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 Chess piece in Zodiac (279/306)


#279. Chess piece in Zodiac
2023.05.06.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던가.”

높낮이 없이 무덤덤한 음성이 불쑥 다가왔다. 데바였다.

그의 표정은 전과 비교하여 일말의 변화도 없이 담담했다. 만일 방금 셰이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은하조차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을 정도로.

하지만 은하는 보고 말았다.

‘방금 그건, 데바가 셰이핌을 죽인 거야.’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태초의 별이 가진 힘에 두렵다는 듯이 몸을 어둠 속 깊이 숨깁니다.]

[조디악이란 데바가 ‘창조’한 존재. 따라서 ‘파괴’ 역시 그에게는 손쉽게 가능하다고 알립니다.]

비록 사용하는 능력은 달랐지만 에단 역시 천칭궁 아스트를 손쉽게 처리했었다. 태초의 별, 그들은 은하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막강한 존재인 듯했다.

다만…… 은하가 아는 태초의 별과 지금 눈앞에 나타난 태초의 별은 같은 날 같은 때에 태어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달랐다.

“……어째서 셰이핌을 죽였지?”

은하는 바닥에 남은 물 자국에서 시선을 떼고 데바에게 물었다.

“셰이핌? 그게 누구지?”

“장난하는 건가? 방금 전 네가 죽인 쌍어궁의 이름이잖아.”

“아아.”

그런 이름이었던가. 깊게 눌러쓴 로브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데바의 입매가 둥그런 호선을 그렸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면 기억할 필요가 없는 먼지 같은 존재, 그뿐이었겠지.”

그 순간 은하는 깨달았다.

데바에게 있어 셰이핌은, 이번 채널에서 처음 만난 백이준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름조차 기억할 필요가 없는 ‘먼지’ 같은 존재.

“문제 될 것 없다. 별의 자리는 언제든지 채울 수 있으니.”

영원하도록 찬란한 별은 없는 법.

다만 그것은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어느 채널이든지 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인류는 그보다도 많으니.

이 채널에서도, 다음 채널에서도, 그다음 채널에서도 자격을 갖춘 자만 있다면 별의 자리를 채우는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말해 봐라, 아이야. 무슨 별을 원하느냐. 네가 바라는 자리를 주마.”

데바는 두 손을 넓게 벌렸다.

“우리는 낙원이라는 지붕 아래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가족?”

“그렇다, 가족.”

“그럼 쌍어궁은 네 가족이 아니었나?”

“그자는 자격 부족이었다.”

“하…….”

자격. 자격이라. 단단하게 굳어 있던 은하의 입매에 미약한 조소가 걸렸다.

“어째서 웃지?”

“가족, 가족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싶어서.”

데바를 응시하는 은하의 두 눈이 비웃음을 머금고 휘어졌다.

“사실 가족 같은 건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주제에 말이야.”

“…….”

처음이었다.

데바가 은하 앞에서 잠시나마 멈칫한 것은.

“잘 모르는 것 같으니 하나 알려 주마.”

꾸욱,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준 은하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가족이 되는 데에 자격 같은 건 필요 없어.”

파앗!

땅을 거세게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공중을 향해 뛰어오른 은하가 고점에 다다랐을 때, 그녀 주변으로 검은 불꽃 구체가 화르륵 생성되었다.

물론 놈이 맨손으로 흑염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럼 이토록 많은 양의 흑염을 한 번에 쏘아 댄다면 어떨까?

과연 이번에도 손을 뻗어 낚아채듯 흑염을 쥘 것인가?

“아직은 재주가 부족하구나.”

은하의 예상대로 데바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스르륵 손바닥을 펼쳤다. 굳이 회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이 은하가 바라던 바였다.

휘리릭!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한 은하가 낙하하는 속도를 더하자, 눈앞에 띠링! 노란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데바의 손에 닿지 않을 것을 경고합니다.]

[데바가 손을 대지 않고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창조한 존재에 한한다며, 그 외의 존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으로 접촉해야 한다고 알립니다.]

‘그렇군.’

데바가 흑염을 손에 거머쥐는 순간, 은하는 놈을 향해 눈 깜짝할 새 돌진했고…….

‘내려찍는다.’

콰과광─!!

은하가 휘두른 양산에 의해 지면이 파괴되며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바람이 일었다.

