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 마갈궁(摩竭宮) 벤달기프 (277/306)


#277. 마갈궁(摩竭宮) 벤달기프
2023.05.04.


슈욱! 슉! 슉!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에서 무수한 고드름이 생성되었다. 벤달기프의 낫이 시우에게 닿기도 전에, 그것들이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아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벤달기프의 몸이 고드름에 의해 벌집처럼 뚫렸다.

이곳은 시우의 마력으로 만들어 낸 공간. 벤달기프의 ‘기사의 성역’과 원리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이 공간에서 시우는 철저한 ‘갑’의 위치였다.

시우가 놈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을 신호로 사방의 얼음에서 또다시 고드름이 생성되었고,

슈욱! 슉! 슉!

그것들은 또 한 번 벤달기프의 몸에 매몰차게 박혔다.

이걸로 놈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시우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

벤달기프가 어느 순간부터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놈의 몸에 박힌 고드름에서 새하얀 한기가 피어오르더니 그의 몸 전체에 얼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벤달기프의 몸은 동상을 입은 듯 꽁꽁 얼어 버렸다.

“크……!”

그런데 분한 듯한 얼굴을 한 벤달기프가 빠득 이를 갈더니,

채애앵─!!

온몸에 힘을 주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을 부숴 버렸다.

‘말도 안 돼.’

이곳은 시우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통상적으로 생성한 얼음보다 이곳에서는 훨씬 더 차갑고 단단한 얼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 얼음에 온몸을 구속당한 녀석이 오롯이 제힘으로 그것에서 벗어난다고?

“……하.”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녀석이다. 놀라 벌어진 입으로 시우가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래도 온 마력과 목숨을 걸고 놈을 이곳에 가둔 건 정답이었던 듯하다.

“크륵……!”

고드름에 공격당하여 크게 휘청거리던 벤달기프는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발견한 놈은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가 또다시 그들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상처 치유, 그리고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시우 역시 그것을 잠자코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남은 마력이 얼마 없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사실 만년설옥을 사용했을 때부터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한계에 도달한 시우였다.

‘놈이 다시 회복하기 전에 어서 빨리 끝장을 내야 한다.’

가능하잖아, 신시우.

시우는 벤달기프를 향해 다시금 스르륵 손을 뻗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과연 조디악이다. 그 작은 움직임을 알아챈 벤달기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회피할 생각인가? 그렇게 예상했는데.

“…….”

우뚝.

놈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벤달기프의 노란 눈은 정면 쪽의 시우가 아닌, 시우 너머의 얼음벽에 향해 있었다.

툭─

벤달기프의 손아귀에서 머리를 잃은 기사가 힘없이 떨어졌다.

‘빈틈……!’

푸슈욱!

벤달기프를 향해 고드름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놈은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푸욱!

고드름에 상체가 관통된 놈은 그 상태 그대로 시우를 향해 다가왔다. 회피할 만큼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느리다.

이윽고 시우 가까이 도달한 벤달기프는 날카롭게 눈매를 세우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그를 스르륵 지나쳐 갔다.

“……?”

시우는 조금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우를 지나쳐 간 벤달기프가 비로소 멈춘 곳은, 제 모습을 비추고 있는 얼음벽 앞이었다.

투욱…….

발굽이 붙어 있는 놈의 손이 얼음벽에 닿았다. 입가에 난 긴 수염에서 방금 전 먹어 치웠던 기사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으로 꺾인 관절, 가로로 긴 염소의 동공, 검붉게 물든 흰자위. 새하얀 얼음벽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아…….”

그곳에 비친 것은 실력 있는 검사도, 모두의 존경을 받던 단장도, 긍지 높은 왕국의 기사도 아니었다.

──괴물.

그저 괴물이었다.

“나, 는…….”

검붉게 물들어 있던 놈의 흰자위가 차츰 희게 돌아온다. 벤달기프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머리가 뜯겨 나간 기사.

한쪽 팔이 잘린 기사.

다리가 없는 기사.

모조리 자신이 씹어 삼킨 것들이었다.

‘단장님, 한 수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훈련이십니까? 따르겠습니다!’

‘역시 단장님이십니다.’

“…….”

벤달기프는 굳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대로야.’

이 만년설옥은 두꺼운 얼음으로 사방이 메꾸어진 공간. 하얀 얼음에 돔 형태로 감싸인 이곳의 풍경은 마치 거울의 방과도 같았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얼음 위로 시우와 벤달기프의 모습이 수도 없이 비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한 놈은 시우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스스로를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벤달기프는 현재의 제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것일 테다.

그것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우가 만년설옥을 쓰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였다.

시우는 주변에 떨어져 있던 검 한 자루를 조용히 쥐었다. 벤달기프가 소환한 기사가 쥐고 있던 검이었다.

슈우우…….

시우의 손이 닿자마자 한기에 휩싸인 칼날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었다. 시우는 그것을 쥔 채 놈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시우가 접근하고 있는 것을 분명 눈치챘을 텐데도 벤달기프는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미동도 없었다.

