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왕을 위하여
(274/306)
274. 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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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왕을 위하여
2023.05.01.
또각─
공허할 만큼 적막한 복도 위로 청아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은하가 걸음을 뗄 때마다 벽에 걸린 횃불이 줄줄이 화르르 타올랐다. 인체를 감지하는 센서라도 달린 것인지, 그런 주문이 걸려 있는 것인지, 이 공간 자체가 그녀를 환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디악은커녕 작은 벌레 한 마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 은하는 데바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곳은 중앙 탑이었다.
민주의 도움으로 사자궁이 지키고 있던 또 하나의 기둥이 부서졌고, 시우와 은하는 그곳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을 통해 이동했다.
동시에 마법진을 밟았던 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은하가 ‘이쪽’으로 이동했을 때, 시우는 곁에 없었다.
같은 마법진을 밟았으나 서로 다른 쪽으로 소환되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이동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시간 차가 생겨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은하는 그 모든 가능성을 우선 뒤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새로운 별이여.’
붉은 피부에 하체는 염소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의 조디악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마갈궁 벤달기프라고 소개한 그 녀석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은하에게 중앙 탑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 주었다.
‘어째서지?’
은하가 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어째서 날 공격하지도 않고 길을 알려 주는 거지?’
‘당연한 일이오. 그대는 그분의 부름을 받은 자.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내가 귀빈을 막을 이유 따위 없소.’
벤달기프는 정말 은하를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듯, 주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티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유유자적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은하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않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얼 하고 있소?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가 보시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마갈궁 벤달기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이것이 함정일 가능성은 없을 거라 예상합니다.]
[또한, 벤달기프와의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피하라고? 왜?’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태초의 별인 에단이 퇴출당한 이후, 벤달기프는 데바를 잇는 이인자로 오랫동안 군림했다고 말합니다.]
[마갈궁 벤달기프야말로 데바가 가장 아끼는 별. 태초의 별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확실히 은하가 판단하기에도 눈앞의 조디악은, 벤달기프는 다른 조디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만일 뒤늦게 ‘이쪽’으로 이동한 시우나 다른 헌터들이 이 녀석과 조우하게 된다면? 은하는 찻잔을 휘젓는 벤달기프의 옆얼굴을 보며 양산을 슬그머니 쥐었다.
‘여기서 죽일까?’
은하는 잠시 그런 고민을 했다.
그녀의 목적은 데바를 만나고 그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벤달기프를 쓰러트리는 일이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에서 체력과 마력을 과하게 소모해 버린다면 정작 데바와의 전투를 기약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정말로 이 정도의 강적을 그냥 두고 가도 되는 것일까. 고민에 빠진 은하는 놈에게 당장 공격을 가하지도, 그렇다고 그곳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무얼 그렇게 고민하고 있소. 그 아이라면 분명 나와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을 텐데. 틀렸소?’
문득 벤달기프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 아이?’
‘쌍아궁 루시 말이오.’
‘……!’
‘그리 놀랄 것 없소. 그대가 입고 있는 드레스 그리고 그 양산, 게다가 대놓고 쏟아부어 둔 그 가호로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은하는 긴장한 얼굴로 벤달기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놈의 말대로 은하의 복장이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쌍아궁의 흔적을 찾을 수야 있을 것이다.
다만 루시는 현재 데바를 포함한 다른 조디악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시스템에 동화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벤달기프는 마치 은하가 지금 루시와 함께 있다는 것을, 더군다나 조언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은하가 서 있는 곳이 벤달기프가 지정한 ‘기사의 성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벤달기프는 ‘기사의 성역’에 들어온 상대에 한해 그의 총 마력량이나 각종 능력치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계약자의 경우 그를 비호하는 존재의 종류까지도.
12신수에 포함되지 않는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쌍아궁 루시라는 것은, 은하가 입고 있는 복장이나 가호로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겁이 많긴 했지만 착한 아이였소.’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벤달기프의 권능에 대해 모르는 은하가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그분께서 친히 초대한 새로운 별을 공격할 생각도, 한때는 가족이었던 그 아이를 해할 생각도 없소. 불필요한 살생은 즐기지 않는 편이라.’
그러니 가시오. 벤달기프가 그리 말하는 순간, 은하의 몸이 저절로 움직여 탑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은 다시 지금에 이르러, 은하는 이곳 중앙 탑에서 데바를 찾고 있었다. 데바가 은하를 기다리고 있다던 벤달기프의 말과는 달리, 정작 데바의 모습은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함정이었나?’
사실은 데바가 여기에 없다든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벤달기프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을까. 불쑥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복도, 아니 중앙 탑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듯 크게 진동했다. 석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 챙그랑, 떨어지며 긴 복도를 따라 불길이 화르르 일어났다.