돌로 만들어진 두껍고도 단단한 지면이 일격에 부서질 정도의 파괴력. 자연계열 헌터가 아니라 육체강화계열 헌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은하는 만족스럽지 못해 혀를 찼다. 양산 손잡이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놓쳤어.’

빠르게 다음 공격을 위해 그대로 또 한 번 땅을 박차며 뛰어오르려는데,

“훌륭하구나.”

“……?!”

──양산이 어딘가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 순간, 은하는 깨달았다. 양산 끄트머리가 데바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래서는 대화가 되지 않겠구나.”

파스스─

“……!!”

데바의 손에 접촉한 은하의 ‘우아한 양산’이 바람에 마모되는 퇴적암처럼 부서졌다.

물론 이전에도 양산의 내구도가 닳거나 격렬한 전투 탓에 휘어진 적은 있었으나…….

[경고. ‘흑염의 프린세스’의 ‘우아한 양산’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양산을 얻은 이래 처음이었다.

[경고. 업적 ‘검게 물든 다섯 가지 보배를 착용하라’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아이템이 부족합니다!]

[칭호 ‘흑염의 프린세스’가 해제됩니다.]

[고유 능력 진화가 취소됩니다.]

[흑염(黑焰) ▶ 화염(火焰)]

후드득…….

검은 재가 된 양산이 발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에 따라 은하의 시선 역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나?”

발밑을 주시하고 있던 은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전혀.”

양산이 파괴되었다. 더는 흑염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인가. 은하는 데바와 대화를 할 생각도, 조디악이 될 생각도, 뜻을 굽힐 생각도 없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세트 효과가 해제된 지금 상태로 데바에게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라며, 새로운 양산을 만들 때까지 잠시 자리를 피하자고 다급히 당신을 말립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이런 괴물 같은 놈을 상대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후우우욱…….

은하에게서 태어난 붉은 불길은 뱀의 혀처럼 요동치며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안 돼!]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고유 능력 사용을 저지하고자 합니다.]

[오류. 권한이 없습니다.]

고유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다른 무기로. 모든 무기가 망가진다면 그때는 주먹으로. 주먹이 잘린다면 두 다리로 공격하면 된다.

30년 전, 은하는 목숨을 건 전장에서 그렇게 배웠다.

화르륵!

은하가 피워 낸 붉은 불꽃은 데바의 흰 로브로 옮겨 갔다. 그러나 그 불꽃이 놈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로브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의 두 눈이 다시금 드러나며 그 홍채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 형형한 빛깔을 자아냈다.

스르륵…….

데바는 먼지를 털어 내듯 로브를 털었다. 놈에게 겨우 닿았던 불길은 오직 그 가벼운 손길에 너무도 쉽사리 소멸해 버렸다.

‘젠장.’

빠득, 이를 간 은하의 어깨 위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불꽃이 생성되던 바로 그 순간,

“네가 찾고 있던 자를 만나게 해 주마.”

멈칫─

은하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의 어깨 너머에서 황금 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이자가 맞는가 보아라.”

“……!”

그곳을 응시하던 은하의 눈이 점차 크게 확장되었다.

반투명한 구체 속, 한 남자가 보이지 않는 옷걸이에 걸리기라도 한 듯 축 늘어져 있다.

은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색소가 옅은 백금발. 피에 흠뻑 젖은 셔츠. 찢어진 정장 자켓은 오른쪽 팔소매가 텅 빈 듯 흔들리고 있다.

“백이, 준……?”

그가 확실했다.

“이자를 살려 주겠다.”

데바가 살짝 손짓하자 공중을 부유하던 금빛 구체가 사라지며, 그 속에 담겨 있던 이준이 털썩 바닥 위로 떨어졌다.

얼핏 보아서는 죽은 지 오래된 시체처럼 보이지만, 가슴팍이 미약하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숨만 붙어 있는 상태인 듯했다.

“원한다면 너의 네뷸러에 데리고 가는 것도 허락하마.”

“……뭐?”

이준에게서 시선을 뗀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채널에서 원하는 것은 너 하나뿐이니.”

데바는 고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은하의 손을 슥 들어 보였다.

“선택해라, 아이야.”

데바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이 다가오며 시야가 아득해지고 정신 또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자를 살리고 나와 함께 ‘별의 나들목’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 채널과 함께 소멸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네게 주마.”

