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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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연락
2023.05.07.
“【유다, 거긴 좀 어때?】”
한 남자가 검게 썩은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눈에 안대를 쓰고 거대한 붉은 철퇴를 든 사나운 인상의 그는 GIA의 멤버 중 하나인 칼리프. GIA 내부에서는 코드네임 ‘야고보’로 통하고 있는 자였다.
맞은편에 있던 녹스, 코드네임 ‘유다’는 야고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못 찾았어.】”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군. 하긴, 섬 전체가 이 지경이 됐는데 보스의 자취가 남아 있을 리가 있나.】”
야고보는 허망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한라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백색 성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검고 거대한 웅덩이가 도넛 모양으로 생성되어 있었다.
그 아래가 바다일지, 끝도 없는 지저(地底)일지, 혹은 게이트 내부일지는 들어가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점은, 사고이든 고의이든 저곳에 빠진 사람들 중 다시 돌아온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GIA는 몬스터를 해치우거나 피해 다니며 목적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보스, 마에스트로 백이준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아무런 수확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지, 지금까지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작은 단서조차 얻지 못한 거라면─.】”
“【야고보.】”
그의 말꼬리를 자른 녹스가 살벌하게 눈매를 세웠다. 야고보는 하던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러니까 난…… 지금 상황이 워낙 안 좋으니, 우리도 수색 작업보다는 우선 백색 성에 지원을 가는 편이 낫지 않겠나 해서 말이다.】”
“【그 말은 보스를 찾기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로 들리는데.】”
녹스는 당장이라도 야고보의 멱살을 움켜쥘 기세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녀와 싸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만.
“【유다, 보스가 우리에게 늘 했던 말을 기억하나? 보스는 우리에게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힘을 기르라고 하셨어.】”
“【그래, 그랬지. 하지만 정작 보스는 냉정하지 못했잖아.】”
당시 이준, 은하와 함께 전용기를 타고 제주도에 왔었던 녹스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준이 은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이후 은하가 이준 없이 혼자 살아 돌아왔을 때, 녹스가 은하를 탓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준이 어떤 마음으로 ‘그 선택’을 내렸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스를 욕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라면 늘 냉정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자신이 지금 눈앞의 재앙을 보고도 보스를 찾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 또한, 누구도 욕할 수 없을 것이다.
“【난 보스의 시체를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야.】”
녹스는 야고보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휙, 하고 도약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야고보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철퇴를 질질 끌며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삐비비비─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울렸다. 뚜껑이 달린 동그란 나침반 형태의 그것은 GIA 멤버끼리만 사용하는 호출기였다.
호출을 보낸 장본인은…….
“【……안드레아?】”
부재중인 이준을 대신하여 그들을 이끌고 있는 포츈 텔러였다.
이후, 호출을 받은 GIA 멤버들은 백색 성 근처 어딘가에 모였다.
미국 본부에 남아 있는 2인과 각국에 파견 활동 중인 3인을 제외한 여섯 명의 멤버가 한데 모인 것으로, 비밀 조직의 특성상 멤버의 과반수가 같은 자리에 모인 것은 정확히 5년 만의 일이었다.
“【조디악 중에 체스 말이 있다…… 고?】”
한편 안드레아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야고보는 안대에 가려져 있지 않은 오른쪽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보스가 조디악에게 매혹을 걸어 두었다는 건가?】”
“【역시 보스야!】”
맞은편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녹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과 절망에 어둡게 물들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지금은 안도와 희망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환호하는 멤버들 앞에서, 안드레아는 여전히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좋아하기는 일러. 요한이 살아 있다는 건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메시지는 분명 보스가 남긴 거잖아.】”
“【능력을 사용해 우리에게 전언을 남겨 둔 이후, 조디악에게 발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야. 백색 성에서 놈들의 눈을 피해 페로몬을 방출하는 건.】”
안드레아는 손에 든 검은 새의 깃털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아마 발각될 것을 각오하고, 목숨까지 건 행동이었겠지.】”
그러자 안드레아 뒤쪽, 가파르게 깎인 돌벽에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또 다른 GIA 멤버, 코드네임 ‘마티아’가 의문을 던졌다.