몸을 가누기 위해 한 걸음 발을 뗀 찰나, 은하의 전신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바닥이……?!’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걸어 다닌 복도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공중에서 휘리릭 돌아 순식간에 착지자세를 잡은 은하는 아래층인지 지하인지 모를 그곳에 탁, 하고 내려앉았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언니, 괜찮은 거냐며 호들갑을 떱니다.]
[어? 멀쩡하네.]
[당신의 쿨한 착지자세를 보고는 아낌없이 핑크 젤리를 짝짝 부딪칩니다.]
띠링띠링띠링…….
연속해서 떠오르는 노란 메시지창을 뒤로한 은하는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팔을 뻗어 그것을 주워 든 은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건…….”
검은 가죽 장갑이었다.
* * *
한편 시우는 벤달기프와 한창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과연 내 권능을 해제한 인간답소.”
벤달기프는 맞은편에 선 시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칭찬은 고마운데…….”
손등을 들어 턱 끝에 맺힌 땀을 슥 닦아 낸 시우가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준비 운동이 꽤 길지 않나?”
시우가 놈의 권능 ‘기사의 성역’을 강제 해제한 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지도 벌써 5분 이상이 흘렀다.
강자와 강자의 싸움에서 5분이란 죽음의 고비가 최소 10번 이상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클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재 벤달기프와 시우는 서로에게 그 어떤 작은 부상조차 입히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시우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놈이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슬슬 힘을 개방하는 것이 어떠냐며 권유합니다.]
‘아니, 아직이야.’
전력을 쏟지 않고 있는 것은 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지금 이 전투는 아직 서로의 간만 보고 있는 탐색 단계.
‘먼저 섣불리 능력을 있는 대로 보여 줬다가는 약점을 잡힐 확률이 크다.’
특히나 지금처럼 실력 차가 예상되는 적을 상대로는 더더욱 위험한 행동이었다. 비장의 수가 있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틈을 노리다 적재적소에 꺼내 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의 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나를 상대로는 진심을 다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과는 달리 시우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걸린 채였다.
“지금 이 정도가 너의 충성인가?”
그러자 벤달기프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역시 시우의 예상대로, 놈을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할 만한 역린은 ‘충성’이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전하.”
돌연 벤달기프가 목소리를 떨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저는 왕국과 당신을 지키는 기사이지 않습니까.”
“무슨─.”
제자리에 멈춰 선 벤달기프는 시우를 향해 겨누고 있던 지팡이…… 아니, 칼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푹!
그것을 단숨에 땅에 꽂았다.
땅이 쩌적쩌적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기 시작한다. 지면에 번진 빗금 사이로 그림자가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li%□$#iil■□.”
시우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우우우웅…….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대기가 공명하듯이 낮게 진동한다.
병마용(兵馬俑). ‘대군세’라고도 불리는 벤달기프의 능력이었다.
땅의 틈새로 피어오른 그림자들이 곧 철 갑옷을 입은 중세 기사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환각? 아니, 소환술인가?’
가볍게 튀어 올라 적들과 거기를 벌린 시우는 날카롭게 눈매를 세워 현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시야를 뒤덮은 검은 어둠 탓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끝까지 보지 못했다.
‘시야를 차단하려는 건가.’
어둠 속에서 급습을 받는다면 치명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 판단한 순간, 시우의 푸른 눈이 번쩍! 빛났다.
[패시브 ▶ ‘감지하는 자’ 활성화.]
[육감이 예리하게 발달합니다. 지속 시간 동안 적의 움직임을 한발 빨리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감지하는 자’는 개의 화신인 시우가 가지고 있는, 온오프가 가능한 패시브 스킬이었다. 지속 시간은 5초밖에 되지 않는 주제에 마력 소모는 상당해서 평소에는 즐겨 사용하지 않았지만 시야를 차단당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감지하는 자’를 발동한 시우는 곧 자신이 엄청난 수의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인지 가능한 영역 안에서 적의 수를 가늠해 보았을 때 적어도 수십…… 아니, 백을 넘는다.
‘감지하는 자’가 지속되는 5초 안에 이 많은 적을 모두 쓰러트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려면 절반 이상의 마력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 한들 정작 벤달기프가 남아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적을 쓰러트리는 일에 구애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판단을 마친 시우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땅에 가져갔다.
채애애앵!!
시우를 중심으로 눈 깜짝할 사이 거대한 얼음 꽃이 피어났다. 꽃의 뿌리는 땅 위로 넓게 퍼졌으며 날카로운 가시 형태를 한 꽃잎은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적들을 일격에 꿰뚫었다.
설화만개(雪花滿開).
그것은 오래전 시우의 아버지 귀훈이 데리고 왔던 싱가폴 출신 A+급 헌터 ‘커맨더(Commander)’와 전투할 때 익힌 스킬이었다. 당시 시우는 이 스킬을 사용하여 커맨더가 소환한 인간 형태의 갑옷 병사들을 모조리 얼린 전적이 있었다.
