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한낱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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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한낱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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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한낱 먼지
2023.05.05.
대한민국 제주도, 백색 성 근처.
[Lv.52 ‘물안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Lv.54 ‘타락한 백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Lv.60 ‘공허의 정찰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젠장, 끝이 없잖아!”
검은 제복을 입은 협회 요원은 지치지도 않고 나타나는 몬스터 웨이브에 질겁했다.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이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거냐고!”
“몰라서 하는 말이냐? 제주도 전체가 지금 던전화되고 있는 거야, 이 멍청아!”
“더, 던전화라고? 그, 그럼…….”
“그래, X 된 거지.”
“다른 헤드 헌터나 S급 헌터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던전화가 되고 있는 게 어디 제주도뿐인 줄 알아? 다들 자기 나라 일을 처리하느라 여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 거지.”
보도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탑 주변도 던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백색 성이 나타난 이곳 제주도지만.
“흐, 흑염의 프린세스는?”
역시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명은 헤드 헌터 1위인 그녀였다.
“이미 성 내부에 있지. 백랑도, 트릭스터도, 괴도도 마찬가지야.”
“젠장……. 바깥 상황이 이런데 도대체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방금 못 봤어? 백랑이 마갈궁인지 뭔지를 쓰러트렸다고 시스템창이 떴잖아. 안쪽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는 우리대로 여기서 최대한 던전화 진행을 막아야지.”
바다 건너 대륙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말이야. 요원은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치 밤이 된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저 빼곡한 검은 점들은 모두…….
‘징그럽게도 많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였다.
비록 시스템창을 통해 승전보가 전달되었다고는 해도 눈앞의 이 상황을 보고 있자면 그저 지옥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일행이 조디악을 해치우는 것보다 여기서 자신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쪽이 훨씬 더 빠를 거라고,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말이 좋아서 임무지, 그들이 성 내부를 공략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한 총알받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 난…… 돌아갈래! X발,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
동료 요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치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반쯤 단념한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던 요원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이봐! 안 돼, 돌아와! 그쪽으로 가면─.”
동료 요원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Lv.60 ‘공허의 정찰자’의 눈에 방대한 마력이 깃듭니다.]
[Lv.60 ‘공허의 정찰자’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 추적의 시선]
지이이잉!
대각선 방향에서 검붉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그를 덮쳤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요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숯덩이가 되어 털썩 쓰러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동료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남자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으, 으으…….”
살이 타는 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한다.
협회의 말단 요원만 되어도 7급 공무원 이상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진로였다.
안정적이고 사회적 평가까지 높은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협회에 몸을 담은 8년간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도, 동료의 순직을 목격한 적도 없었다.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말이다.
요원은 숯덩이가 된 동료의 시체 곁에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것이…… 재앙.”
[Lv.60 ‘공허의 정찰자’의 눈에 방대한 마력이 깃듭니다.]
[Lv.60 ‘공허의 정찰자’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 추적의 시선]
우우웅…….
몬스터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을 감지한 요원이 삐거덕삐거덕 시선을 돌리던 바로 그 순간, 휘릭! 하는 소리와 함께 웬 녹색 망토가 시야를 뒤덮는다.
[패시브 ▶ ‘약점 포착’ 활성화. 단숨에 적의 급소를 파악합니다. 공격 성공 시 치명타 확률이 극대화됩니다.]
키에에에엑!
짧은 나이프가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가 싶더니 곧 몬스터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후드득…….
몬스터의 보랏빛 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녹색 망토를 툴툴 털어 낸 남자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있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죽고 싶지 않다면.”
“구, 군단…….”
요원의 앞에 나타난 것은 군단의 부마스터 배준환이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또다시 휘리릭 사라졌다.
‘백색 성 쪽 결계는 아직인가?’
슈욱, 팟!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복부를 일격에 갈라 낸 준환이 백색 성 쪽을 확인하는데,
“이봐!”
