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사자궁(獅子宮) 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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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사자궁(獅子宮) 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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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사자궁(獅子宮) 얀
2023.04.27.
“그러니까…… 저들은 저 사자의 공격을 받고 저렇게 됐다는 건가?”
아연과 민주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시우가 확인차 물었다.
“어, 그냥 한 방에 보내 버리던데? 송민주, 너도 봤지?”
그들이 전해 온 이야기는 이랬다.
발키리와 뮤턴트는 그들보다 한발 먼저 백색 성에 진입해 있었다.
시우와 은하가 보았듯 중앙 탑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네 사람은, 어딘가 이동 장치나 숨겨진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둘씩 팀을 나누어 주변을 조사했다. 후에 이곳으로 올 은하를 위해 사탕을 떨어트려 둔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민주와 아연은 이곳에서 팔자 좋게 잠든 사자를 발견했다.
‘오히려 다행이야. 함부로 건드려서 깨우지 말고 우선 헤드 헌터들과 다시 합류해 보자.’
네 사람은 사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조사 결과, 주변에는 이 사자 말고는 눈에 띄는 적도 장치도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답은 정해졌네. 저놈을 해치우면 되는 거잖아.’
뮤턴트가 겁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섣부르게 행동하기에는 일러. 조금 더 조사를 이어 가 보자.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잖아.’
민주는 그런 뮤턴트를 말렸으나 애초에 정식으로 조합된 팀도 아니었던 그들이 의견을 투합하는 것은 무리였다.
‘발키리라고 했던가? 당신이 좀 나서서 저자를 말려 봐.’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키리조차 뮤턴트에게 동감하고 나섰던 것이다.
‘아뇨, 오히려 적이 잠들어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자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 알고 무턱대고 덤비겠다는 건데?’
‘무턱대고 덤빈다니요. 뮤턴트는 몰라도 난 헤드 헌터이기 전에 프라임 헌터예요. 그리고 동물을 길들이는 건 내 특기이기도 하죠.’
발키리가 손에 검지와 엄지를 가져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펄럭펄럭 날갯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눈앞에 새하얀 말이 나타났다.
순백의 털, 거대한 날개, 황금색 뿔. 유니콘이었다. “옳지.” 하며 녀석의 얼굴을 익숙한 듯 부드럽게 쓸어내린 발키리는 가볍게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여기서 망설이고 있으려고 한국까지 온 게 아닙니다. 겁이 나는 거라면 당신들은 저 바위 뒤에라도 숨어 있으세요. 금방 끝낼 테니까.’
그리고 발키리와 뮤턴트는 잠든 사자 곁에 다가갔고…….
“이 꼴이 됐지.”
어깨를 으쓱한 아연이 정신을 잃은 발키리와 뮤턴트를 향해 턱짓했다.
“사자가 앞발을 휘두르는 순간 허리를 비틀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가 박살 났을걸. 이렇게.”
아연은 두 손을 쫙 펼쳐 펑! 하고 수박 터지는 소리를 흉내 냈다.
민주의 고유 스킬 중에는 머릿속에 상상한 물건을 실체화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회복 포션과 몸을 눕힐 수 있는 이불 따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누나가 오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포션을 만들어서 먹이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무기를 만드는 게 특기라서요. 회복 계열 쪽은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아요.”
민주는 옅은 연둣빛을 띠는 포션을 두 사람 입에 흘려 넣으며 말했다. 민주가 만든 포션은 어디까지나 상처 악화를 막아 주는 용도에 그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은하가 펜던트의 추적 기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도 그러했듯, 이곳은 어째서인지 아이템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미리 챙겨 온 회복용 아이템이나 상급 포션 역시 사용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뮤턴트는 헤드 헌터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랭크는 B급에 불과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발키리가 일격에 당했다니.”
시우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발키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평범한 사자가 아닌 건 확실하군.”
그때, 은하의 눈앞에 띠링! 하고 노란 메시지창이 팝업되었다.
[─저자의 이름은 ‘얀’.]