슈우욱…….
시우의 주변을 뒤덮고 있던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시우는 땅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거두며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를 둘러싼 벤달기프의 기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꽁꽁 얼어 있었다.
그 살얼음판 중심에서 꼿꼿이 선 시우는 한기가 감도는 푸른 시선을 고요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곁에 있는 얼음 동상, 아니 벤달기프의 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콰직!
시우는 보란 듯이 그것을 움켜쥐어 얼음째로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기사는 마치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고 이내 바닥으로 반짝반짝 떨어져 내렸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벤달기프는 말이 없었다. 예상치도 못한 시우의 반격에 깜짝 놀란 걸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벤달기프는 확장된 동공으로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어디선가 이것과 비슷한 광경을 보았다.’
그래…… ‘어디선가’ 말이다.
찌릿.
돌연 송곳으로 뇌를 찌르는 듯한 날카롭고도 예리한 두통이 찾아왔다.
작게 미간을 좁힌 벤달기프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머릿속에 진한 안개가 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데바시여, 어째서입니까.’
언젠가 데바와 나누었던 대화였나? 아니, 꿈인가. 모르겠다.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물이 가득 담긴 어항에 작은 실금이 번지기 시작하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어 나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까. 어째서 불필요한 살생을 저지르시는 겁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데바시여.’
‘아이야, 불필요한 살생 같은 것은 없다. 파괴 없이는 창조가 없고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으니.’
흐리터분하고 모호한 기억의 조각 속에서 데바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망설일 필요도 없고 괴로울 필요도 없다. 그저 너는 따르면 된다. 늘 그랬듯이, 너의 왕을.’
데바의 커다란 손바닥이 벤달기프의 시야를 가렸다.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듯. 편히 눈을 감고 있으라는 듯.
‘모든 것은 낙원을 위해서.’
두통이 점차 격해지며 벤달기프의 호흡 또한 가빠지기 시작했다.
휘익!
놈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시우가 그에게 얼음 창을 쏘았다.
벤달기프는 번쩍 고개를 들어 그것을 회피했지만 한발 늦었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탓에 왼쪽 팔뚝에 상처가 났다.
“…….”
그것에 다소 정신이 돌아온 듯, 벤달기프는 이마와 눈가를 감싸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왼쪽 팔뚝을 감쌌다. 오랜 기억의 바다를 헤매고 있던 그의 눈이 다시금 ‘현재’로 향했다.
자신이 소환한 철 갑옷의 기사들은 얼음에 갇혀 얼고, 깨지고, 망가져 있었다.
벤달기프는 그 모습에서 또 한 번 과거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과거였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던 용맹무쌍한 군대. 그러나 그 검이 적에게 닿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왕국의 기사─.
“으윽.”
벤달기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와아아아아…….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는 벤달기프를 보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시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인지 벤달기프의 안색이 처음과는 사뭇 달라진 듯했다.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비틀거리다가도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렸다가, 다시금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시선을 들었다.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아니, 시우는 그런 스킬 따위 없었고 지금 이곳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휙, 휘익! 휘익!
놈의 빈틈을 노린 시우가 또다시 얼음을 생성하여 쏘아 댔다. 벤달기프는 이번에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푹, 푹, 푹!
시우가 쏜 얼음 창이 사정없이 그의 어깨에, 복부에, 손바닥에 꽂혔다.
저벅─
몸 곳곳에 얼음 창을 꽂은 채로 벤달기프가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공격인가? 그에 대비하기 위해 시우가 상체를 살짝 낮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낙원, 을…… 위하여.”
우우우우…….
흐느끼는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이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벤달기프가 서 있는 곳으로 주변의 대기가 점차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뭐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시우를 관통했다. 잠깐 정신을 놓는 순간 그대로 압도당해 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마력이 그에게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민주가 상대하고 있는 사자궁은 믿기지 않을 수준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괴물이었다. 이전에 상대해 보았던 천갈궁 예가임 또한 중상을 면치 못할 정도로 엄청난 상대였다.
하지만 눈앞의 마갈궁은 그중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수준부터가 달랐다.
“…….”
늑대의 차기 주인으로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악랄할 정도의 훈련을 받아 왔고, 목숨을 건 전투를 수도 없이 반복해 온 시우조차 덜컥 굳어 버릴 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은 마치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곧 실이 끊어져 버릴 듯한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던 벤달기프가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콰지직!
벤달기프가 팔을 뻗어 주변에 얼어 있던 자신의 기사를 깨부쉈다. 얼음째로 조각난 기사를 주워 든 녀석은…….
“왕, 을…… 위하여…….”
그대로 그것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