펄럭─
윤이 나는 푸른 깃털이 하늘에서 사르륵 떨어졌다. 날개를 크게 펼친 채 하늘을 날던 무언가가 이내 탁, 하고 가볍게 착지했다.
옆으로 땋아 내린 연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망토를 두른 여자, 군단 길드의 ‘파랑새’ 함수현이었다.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파랑새’라는 이명을 증명하듯 그녀의 등에는 새의 날개가 돋아 있었고, 그 아래로 푸른 꽁지깃이 꼬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육체강화계열 중에서도 몸 일부를 짐승의 것처럼 바꿀 수 있는 ‘수인(獸人)’ 헌터였다.
날개를 잠시 접은 그녀는 눈빛을 진지하게 바꾸며 준환에게 말했다.
“성 입구의 낌새가 달라졌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백색 성 입구를 통과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게 정말이야? 아직 시스템창에는 다른 메시지가 뜨지 않았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확실해. 결계는 사라졌어. 얼른 가자.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니, 너는 이곳에 남아 있어.”
“뭐?”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던 수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나더러 여기 남아서 마스터가 생환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라는 거야?”
“그쪽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을 방치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바깥쪽은 인원이 부족해.”
“하지만 마스터가 안에 있는데……!”
“함수현, 주변을 봐라. 벌써 100명 이상이 죽었어. 마스터라면 그렇게 명령하셨을 거야.”
준환은 나이프에 묻은 피를 옷가지에 슥 닦아 내며 덧붙였다.
“이곳을, 사람들을 지키라고.”
“……그럼 네가 여기 남아. 마스터에게는 내가 가겠어.”
“고집부릴 때가 아니다, 함수현. 여기 모인 헌터들 중 비행이 가능한 자는 극소수야. 넌 누구보다 빠르게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나보다는 네가 이곳에 남는 게 나아.”
“하지만……!”
수현이 무어라 반론하려던 그때,
“그렇게 마스터가 걱정된다면 이런 곳에서 다투지 말고 그냥 둘 다 가시는 게 어떻겠소?”
“……!”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준환과 수현은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잡았다.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동안 두 사람 중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얼굴이든 이명이든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준환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은둔 헌터라는 건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준환은 그가 입고 있는 복장에 주목했다. 깊숙이 눌러쓴 삿갓. 검은 두루마기. 그렇다면 설마…….
“산군……?”
준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어딘가에서 휙, 휙, 휙! 하고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하나, 둘, 셋…… 총 열 한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복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산군이 이곳에?”
수현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챈 것인지 당황스러운 눈빛이었다.
“수령님의 명을 받고 왔소. 지금부터 산군은 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제주도의 던전화를 막을 거요.”
“은인?”
남자는 수현의 반문에 답하지 않고 휙 등을 돌렸다. 그가 손짓하자 주변에 몰려 있던 산군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백색 성에 들어가서 흑염의 프린세스를 만나게 되면 전해 주시오.”
검은 두루마기의 남자는 삿갓을 조금 더 깊이 눌러쓰며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 산군이 이곳에 있는 몬스터를 섬멸해 두겠다고.”
* * *
한편 그 시각, 중앙 탑 어딘가.
“……게 했지?”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를 흘린 은하는 부러질 듯 세게 양산을 쥐었다.
차가운 분노가 서린 그녀의 시선 끝에는, 새하얀 로브를 쓴 조디악의 수장. 금우궁(金牛宮) 데바가 서 있었다.
데바는 대답 대신 로브 그늘에 반쯤 가려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가죽 장갑을 쥐고 있던 은하의 왼쪽 손등에 푸른 혈관이 불끈 도드라졌다.
“대답해. 백이준을 어떻게 했냐고 묻고 있잖아.”
“흠?”
은하의 물음에 데바는 고개를 대각선으로 느릿하게 기울였다. 짤랑, 그의 어깨에 달린 늘어지는 황금 장식이 서로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린다.
“그것이 무엇인가.”