물론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 넋을 놓은 척하며 자신을 유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놈이 방심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건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어차피 이미 목숨은 걸어 두었다.

벤달기프의 곁에 멈춰 선 시우는 검을 높게 들었다.

‘마력 출력량을 최대치로.’

검을 내려치기 직전, 놈이 시우를 향해 소리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허공에서 두 눈이 고요하게 마주치는 순간,

‘실패인가?’

아니, 그래도 휘두른다……!

서걱!

살이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

목을 내려친 것이 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시우는 놀란 얼굴로 검과 놈의 목을 번갈아 응시했다.

검을 휘두르는 찰나, 벤달기프는 분명 시우를 보았다. 놈의 신체 조건이라면 분명 가뿐히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벤달기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목을 내주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놈의 몸이 시우의 신발 코 앞에서 멈추었다.

시우는 푸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

놈을 해치웠다는 자각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놈은 저항하지 않았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시우의 기분은 마치…… 아무런 힘도 없고 저항도 하지 않는 노인을 벤 기분이었다.

“……그대.”

벤달기프의 목소리에 시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에서 목이 분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붙어 있었다. 아직 핵이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만 남은 채 샛노란 눈을 뜨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기괴하리만치 섬뜩했다.

‘그래, 역시 놈은 적이다.’

스릉─

시우는 검을 쥔 손에 도로 힘을 주었다. 놈이 저항하지 않은 이유 따위 중요하지 않다. 다음은 핵을 부술 차례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온 마력을 소진하며 만년설옥을 사용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여기서 끝을 내야만 한다고……!

목이 떨어진 지금도, 놈은 기사를 먹지 않고 무기력한 얼굴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시우는 놈의 몸통으로 다가가 가슴에 검을 겨누었다.

‘망설이지 마라, 신시우.’

놈은 적이다. 저와 싸우며 마력을 소모한 탓인지 그 정체불명의 페로몬 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눈앞에 머리만 남은 저자는 그냥 머리가 어떻게 된 조디악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어금니를 꾹 깨문 시우는 제게 남은 마력 한 방울마저 남기지 않고 쥐어 짜냈다.

“마지막, 질문이오…….”

파지직…….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하는 검날을 응시하던 벤달기프가 목만 남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시오?”

벤달기프는 답을 갈구하듯 눈동자만 움직여 시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핵에 겨누어진 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조디악으로 보이오, 짐승으로 보이오? 그게 아니라면…… 괴물 같소?”

벤달기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우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시우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는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단 한 순간이었지만, 어째서 끔찍한 그의 모습에서 ‘인간’을 비추어 보았는지.

슈우우…….

시우가 쥐고 있는 검이 서서히 푸른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그저…….”

주변 온도가 삽시간에 떨어지며 그곳에만 겨울이 찾아온 듯 작은 눈송이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내린다.

“후회에 젖은 자로 보이는군.”

톡…….

공기 중을 떠돌던 눈송이가 벤달기프의 뺨에 닿았다. 그것은 놈의 피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작은 물방울이 되어 또르르 떨어졌다.

“후, 회…….”

놈은 다시 눈을 굴려 얼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무기질적인 놈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기사들이 담기는 순간,

푸욱─!!

시우는 벤달기프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그 순간까지도 벤달기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 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벤달기프의 몸과 목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마모되어 가기 시작한다.

벤달기프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서서히 눈을 감았다.

“왕, 국이여…….”

죽음의 문턱에 선 벤달기프는 녹지 않는 영원의 얼음에서 그의 왕국을 보았다.

아아…….

나의, 왕국이여…….

그는 내 낭만에 젖어 어리석은 선택을 계속해 온 고집쟁이였던 걸까. 아니면 나라와 주군을 아꼈으나 너무 우직한 나머지 배신당한 충신이었던 걸까.

‘그저, 어느 방향으로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주변을 떠도는 새하얀 눈송이와 섞여 구슬프게도 흩어지며, 벤달기프의 한탄 역시 흩날려 간다.

“…….”

시우는 초점이 흐릿한 푸른 눈을 들었다. 그의 어깨 위로 사르륵, 눈꽃이 내려앉는다.

끝인가.

정말로……?

챙! 챙그르르…….

손에서 검을 놓친 시우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팔로 상체를 지탱하여 안간힘을 다해 버텨 보았지만, 기우뚱대던 상체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읏, 하아…….”

시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눈꺼풀이 무겁고 호흡이 뜨겁다.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띠링, 띠링, 띠링…….

눈앞에 신수의 메시지창이 겹쳐서 뜨는 것 같지만 시야가 뿌옇게 번져 확인할 수 없었다.

시우와 벤달기프를 감싸고 있던 얼음 감옥이 차츰 녹기 시작했다.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천장이 사라지고, 그곳에 검게 물든 하늘이 다시금 나타났다.

시우는 이끌리듯 시선을 들었다.

파직, 파지직…….

검은 하늘에 빗금 같은 균열이 일고 있다. 눈보라가 잦아들며 ‘밖’에서 불어온 따듯하고도 신선한 공기가 다가와 뺨을 스친다.

