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의외의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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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의외의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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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의외의 조력자
2023.05.09.
탁…… 타닥…….
까맣게 탄 건물 조각들이 불바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든 두 눈동자를 번쩍이며, 은하는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휘이익! 휙! 휙!
은하의 주변에서 피어난 화염은 붉고 긴 꼬리를 그리며 데바를 향해 넝쿨처럼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놈에게 닿기도 전에 소멸하고, 나머지 절반은 주변 기둥이나 계단 따위에 부딪혀 붉은 상흔을 남기며 퍼져 나갔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것 보라며, 데바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은 힘들다고 불안한 기색을 띱니다.]
[역시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는 것이 좋겠다며 당신의 드레스 자락을 앙 깨뭅니다.]
루시는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일방적인 공격, 그리고 일방적인 방어. 그뿐인 전투였지만 실력 차는 확실했으니까.
연이은 마력 소모에 은하의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낸 뒤, 은하는 힐긋 데바 너머의 이준을 쳐다보았다.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으나, 만에 하나 자신이 도망친다면 이번에야말로 이준은 죽을 것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직 비장의 수가 두 개나 있었다.
시우의 도움으로 특별 훈련을 하는 동안 새롭게 연마한 기술. 그리고 데바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에단까지.
‘결계는 해제됐어. 그러니 에단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해.’
물론 이 괴물 같은 녀석을 상대로 시간을 벌기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데바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은하를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데바에게 있어서 그녀가 중요한 인재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언제 놈의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은하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 이어 갈 심산으로 다시 고개를 들어 놈과 눈을 마주했다.
붉은 화마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흰 로브의 남자, 데바가 은하에게 물어 왔다.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어째서 제안을 거절하는가?”
손을 들어 올린 데바가 커튼을 걷듯 살짝 손짓하자 일렁이던 불꽃이 사르륵 가라앉았다. 데바는 그 사이로 한 걸음 걸어오며 덧붙였다.
“이미 네 채널과 네뷸러의 동기화는 시작되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닫히게 될 채널인 것을.”
휘이익!
은하는 대답 대신 또 하나의 불꽃 덩어리를 그에게 날렸다. 물론 그 불꽃은 데바에게 닿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렸다.
저벅…….
데바는 또 한 걸음 은하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어마어마한 마력량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놈이 뿜어내는 엄청난 기세에 압도당한 것일까. 신체는 물론 모세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마력마저 얼어붙은 듯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데바가 살짝 턱을 들자, 로브 그늘에 가려져 있던 놈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홍채에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난생처음 보는 해괴한 눈동자가 은하를 향했다.
“──아이야, 넌 날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진 것인지 돌연 눈앞이 번쩍! 하고 밝게 물들었다.
콰지지직!
가까운 곳에서 귀가 멀어 버릴 듯한 굉음이 들리는 걸 인지하자마자 전신을 꿰뚫는 듯한 거센 충격이 몰아닥쳤다.
“커헉……!”
붉은 피를 토한 은하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간신히 무릎을 세운 덕분에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는 신세는 면했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단단한 바닥과 그대로 충돌한 무릎 뼈가 깨진 양 아파 왔다. 그러나 그 고통을 잊을 정도로 저릿저릿하고 아득한 고통이 전신으로 뻗쳐 나갔다.
마치 온몸에 고기압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금 그건 낙뢰였나?’
모르겠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 번개처럼 쏜살같았다는 점이었다. 문자 그대로 ‘빛의 속도’였다.
인간이, 각성자조차 반응할 수 없는 영역의 속도.
“고통스러운가.”
높낮이 없는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양 손바닥과 무릎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은하가 스르륵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데바는 은하의 머리맡까지 다가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 놈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 손을 뻗어 은하의 존재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뿌득…….
어금니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은하의 입술 사이에서 붉은 피가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콰지지직!
“큿……!”
그러나 또 한 번의 굉음과 함께 다시금 철퍼덕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황금 빛이 번쩍이는 순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빛의 창’을.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것 또한 데바의 능력 중 하나일 테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창은 분명 은하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런데 복부 부근에는 구멍은커녕 작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은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득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즉 방금 그 공격은 대상에게 ‘내상(內傷)’을 입히는 식임이 틀림없었다. 마치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은하는 결국 풀썩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띠링!
[───!!]
[─! ──!!]
눈앞에 노란 메시지창이 다급히 떠올랐다. 루시가 은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 탓에 문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일했다.’
데바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이 말이다.