“네가 이곳에서 죽인 헌터 말이다.”
“글쎄, 잘 모르겠군.”
불어오던 바람이 멎으며 데바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부드럽게 땅을 밟은 그가 오만하면서도 고아한 움직임으로 턱을 들어 은하를 내려다보았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면 기억할 필요가 없는 먼지 같은 존재, 그뿐이었겠지.”
‘먼지?’
으득…….
어금니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은하의 홍채에 감돌던 황금 빛이 진해졌다.
화아악!
은하의 양어깨 위로 검은 불꽃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은하의 흑염이 데바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순간, 데바의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검은 불꽃. ‘가호’로구나.”
스륵─
데바가 손을 뻗어 흑염을 손에 쥐었다. 그것을 목격한 은하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흑염을 맨손으로 잡았다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흑염을 거머쥔 데바가 천천히 주먹을 말자 그것이 호롱불처럼 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기쁘구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발을 덮을 정도로 긴 로브를 끌며 데바가 은하에게로 저벅 다가왔다.
“네게는 자격이 있다, 아이야.”
데바가 은하를 향해 손을 뻗기 직전, 그의 곁에 에메랄드 빛깔을 띤 빛무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공격인가?’
잠시 충격에 헤매고 있던 은하는 그 빛 덕분에 번쩍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팟!
은하는 데바로부터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에메랄드 빛은 은하에게 달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얽히고설키더니 곧 인간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스스스…….
“데, 바시여.”
그곳에 나타난 것은 구불구불한 물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한 여인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는 푸른빛이 감돌았고, 양팔을 뒤덮은 물고기 비늘이 눈에 띈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기묘하고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아름다운 외견. 무엇보다 그녀 주변을 감도는 특유의 체취가 말해 주고 있었다.
‘조디악.’
외견에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쌍어궁 셰이핌일 가능성이 높다.
‘아연이가 실패한 건가? 아니, 결계는 분명 사라졌어.’
그렇다면 결계를 부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조디악을 직접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셰이핌의 상태가 이상했다. 호흡이 가쁘고, 갈비뼈 부근의 칼집처럼 보이는 아가미에서는 녹색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
은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셰이핌이 독에 중독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아연의 짓이 분명했다.
“저자는…….”
죽은 생선같이 생기가 감돌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스르륵 은하를 향했다.
빤히 은하를 살피던 셰이핌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은하의 양산에 닿았다. 이윽고 어떠한 결론을 내린 듯, 그녀는 데바를 감싸듯이 바로 섰다.
“데바시여, 저자는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비록 결계는 지키지 못했으나, 부디 이 셰이핌에게 만회할 기회를.”
차박, 차박…….
셰이핌이 물에 젖은 발을 움직여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릿한 물비린내가 점차 진해진다.
루시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쌍어궁 셰이핌은 다른 조디악들에 비해 전투력이 독보적으로 낮다고 했다. 게다가 현재 셰이핌은 높은 확률로 상태 이상 ‘중독’에 걸려 있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조디악은 조디악. 게다가 뒤에는 데바까지 있다. 즉…….
‘상황이 좋지 않아.’
양산을 쥐고 있는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에단이나 다른 지원군들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싸워야 해.’
결심을 다진 은하는 이준의 검은 가죽 장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양산을 바로 쥐었다. 그런데,
우뚝─
셰이핌 뒤편에서 찬란한 황금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은하를 향해 걸어오던 그녀가 돌연 멈춰 섰다.
“……!!”
경악에 물든 셰이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셰이핌의 확장된 동공이 더듬더듬 제 팔을 향한다. 손가락 끝부터 바스스 흩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째, 서…… 데바…….”
무슨 상황인지 바르게 인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가루가 되어 눈앞에서 깔끔히 사라졌다.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12궁, 쌍어궁(雙魚宮)이 봉쇄됩니다.]
남은 흔적이라고는 바닥 위에 남은 흥건한 물 자국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