“…….”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심결에 데바의 말을 되뇌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은하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무너지지 말고 선배의 길을 가 주십시오. 내가 돕겠습니다.’

나의 길.

‘엄마, 엄마! 공주님이 웃었어!’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가 검은 원피스만 고집해서……. 오늘 헌터님이 이곳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딸을 데려왔는데, 어찌나 신이 났는지.’

──그리고 나의 선택.

그런 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고맙습니다아!’

까만 원피스에 꽃무늬가 그려진 앙증맞은 양산을 들고 와 사인을 해 달라며 해사하게 웃던 소녀의 미소를 떠올려 보았다.

화르륵!

은하의 신체 실루엣을 따라 붉은 화염이 몰아치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만들어 냈던 구체 형태도, 뱀처럼 일렁이는 채찍 형태도 아니었다.

붉고 뜨거운 화염이 은하의 전신을 휩싸고 천정을 뚫을 기세로 솟아오르는 것을 본 데바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것이 대답인가. 이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군.”

그에 은하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백이준은 안 죽어.”

여유를 부린다거나 허세가 아니었다. 이준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으니까.

오히려 지금,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무거운 모래주머니 하나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일렁이는 붉은 불길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도 함께 휘날린다.

머리카락이 뺨을 쓸고 스쳐 지나가고, 그 자리에 황금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가 올곧게 드러났다.

“─여기서 죽는 건 네놈이다, 데바.”

* * *

한편 백색 성 외곽, 폐허가 된 제주도를 샅샅이 뒤지고 있던 안드레아는 우뚝 발을 멈추었다.

‘여기도 없어.’

까아악─

까마귀인지 조류형 몬스터인지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검은 구름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때는 숲이었던 곳, 지금은 그저 잔재만이 남은 검은 폐허. 당연하게도 이준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다.

함께 제주도로 넘어온 GIA 동료들도 지금쯤 섬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시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보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녀석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것을 보면 GIA 동료 중 그럴싸한 단서를 찾은 자는 없는 듯했다.

‘암암리에 얻어 낸 정보에 따르면 요한의 팔 한쪽은 이쯤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만약 여기서도 아무런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제 짚이는 곳은 단 한 군데, 백색 성 내부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이준이 정말로 백색 성 내부로 진입한 것이 맞다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0%일 테니까.

‘아직 모르는 일이야. 조금만 더 찾아보자.’

안드레아는 스멀스멀 피부를 기어오르는 불길함을 애써 떨쳐 내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까아악─

“……?”

조금 전 멀리서 들려왔던 새의 울음소리가 어느덧 매우 가까워진 기분이다. 안드레아는 무심코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아악, 까아악─

검은 새는 안드레아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쉴 새 없이 울어 댔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안드레아의 표정이 일순 달라졌다.

‘설마, 요한이……?’

안드레아가 무언가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검은 새는 그를 인도하듯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안드레아는 홀린 듯이 새를 따라갔다.

이윽고 그가 도달한 곳은 백색 성이 잘 보이는 어떤 고지대였다. 파손된 나무 울타리와 ‘야영 및 취사 금지’ 팻말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곳이 숲이었을 시절에는 전망대였던 장소인 듯했다.

공중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검은 새는 별안간 날갯짓을 멈추더니 바위 위에 살포시 앉았다. 그것을 확인한 안드레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요한!】”

요한, 요한, 한…….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린 채 메아리가 되어 아득히 멀어진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공기 중에 결국 흩어져 버렸다.

안드레아의 얼굴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저 검은 새는 이준이 남겨 둔 메시지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툭.

안드레아의 고개가 실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검고 작은 개미가 바위 틈새를 통해 스멀스멀 나타나더니 안드레아의 발밑으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움직이던 개미 떼는 어느 순간 마법에라도 걸린 듯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순간 안드레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이건…….】”

안드레아의 발밑에 모인 개미 떼는 까만 점이 되어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Chess piece in Zodiac.

─조디악 중에 체스 말이 있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 안드레아는 왔던 길을 급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뛰다가 넘어지고,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솟은 나뭇가지에 몸을 긁혀 가면서도 흩어진 GIA 동료를 찾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에게 알려야 해.’

개미가 만들어 낸 이상한 문장.

모르는 자가 본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안드레아는 아니었다.

체스 말.

그것은 이준이 매혹에 걸린 대상을 지칭하던, 일종의 은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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