아니……. 만일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겠지. 방금 전 그 빛의 창은 공격이 오리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으니까.
신음을 흘리는 은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주르륵, 따듯하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끝인가.’
10대 끝 무렵 각성하고 난 뒤, 갓 스무 살이 되고 지금까지 헌터 일을 계속해 오면서 은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 왔다.
하지만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지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건 바로 이준을 대신해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을 때였다. 돌연변이 몬스터를 만나 팔이 뜯겨 나간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당시 은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이제 그만 죽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춥고, 외롭고, 지치고, 고되었으니까.
그럼에도 은하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때의 은하를 그렇게 지독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
깜빡…….
은하는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황금 빛으로 물들어 있던 눈은 어느새 그 빛을 잃고 원래의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깜빡, 깜빡…….
은하는 조금 더 빠르게 눈을 깜빡여 보았다. 그것을 두어 번 반복하는 동안, 뿌옇게 번져 있던 시야가 아주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엄마─! 이것 봐. 내가 만들었어.’
‘와아, 우리 은하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
조금만 힘을 주면 툭 끊겨 버릴 정도로 낡은 소원 팔찌 하나와,
‘똑같은 팔찌를 선물해 드리려고 했는데, 서울 전체를 뒤져 보아도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도통 구할 수가 없어서요.’
‘그, 그래서 신 대표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셔서 말입니다. 다행히 대표님께서 헌터님의 팔찌 색깔이나 무늬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것보다는 조금 더 새것 티가 나는 또 하나의 소원 팔찌가.
실로 만들어진 두 팔찌는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은하의 왼쪽 팔목에 자리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언제나 같은 곳에.
은하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희미한 숨을 토해 내며 오른손을 더듬더듬 뻗었다. 그리고 두 팔찌를 꼬옥 감싸 쥐었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위쪽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데바가 입을 열었다.
“별의 가호를 받은 넌 이미 절반은 ‘이쪽 사람’이 되었을 텐데. 이곳에 도대체 어떤 미련이 남았지?”
놈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위기에 몰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녀를.
“포기해라. 이 채널은 곧 소멸할 거고, 너는 별이 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기정사실에 대해 서술하듯 일말의 감정 따위 실리지 않은 통보.
그렇다. 놈은 희망도, 가족도, 꿈도 모조리 잃어버린 그녀가 이 지독한 절망 속에서 결국 자신을…… 조디악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네 그 오만함이 패인(敗因)이 될 것이다, 데바.’
스르륵…….
은하는 소원 팔찌를 감싸고 있던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 표면을 통해 차게 식은 바닥의 온도가 느껴졌다.
초점조차 희미하던 은하의 검은 두 눈동자에 점차 다시금 황금 빛이 깃들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화아아아……!
은하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급격하게 고온이 전해진 땅 위로 안개처럼 자욱한 김이 오르는 것이었다.
“…….”
은하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데바가 턱을 들었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경계를 늦추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일시에 마력을 힘껏 끌어 올린 은하가 손바닥에 그것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쉬이이익!
은하의 손바닥에 몰려든 붉은 불빛이 땅 전체로 확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치 수중에 들어온 듯 시야가 희끄무레하게 변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물이 휘어져 보이기도 하고 뿌옇게 번져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환각이라도 보았나 봅니다. 요즘 날씨가 부쩍 더워졌지 않습니까.’
‘환각이라니?’
‘아지랑이라고도 하잖습니까. 햇볕에 땅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그 위로 연기 같은 게 피어올라서─.’
그때 시우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새 기술이었다.
급격하게 변한 시야는 순간적으로 대상의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고, 그것은 곧 판단 미스로 이어질 것이다. 은하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잔꾀를 부리는구나.”
일렁이는 시야를 응시하던 데바가 한쪽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렸다. 시야가 구불구불하게 변했다고 한들, 둘 사이의 실력 차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둘만의 싸움에서 승패란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일이었다.
그렇다. ‘둘만의’ 싸움이라면.
파아앗!
돌연 은하의 온몸이 밝은 금빛에 휩싸였다. 그 순간, 엷은 미소가 걸려 있던 데바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이건…….’
데바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은하를 휘감고 있는 이것이 ‘별의 가호’라는 것을.
그녀가 ‘별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조디악에서 추방당한 쌍아궁 루시가 들러붙어 있다는 건 진즉에 확인한 일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이 감각은…… 그것과는 달랐다. 데바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혀 눈앞의 별의 기운을 읽었다.
──쌍아궁 루나.
제 손으로 직접 소멸시켰던, 쌍아궁의 언니 쪽 기운이었다.
