.

오히려 이준에게는 기회였다.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는 조디악. 지금 상태로 놈과 맞붙어 보았자 승산이 없을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변을 살피던 이준은 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검은 가죽 장갑을 벗고 주먹을 슬그머니 쥐었다가 폈다.

펼쳐진 손바닥 위로 진홍빛을 띤 자그마한 구가 생겨났다. 이준의 마력이 고밀도로 응축된 것이었다.

이준은 그것을 향해 후, 하고 살짝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그것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르륵 공중으로 춤추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홍빛이 감도는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다가 곧 공기 중에 녹아 버렸다.

‘다즐 브리즈(Dazzle Breeze)’. 공기나 바람 따위에 이준의 페로몬을 미약하게 실어 나르는 스킬이었다.

‘대규모 스킬이라는 점에서는 ‘얼루어 스프레드’와 같지만, 가장 큰 차이는 페로몬의 효과.’

고 레벨의 몬스터 미노타우로스는 물론 수중의 해양 생물마저 꾀어낼 정도로 강력한 페로몬을 일시적으로 방출하는 궁극 스킬 ‘얼루어 스프레드’와는 달리, 이 ‘다즐 브리즈’는 극소량의 페로몬을 바람에 실어 보내는 일반 스킬이었다.

더군다나 이 스킬은 대상에게 ‘매혹’이 발동되기까지 시간이 매우 오래 소모된다.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사흘까지도. 심지어 적이 조디악처럼 특수하다면 그 이상의 시일이 소모될 것이다.

따라서 전투 중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스킬이지만…….

‘은하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효과가 나온다면 충분해.’

또한 이 스킬에는 분명한 장점도 있었다. 워낙 미약한 페로몬을 분사하는 덕분에 적에게 들킬 가능성 또한 현저히 낮다는 점.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소모되는 마력이 적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에 최면을 걸 수 있다는 점.’

매혹이 늦게 발동된다는 것을 반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스킬은 발동 시기에 맞춰 미리 최면을 걸어 둘 수 있는, 일종의 ‘설치 기술’과도 같았다.

물론 현재 남은 마력으로는 복잡한 최면은 걸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내용을 생각하여 현명하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푸엣취!

사자궁 얀의 코 위로 보이지 않는 민들레 홀씨가 앉았는지, 녀석이 크게 재채기를 했다.

슈와아아아……!

고작 재채기의 위력이 얼마나 상당한지, 그 영향으로 돌풍이 일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준의 몸까지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준은 방심하지 않고 몸의 중심을 잡은 뒤, 놈의 눈을 정확히 응시했다. 시선을 감지한 얀이 힐끗 이준 쪽을 바라보는
순간,

“───.”

이준의 신체 실루엣을 따라 진홍빛의 기운이 일렁였다.

방금 전 이준은 얀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 내용은 단 두 가지.

첫째, 나를 공격하지 말 것.

그리고 둘째…….

‘중앙 탑에서 불길이 치솟는다면, 그쪽으로 가 데바를 공격해라.’

마음 같아서는 자멸 혹은 인간을 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데바나 다른 조디악들이 눈치채고 말 것이다.

여기서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인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준의 예상과는 달리, 얀은 생각보다 빨리 페로몬에 취했다. 사자궁 얀이 힘만 셀 뿐 지성이 없는 개체였던 덕분이었다.

이준은 턱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메마른 바람이 그의 옅은 금발을 훑고 지나갔다.

여기에 이 사자 말고 또 다른 조디악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쯤이면 민들레 씨앗이 사방으로 퍼져 다른 조디악들에게도 닿았을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최면을 걸 수 있었던 건 사자궁 얀뿐이지만, 페로몬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분명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 터.

이준은 그것이 언젠가 그들과 싸우게 될 은하 일행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이제 남은 마력은 고작해야 3% 정도.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이준은 땅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드는가 싶더니 손 주변으로는 작은 개미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준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남은 모든 마력을 소모했다.

“【조디악 중에 체스 말이 있다.】”

쉬이이이…….

이전과 비교하여 눈에 띄게 미약해진 진홍빛이 단 한 번 이준을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이준의 전언을 들은 개미들은 곧 흔적도 없이 다시 흩어졌다.

“읏, 하아…….”

마력이 고갈된 이준은 주변 바위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서 있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냈다.

이준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긴 다음, 은하나 다른 GIA 동료가 올 때까지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그러지 못했다.

“어디서 낯선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라니.”

눈부시게 밝은 빛과 함께, 하얀 로브를 쓴 한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날벌레 한 마리가 새어 들어 왔구나.”

펄럭이는 하얀 로브 아래로 가려져 있던 황금빛 홍채가 드러났다. 그곳에 새겨진 기이한 별자리 문양, 그리고 숨이 턱 막혀 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기상(氣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놈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조디악의 우두머리, 데바였다.

설마 이곳에 직접 나타날 줄이야. ‘다즐 브리즈’를 눈치챈 것일까?

하지만 방금 데바는 저에게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즉 이준이 한 짓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준은 침착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따지고 보면 은하보다 훨씬 더 긴 헌터 경력을 가진 그였다. 그동안 죽을 고비 따위는 수도 없이 넘겨 왔다.

더군다나 죽음 따위는 이미 바닷가에서 ‘얼루어 스프레드’를 사용할 때 각오한 일. 이제 와서 겁먹고 물러서는, 그딴 꼴사나운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아니라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군.”

이준은 한쪽 입꼬리를 빙긋 올리며 데바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고 있는 말투로구나.”

“물론이지. 그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

“…….”

그러자 데바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 탓에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내려앉은 침묵 끝에, 놈이 다시 높낮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자와는 가까운 사이인가?”

가까운 사이냐고? 이준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에 살짝 균열이 일었다.

“……꽤 곤란한 질문을 하네.”

은하와 자신의 거리가 가까운지 먼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가까웠을 때도 있었고, 멀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어떨까.

──모르겠다.

“어째서 도망가지 않지?”

데바가 또 한 번 묻자, 은하에 대해 떠올리던 이준이 입가에 미소를 더했다.

“꽤 여러 가지를 물어보는군. 그냥 죽이지 그래? 어차피 그럴 생각이잖아.”

“글쎄. 나는 쓸모가 있는 것은 버리지 않는 주의라.”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데바의 하얀 로브가 조금씩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게 먼지나 날벌레 따위라 하여도.”

그리고 다음 순간, 데바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격이다.’

이준은 그것을 인지했지만 애석하게도 몸이 맘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미 마력은 물론 체력조차 고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상태로도 데바를 이길 가능성이 낮은데, 지금 꼴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무리를 해서라도 페로몬을 방출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100% 탈진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내가 페로몬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면, 미리 설치해 둔 ‘다즐 브리즈’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그리 판단한 이준은 결국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고,

“읏……!”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쪽 팔이 데바에게 잡힌 뒤였다.

데바에게 있어 지금의 이준을 죽이는 일은 갓난아기의 목을 꺾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자는, 추후에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우선 팔 하나만 받아 두도록 하겠다.”

데바는 손에 쥐고 있던 이준의 팔을 우두둑 꺾었다. 그리고,

촤아아악!

붉고 더운 피가 사방으로 흐드러지듯 튀는 가운데, 이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곧장 깨닫지는 못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였을 때,

“……!!”

그제야 데바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한쪽 팔을 발견했다. 데바는 보란 듯이 그것을 들어 올리며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보관해 두도록 하마.”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이 다시금 드러나며, 찬란한 황금 빛이 이준을 서서히 휘감았다.

제주도를 수색하던 늑대의 길드원이 이준의 팔을 발견한 것은,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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