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 그 시절의 당신들처럼 (281/306)


#281. 그 시절의 당신들처럼
2023.05.08.


엘리멘탈 마스터는 자신의 귀를 후벼 파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재수 없고 느끼한 목소리는…….

“【바르나바?】”

GIA 소속이라던 그 안경잡이가 틀림없었다.

이 ‘텔레파시’는 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엘리멘탈 마스터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미국에 출현한 S급 게이트에서 바르나바에게 목숨을 빚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 마스터는 제 곁에 선 부하에게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짓을 한 뒤 텔레파시에 집중했다.

“【무슨 볼일입니까?】”

「지금 당장 제주도에 지원을 와 줬으면 하는데요.」

“【늘 그렇듯 갑작스럽군요, 당신은.】”

엘리멘탈 마스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르나바는 그의 목숨을 구한 이후, 틈만 나면 그 일을 들먹이며 무급으로 부려 먹으려 들곤 했다.

아마 지금도 그게 목적일 테다. 설마 제주도 일로 그가 연락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라서요. 당신도 제주도 소식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겠죠.」

“【네, 압니다. 실제로 백랑에게서 지원 요청을 받기도 했었고.】”

「그런데 오지 않은 겁니까?」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엘리멘탈 마스터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평소였다면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그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앞의 함몰된 도시를 응시하며 엘리멘탈 마스터는 자조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으니까요.】”

「당신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몰랐죠.」

단조로운 위로를 던진 바르나바는 곧장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원을 부탁합니다. 당장 여기로 와 준다면 당신이 내게 진 빚을 모두 없던 일로 해도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엘리멘탈 마스터는 허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변기 속 휴지처럼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해일에 잠식되었다. 그중에는, 그의 절친한 벗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로서는 벗의 시체를 건져 올리는 일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힘이 있어. 사전에 재앙을 막을 만한 여건이, 지금은 있다는 소리야.’

‘일이 터지고 나서부터는 늦어.’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명예와 재물 따위, 눈앞에 펼쳐진 재앙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너무도 늦어 버렸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제주도로 넘어갈 수 있다면, 속죄할 기회가 있다면, 그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만일 이곳을 비우게 된다면 이곳 서배너는?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침묵하던 엘리멘탈 마스터는 다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참 솔깃한 제안입니다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요.】”

「어째서입니까?」

“【이곳도 조디악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캐나다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고요.】”

「조디악이 그곳에도 출몰했다는 겁니까?」

“【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 한복판에 말이죠. 지금부터 우리는 놈을 토벌하러 가야 할 듯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쪽이군요. 제주도 쪽에 조디악의 우두머리가 있는 것이죠?】”

「……높은 확률로요.」

“【그렇다면, 그쪽이 실패하면 인류는 전멸할 겁니다. 주제넘고 뻔뻔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쪽 정리를 부탁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엘리멘탈 마스터는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우뚝 발을 멈춰 세웠다.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그날 보았던 검은 드레스의 희한한 여자를 떠올렸다.

“【혹시 그곳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거대한 해일을 향해 두 손을 높게 들어 올린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당신이 옳았다고.】”

그러니 지금부터 엘리멘탈 마스터는…… 아니, 미국 헌터 연합은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그 시절의 당신들처럼.

* * *

“하…… 뒤질 뻔했네.”

끄응차. 호수에서 올라온 아연은 입고 있던 항공 점퍼를 훌렁 벗었다.

두 손으로 힘을 주어 쭈욱 쥐어짜니 점퍼가 머금고 있던 물이 폭포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그 변태 조디악이 5초만 더 늦게 결계를 해제했어도 사망 엔딩 확정이었을 듯.’

호수 전체에 독이 퍼져 갈 무렵, 오기로 숨을 참고 있던 아연은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결계고 나발이고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아연은 호수를 빠져나가기 위해 위쪽을 향해 헤엄쳤다.