동생뿐만 아니라 언니 쪽의 가호도 받았던 것인가? 원래 한 개체에 두 개의 가호가 깃드는 일은 불가능했던 게 아니었나?
쌍아궁 루나는 인형을 주로 다루는 조디악이었다.
‘만약 그 아이의 가호가 이자에게 깃든 것이라면─.’
쉭, 쉬쉬쉭…….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조금씩 생겨났다. 그것은 곧 ‘흑염의 프린세스’의 형상을 갖추었다. 모두 같은 의상에 같은 얼굴을 한 외형이다.
하나, 둘, 셋……. 대충 보아도 열은 훌쩍 넘어 보이는 숫자. 아무리 데바여도 무엇이 실체인지 한 번에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스윽─
많은 인원의 ‘흑염의 프린세스’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팟! 팟! 팟! 팟!
그리고 그만큼 많은 양의 불의 구체가 동시에 데바를 향해 날아왔다.
‘이 정도로 많은 공격을 한 번에 무력화시키는 건 데바여도 힘들 거야.’
‘흑염의 프린세스’ 무리 속에 섞인 은하는 그리 생각하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놈이 손을 들어 불의 구체를 소멸시키거나, 멀리 회피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쉴 새 없이 불꽃을 난사했다. 그런데.
빠드득─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로 홱 고개를 돌린 순간, 데바의 손에 의해 목이 꺾여 버린 ‘흑염의 프린세스’를 목격했다.
“오답이었나.”
무심히 중얼거린 데바는 손에 쥐고 있던 ‘흑염의 프린세스’를 휙 하니 던져 버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흑염의 프린세스’는 곧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휘릭!
또다시 눈앞에서 사라진 데바는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다음 ‘흑염의 프린세스’의 코앞에 번쩍 나타났고,
빠드득─
이전에 그랬듯 그것의 목을 꺾어 버렸다.
이 많은 그림자 중 실재(實在)하는 것은 단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방금 전 목이 꺾였던 ‘흑염의 프린세스’가 진짜 은하였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놈이 진짜를 찾기 전에 어서.’
은하는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공격한다.’
파앗!
은하의 양어깨 곁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팟, 팟, 팟, 파앗!
은하의 의지를 전해 받은 ‘흑염의 프린세스’들의 양어깨에도 똑같은 형식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독자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은하가 하는 생각을 따라 하고 흉내 내는, 일종의 꼭두각시였다.
동시에 피어오른 불꽃들이 어둑어둑한 무채색 공간을 순식간에 환한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수많은 불꽃에 의해 주변의 아지랑이가 조금 더 짙어졌다.
타앗─!
안개처럼 뿌옇게 번진 아지랑이 속으로, 은하를 포함한 ‘흑염의 프린세스’가 일제히 데바를 향해 돌진했다.
데바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작게 턱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데바의 눈동자가 슬쩍 드러났다. ‘진짜’를 찾기 위하여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
그 많은 ‘흑염의 프린세스’ 중, 놈의 눈동자가 정확히 은하를 향했다.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알아차린 것이지? 순간적으로 당황한 은하는 도중에 발을 멈추려고 했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때는 정말로 ‘본체’를 들키고 말 것이다.
‘지금을 놓친다면 언제 또 놈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
결국 은하는 여기서 멈추는 것보다 속도를 더하는 쪽을 택했다.
스윽…….
놈은 어서 오라는 듯 은하 쪽으로 서서히 손을 들었다. 이대로 놈에게 돌진한다면, 저 손에 닿는 순간 은하의 신체 중 어디 한 군데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은하 역시 놈을 향해 오른손을 쩍 펼쳐 보였다.
‘어차피 오래전에 한 번 잃었던 팔이야.’
은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팔 한쪽쯤 내줄 각오를 다졌다.
데바는 그런 은하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은하의 손과 데바의 손이 맞닿기 바로 직전이었다.
크르르르……!!
어디선가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
콰직!
데바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깨달았을 땐 이미 팔뚝 아래가 전체적으로 뜯겨 나간 상태였다.
은하가 한 짓은 아니었다. 탓, 하고 어중간한 자리에 도중 착지한 은하는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너는…….”
뜯겨 나간 제 팔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데바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갈기. 성난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 살벌하게 드러난 송곳니와 다부진 근육 위에 새겨진 별 문양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데바를 공격한 것은 다름 아닌 사자궁 얀.
입구 부근에서 기둥을 지키고 있던, 사자 외형의 조디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