“【보스는 왜 그렇게까지……. 능력을 쓸 여유가 있었던 것이라면 충분히 살아 나올 틈도 있었다는 말이잖아.】”
“【마티아, 정말 모르겠어? 보스는 판단했던 거야.】”
야고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조디악을, 데바를 꼭 쓰러트려야 한다고.】”
싸아아아…….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다만 다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보스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계획하였는지.
“【어쨌든, 그렇다면 우리 목적이 하나 더 추가되겠네.】”
팔짱을 낀 채 지금까지 오가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녹안의 남자, 코드네임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조디악의 섬멸.】”
다른 멤버들도 그에 동의하는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안드레아는 그런 그들 앞을 잠시 막아섰다.
“【잠깐만. 지금까지 너희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어.】”
모두의 시선이 안드레아에게 향했다. 안드레아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GIA가 인류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진 조직으로 알고 있었지. 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눈동자는 조금은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요한이 만들고 싶었던 건, 소중한 사람이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거기까지 말한 안드레아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GIA의 동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그가 확인차 물었다.
“【혹시 이 말을 듣고 실망한 사람 있어?】”
안드레아의 물음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의 뜻을 표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부정인지는 보면 알았다.
안드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가 볼까.】”
“【잠깐만요.】”
연하늘색 머리카락에 유한 인상의 한 남자는 읽고 있던 성경을 탁, 하고 덮었다. 코드네임 ‘바르나바’였다.
“【보스의 뜻을 잇는 일은 대찬성입니다만, 지금 이 상태로 백색 성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됩니다.】”
은색 안경테를 중지로 살짝 올린 그는 지금 당장 백색 성으로 뛰어들 기세인 어리석고도 용감한 동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우선은 진입부터가 문제입니다. 아까 저와 마티아가 확인해 본 결과 백색 성에는 결계가 걸려 있었으니까요. 그곳에는 헤드 헌터와 S급 헌터만이 진입 가능하죠. 그렇다면 우리들 중 진입 자격이 있는 건 야고보, 당신과 나 둘뿐입니다.】”
“【그거라면 걱정 마. 그 결계, 조금 전 풀린 것 같았거든. 그렇지, 유다?】”
녹스와 함께 페어를 짜고 있던 야고보가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사실이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제 더 이상 결계는 없는 것 같더군. 아마 성 내부에서 누군가가 결계를 해제한 거겠지.】”
“【들었지? 그러니 문제없어.】”
그 조디악인지 뭔지, 낯짝이나 한번 봐 보자고. 성미가 급한 야고보는 철퇴를 훌쩍 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바르나바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설령 결계가 깨졌다고 해도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일 겁니다. 현재 이곳에 모여 있는 건 안드레아, 야고보, 유다, 마티아, 토마스 그리고 저까지 총 여섯 명뿐이잖습니까.】”
“【절반이나 되는군.】”
“【절반‘밖에’ 되지 않죠.】”
“【겁이 나는 건가, 바르나바?】”
“【신중한 것이라고 해 주시죠. 우리 중에 직접 조디악을 목격하거나 상대해 본 자는 없습니다. 다만 조디악이 보스의 목숨을…… 아니, 적어도 팔 한쪽을 잃게 했다는 것만은 알고 있죠.】”
만만한 적이 아닐 거란 소립니다. 거기까지 말한 바르나바의 눈빛이 사뭇 굳었다.
“【그럼? 보스가 우리에게 메시지까지 남겨 두었는데 인원이 적으니까 후퇴하자고?】”
“【진정하세요, 야고보. 안경에 침이 튑니다.】”
바르나바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옷에 닦으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듯이 보스의 뜻을 잇는 일에는 저도 대찬성입니다. 또한 현재까지 백색 성 밖에서 보스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성 내부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기도 하죠. 내 말은 조금 더 인원이 필요하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있는 멤버들을 여기로 소환하는 건 불가능해. 본부에 있는 녀석들은 규율상 그곳을 벗어날 수 없고, 유럽에 간 세 녀석은 7년째 첩자 임무를 수행 중이잖아.】”
“【그들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안경알을 깨끗이 닦은 바르나바는 안경을 척, 다시 쓰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떠오르는 조력자가 있으니까요.】”
* * *
미국 조지아주 동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서배너(Savannah).