비로소 시야에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을 때, 아연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만. 결계가 해제되지 않으면 나 여기서 못 나가는 거 아냐?’

X발……. 아연이 욕설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신은 존재하는 걸까. 허망한 눈으로 수면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결계가 해제되었다. 나이스 타이밍! 아연은 그리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조디악이 죽은 것인지 도망친 것인지는 미궁 속에 빠졌지만…….

‘애초에 결계를 해제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미션 클리어지, 뭐.’

점퍼를 탁탁 털어 낸 아연은 그것을 어깨에 걸쳤다.

‘송민주 그 녀석은 지금쯤 사자 배 속이려나.’

그다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 땅에 묻어 주러라도 가야겠다. 언니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겠는데.’

큰 호수가 있는 이곳은 꽤 넓은 땅이었다. 저 멀리 공중을 부유하는 땅들이 여기저기 펼쳐진 광경으로 보아 아직 백색 성 필드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연은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슥 가져갔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체인 로프가 차라랑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가 사자궁 얀을 맡는 동안 마법진 너머로 이동하기 직전, 아연은 자신의 체인 로프를 그 주변 바위에 미리 설치하여 고정해 두었다.

이것은 아연이 마력이 유지되는 한, 고무줄처럼 길이가 늘어났다. 이론상으로는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적의 고유 능력으로 만들어진 고립된 공간이나 아예 채널 자체가 다른 경우에는 어렵다. 이를테면 현실 세계과 게이트 내부는 체인 로프로도 이을 수 없다.

‘즉 이 사슬이 끊어져 있으면 난 아주 다른 어딘가로 이동했다는 말이 돼.’

아연은 허리춤에 걸려 있는 체인 로프를 주욱 당겨 보았다. 곧 그것은 팽팽하게 고정되었다.

‘나이스!’

다행히 지금 아연이 서 있는 호수 근처는 사자궁 얀이 있던 곳과 같은 ‘채널’인 듯했다.

그녀는 밧줄을 당기듯 체인 로프를 잡아당기며 그것을 이정표 삼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곧 어렵지 않게 민주와 헤드 헌터들이 있는 사자궁 얀의 영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사 복귀에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콰아아앙─!!

귀를 때리는 듯한 강렬한 굉음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탄알처럼 사납게 튀어 대는 바위 파편 사이로 슉, 슉, 슉, 잘도 도망 다니는 날파리 한 마리…… 아니, 민주가 보였다.

“오, 아직 안 죽었네.”

아연이 놀랐다는 듯 휘파람을 불자, 얀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민주가 힐긋 시선을 돌렸다.

“너야말로.”

“언니는?”

“인간적으로 이 꼴을 봤으면 내 안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콜록, 민주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내며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두르고 있던 녹색 망토는 걸레인지 망토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 있었고, 얼굴의 절반은 피로 흥건했다.

평소 오른손잡이인 그가 왼손으로 바주카를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른팔은 이미 쓸 수 없는 상태인 듯했다.

마른 눈빛으로 민주의 상태를 스르륵 살핀 아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난 벌써 끝났을 줄 알았지. 네 쪽이든 저놈 쪽이든.”

“끝? 그딴 거 없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민주가 철컥! 바주카를 장전하며 얀을 겨누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계속 놀아 줘야지.”

펑!

하지만 한 손만으로 바주카를 든 채 놈에게 포탄을 쏘는 것이 힘에 부쳤는지, 공격은 얀에게 닿지 않았다. 쯧, 작게 혀를 찬 민주가 아연을 홱 쏘아보았다.

“……야,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왔으면 좀 돕지 그래?”

“내가 왜? 내 임무는 끝났는데.”

아연은 귀를 후벼 파며 주변 기둥으로 향했다. 어차피 저 사자는 영역 안에 발을 들이지만 않으면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때, 그녀를 붙잡는 짧고 굵은 한 마디가 들려왔으니…….