괴도가 결계를 부수는 것에 성공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곧 에단이나 늑대 길드원 등 바깥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다.

게다가 시우는 벤달기프에게서 이준의 흔적을 미약하게나마 감지했다. 사실 확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선배에게 전해야 하는데. 어서 일어나서,

‘움직, 여야…….’

풀썩.

기어이 시야가 무너져 내린다.

휘오오오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검은 가루와 뒤섞인 잿빛 눈보라가 멎어 간다. 검은 하늘에 뜬 별이 긴 꼬리를 그리며 저물었다.

[별의 추락. 《백랑》에 의해 네뷸러 제10궁, 마갈궁(摩竭宮)이 봉쇄됩니다.]

* * *

파바밧!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패시브 ▶ ‘밤을 읽는 자’ 활성화. 밤눈이 밝아집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전투 시 명중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칠흑 속에서 황금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은하였다.

조금 전, 제10궁 마갈궁이 봉쇄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팝업되었다.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신시우가 그 반인반수랑 싸워서 이긴 거야.’

이제 남은 것은 민주가 맡은 사자궁과 아연이 맡기로 한 쌍어궁. 그중에서도 결계를 풀기 위해서는 아연의 임무 완수가 급선무였다.

그런데 두 사람 쪽에서는 어떤 승전보도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쌍어궁 셰이핌의 결계가 해제된 것을 감지합니다.]

어쩐 일인지 루시가 메시지창을 통해 그리 알려 왔다. 공식적으로 시스템창이 뜨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연이 쌍어궁을 상대로 승리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결계를 해제하는 일만큼은 성공한 듯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곧 에단을 포함한 지원군이 올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보다 먼저 중앙 탑에 진입한 은하가 아직까지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서둘러야겠어.’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복도. 대리석 위에 닿는 구두 소리가 탓, 탓, 탓,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사실 지금 그녀는 데바를 찾는 것과 동시에 또 한 가지 찾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백이준.’

은하의 왼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중앙 탑에 들어오고 얼마 있지 않아 발견한 그것은 분명 이준의 물건이었다.

그것을 주워 든 순간 은하는 작은 희망을 안았다. 어쩌면 이준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연이가 사탕을 이용했던 것처럼, 백이준도 이 가죽 장갑을 일부러 떨어트려 두었을지도 몰라.’

어떤 장치를 해 둔 것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는 펜던트를 포함한 아이템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추적 스킬에 의존하는 것도 불가했기에 은하는 계속하여 발을 움직이며 직접 탑 내부를 수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발에 속력을 더하여 복도를 누비던 와중,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어둠 속에서 드디어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이건…….’

멈칫.

걸음을 멈춘 은하가 시선을 들었다.

그 빛의 주체는 태양도, 달도, 횃불도 아니었다. 표면에 별을 뿌려 둔 듯 은은한 빛을 뿜고 있는 계단이었다.

둥근 회오리 형태의 그 계단은 하늘에 닿을 듯한 기세로 높게 치솟아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계단이지?’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저곳은 ‘별의 나들목’. 모든 별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별의 나들목’? 윤회의 공간?

계단을 응시하는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혔다. 루시가 하는 말이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의 나들목’이란 태초의 별이 태어난 시작의 장소. 새롭게 태어난 별에게 데바가 직접 가호를 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며 복잡한 눈으로 계단을 응시합니다.]

[저곳에 데바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직접 계단을 오르는 일은 관두라며 경고합니다.]

관두라고?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 있을 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은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한 손에 양산을 쥐고, 그저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늘 그랬듯이.

또각─

묵직한 정적 위로 청아한 구두 소리가 짧게 한 번 울리는 순간.

[언니.]

그녀를 붙잡기라도 하듯 노란 메시지창이 덜컥 시야를 덮었다. 그리고.

휘오오……!

어디서 불어오는 것인지 모를 바람이 경고하듯 불어닥쳤다.

“읏.”

은하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강한 바람에 몸이 밀려났다. 은하가 양팔을 들어 얼굴을 지키듯 감싸는 순간,

츠츠츳!

계단을 감싸고 있던 빛이 눈이 멀 정도로 강해진다.

‘무슨 일이…….’

팔을 아래로 내린 은하가 슬쩍 눈매를 찌푸리며 계단 쪽을 응시했다.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이어지던 회전 계단이 태엽을 감은 듯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 퍼진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야.”

“……!”

펄럭─

옷가지가 나부끼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끌리듯 시선을 들어 올린 그곳에, 한 남자가 유유히 공중을 부양하고 있다.

‘저자는.’

깊게 눌러쓴 로브 위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얼핏 보아서는 마법진 같기도 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작게 축소한 듯한 천체(天體)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은하의 드레스가 그러하듯 남자의 로브 또한 바람에 펄럭이며 로브에 가려져 있던 그의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별을 품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신비한 홍채에 아로새긴 듯한 별자리 문양. 그것을 발견한 순간 은하의 동공이 고양이의 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데바.”

차가운 분노를 담은 목소리와 함께 은하의 두 눈에 깃든 형형한 황금빛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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