“【크, 큰일입니다! 해일이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솨아아아…….
건물이 무너지고 파도에 사람이나 차량 할 것 없이 휩쓸려 내려간다.
해안과 육지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민간인을 되도록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헌터들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진보랏빛 장발을 휘날리며 성이 난 바닷바람에 꿋꿋이 대항하고 있었다.
“【결계나 방어 능력을 가진 헌터들을 조금 더 뒤쪽으로 배치하고 스킬 가동률을 올려 주십시오. 나머지 헌터들은 그들을 엄호하겠습니다.】”
“【예, 필릭스 님!】”
필릭스. 그것이 진보랏빛 머리카락의 청년…… 아니, 엘리멘탈 마스터의 이름이었다.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 그는 코앞에 펼쳐진 재앙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의 아득한 비명이 파도에 함께 휩쓸려 지나가고, 비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굵은 물방울들이 시야를 가릴 만큼 빗발치고 있었다.
덮쳐 오는 해일에 항구에 즐비했던 건물이 밀가루 반죽처럼 무너지고, 쓰러진 가로등 전선이 뒤얽혀 번쩍번쩍 스파크를 튀겨 댔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익사 혹은 쇼크사, 둘 중 하나로 목숨을 잃어 갔다.
──끝이 없었다.
“【…….】”
엘리멘탈 마스터는 참담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출몰했다는 제보가 미국 헌터 협회에 도착한 것은 불과 다섯 시간 전. 그리고 대서양과 인접한 도시인 이곳 서배너가 폭풍우와 해일에 휩쓸리게 된 것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가 함몰한 것이다.
──헤드 헌터 2위, 엘리멘탈 마스터와 미국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3대 길드가 한곳에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추가된 제보에 따르면 대서양 한가운데에 나타난 괴생명체의 정체는 섬만 한 크기의 게라고 했다.
‘아마도…… 거해궁(巨蟹宮) 조디악이겠지.’
가장 첫 습격은 한국 헌터 협회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에도 조디악의 습격이 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그쪽으로 향한 헤드 헌터 중 러시아 출신 ‘니키타’와 몽골 출신 ‘칸’에 의하면 크렘린에 출몰한 조디악은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는데, 스스로를 ‘처녀궁(處女宮) 엘리샤’라 칭했다고 한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쪽 상황을 취재하러 떠난 각국의 신문사는 물론 헤드 헌터나 다른 베테랑 헌터들까지 싹 다 연락이 단절되어 버렸으니까.
이렇듯 상황이 심각해지다 보니, 이곳 역시 안전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설마 대서양에 나타나 미국과 유럽을 한 번에 공격할 줄이야.’
바다 위의 게 괴물, 거해궁은 자신이 가진 열 개의 다리를 고무줄처럼 늘려 인근 해역에 강제적인 폭풍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이례적인 규모의 해일이 사방에 뻗쳤다.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세 군데. 이곳 미국의 서배너와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의 호카 곶(Cape Roca), 그리고 캐나다의 세인트존스(Saint John’s)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그랬다는 것이지,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많은 국가와 지역에 피해가 뻗을 것이다.
즉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방지나 구출, 해결 따위가 아닌 최소한의 지탱에 불과했다.
“【필릭스 님.】”
또 한 명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왔다. 엘리멘탈 마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해궁 공략대는 편성됐습니까?】”
“【그것이……. 선발대의 보고에 따르면 조디악이 바다 아래로 숨어 버렸다고 합니다.】”
“【뭐라…… 구요?】”
“【상공에서 미사일 폭격이나 원거리 스킬 공격으로 급습을 시도해 보았지만 해저까지 조준이 힘든 모양입니다.】”
조준이 힘들다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해결될 일이지만, 놈의 주변에는 워낙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어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이 불가할 것이다.
“【만에 하나 맞췄다고 한들 놈의 껍질이 워낙 단단해서 타격을 입을지도 미지수이고요…….】”
부하의 보고에 엘리멘탈 마스터가 아랫입술을 짓씹는 순간이었다.
「필릭스.」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