“10억.”

우뚝.

제자리에 멈춘 아연의 곁으로 차라랑, 체인 로프가 다시금 나타났다.

“콜.”

진작 그렇게 나오셔야지. 알게 된 지 원 데이 투 데이도 아니고 말이야.

씨익 입꼬리를 올린 아연은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체인 로프도 함께 크게 회전했다.

“일단 목줄부터 좀 채워 볼까.”

“그거, 끊어질걸.”

“괜찮.”

파아앗!

아연의 주변으로 체인 로프가 일제히 거미 다리처럼 뻗어 나왔다.

“X나 많거든.”

게다가 아까 그 빌어먹을 호수 속과는 달리 여기서는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는 말이지.

휘리리릭!

아연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던 얀에게로 체인 로프를 던졌다. 그런데.

“……엥?”

턱!

저 정도쯤 가뿐히 피할 것이라는 민주의 예상과는 달리 사자궁 얀은 체인 로프를 피하지 않았다. 체인 로프는 놈의 단단한 가죽에 아주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어쨌든 말이다.

이런 이쑤시개 같은 사슬 따위 피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냥 짐승 새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도발할 줄도 아네?”

피식 웃음을 흘린 아연이 다음 체인 로프를 던지기 위해 거머쥐는 순간,

콰과과과광!

뒤편에서 거센 폭발음이 들렸다.

“뭐, 뭐야?”

흠칫 놀란 아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웬일인지 중앙에 위치한 탑이 붉은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언니인가? 하지만 언니는 흑염을 사용하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앙 탑을 응시하던 와중,

콰직!

얀이 밟고 있던 땅에 거친 금이 번졌다.

아뿔싸, 방심했다. 불타오르는 중앙 탑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있었던 아연은 퍼뜩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크르르르…….

네 개의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얀이 그대로 높이 점프했다.

덮치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었다.

휘익─

거대한 놈의 그림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민주와 아연 그리고 두 헤드 헌터의 머리 위를 날렵하게 지나쳤다.

탓.

얀은 오른쪽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땅을 밟으며 착지했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디론가 향해 일직선으로 우두두 뛰어가기 시작했다.

“……? 저 녀석 어디 가?”

갑자기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건가? 아연은 얀의 돌발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 얀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에 있는 아연이나 민주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지나쳐 버린 점도 이상했다.

“중앙 탑 방향이야.”

민주의 시선이 불타고 있는 탑에 한 번, 그리고 얀이 사라진 방향에 한 번 닿았다가 이내 아연에게로 돌아왔다.

“뭘 멍하니 있어? 쫓아가지 않고.”

“왜 명령?”

“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여길 지켜야 해. 이 사람들도 있고.”

민주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두 헤드 헌터, 발키리와 뮤턴트를 가리켰다.

“10억, 안 받을 거야?”

“아니용. 그럴 리가용.”

아연은 어울리지 않는 콧소리를 내며 방긋 웃었다.

“저쪽은 나한테 맡기고 여기서 쉬고 있어요, 오빠아!”

나이가 뭐가 중요하나. 돈 주는 사람은 오빠다.

민주가 무어라 헛소리를 뱉기도 전에 빠르게 갈고리를 지닌 체인 로프를 던진 아연은, 그것을 반대편 지면에 단단히 고정한 후 짚라인을 타듯 미끄러지며 사라졌다.

다소 익살스럽게 장난을 치긴 했지만…….

휘익, 탁!

체인 로프를 타고 반대편 땅에 도착한 아연은 웃음기가 없는 얼굴로 턱을 들었다.

발견되지 않은 쌍어궁의 시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중앙 탑.

돌연 자리를 비우고 탑을 향해 뛰어간 사자궁.

그리고 소식이 없는 백랑과 언니.

‘왠지 이것도 수지 타산에는 안 맞는 일 같은데…….’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아연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싣고 달리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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