“……얀?”
반사적으로 은하가 중얼거리자 그곳에 있던 모든 눈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러나 은하는 눈앞의 메시지창에 꼿꼿하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사자궁(獅子宮) 얀은 다른 조디악과는 달리 지성이 없으며 말도 못 한다며, 자랑할 것이라곤 힘밖에 없는 짐승이라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힘’에 있어서는 데바와도 비슷할 것이라며, 녀석의 앞발에 맞고도 저 정도로 끝난 것이라면 저 두 헌터 놈은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렇군. 저 사자는 조디악 중 하나였던 것인가.
‘다른 조디악들은 바깥을 습격한 것이 아니었나?’
대한민국 헌터 협회를 습격한 예가임처럼, 다른 조디악들도 지구 곳곳에 흩어진 인류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힘으로만 따지면 데바와 맞먹을 수준이라니. 그렇다면 헤드 헌터 둘이 저렇게 맥없이 당한 것도 설명이 되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얀은 불성실하고 변덕쟁이에 만사에 무관심한데, 데바에 향한 충성심으로만 따지면 조디악 중 으뜸급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런 녀석이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곳을 지키라고.]
노란 메시지창을 응시하던 은하가 천천히 시선을 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일 고양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데바는 왜 사자궁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분명 여기에 무언가 있는 거야.’
그리 판단한 은하는 잠든 사자, 얀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잠든 건가? 저 사자는.”
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하가 묻자, 마찬가지로 사자를 응시하던 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는 척하는 건지 진짜 자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끝을 늘린 아연이 휙 하고 왼쪽을 가리켰다.
“저 기둥 너머로 가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해 오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사자의 양쪽에는 웬 거대한 기둥이 놓여 있었다. 월계수 잎이 넝쿨처럼 칭칭 감겨 있는 기둥은 어딘가 성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멀쩡한 왼쪽 기둥에 반하여 오른쪽의 기둥은 박살이 나 있었다.
“저 기둥은?”
“아, 저 오른쪽 기둥? 뮤턴트랑 발키리가 덤볐을 때 저 사자가 박살 낸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혔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아래로 희미한 마법진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래에 마법진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은데. 확인해 봤어?”
“노노,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언니가 올 때까지 작전상 대기 중이었거든. 괜히 확인해 보겠다고 다가갔다가 우리까지 저 꼴 날 수도 있잖아요?”
“…….”
잠시 입을 다문 은하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다시 물었다.
“여기 말고 다른 길은?”
“없음요. 송민주가 헤드 헌터들을 돌보면서 사자를 살피는 동안 내가 주변을 싹 다 정찰해 봤는데, 중앙 탑으로 향하려면 무조건 여길 뚫는 수밖에 없을 듯.”
역시. 그렇다면 이 사자는 길목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일 테다.
“루시, 뭔가 알고 있어?”
은하가 고양이를 불렀다. 민주와 아연이 “루시?” 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시우는 조용히 하라는 듯 쉿, 하고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바닥에 나타난 마법진에서 ‘셰이핌’의 냄새가 난다며, 저 마법진은 아마 셰이핌이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핑크색 코를 씰룩입니다.]
“셰이핌?”
[쌍어궁(雙魚宮)의 이름으로 전투력은 낮지만 결계에 관련해 강한 능력을 지닌 별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
[……!]
은하가 살짝 미간을 좁히자 노란 메시지창이 움찔 떨렸다.
이어서 루시는 셰이핌이 이곳에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전투력이 낮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디악 중 가장 겁이 많다고 했다. 그 탓에 자신의 네뷸러에도 주민들을 들이지 않고 혼자 비밀스러운 공간에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데바가 지구 이전의 다른 채널을 침략했을 때에도, 셰이핌은 멀리서 결계를 만드는 것으로 지원을 했을 뿐 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는 그 겁쟁이라면 이번에도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라며 현 상황을 신기해합니다.]
[아마 데바는 에단이 네뷸러에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셰이핌을 자신의 공간에 끌어온 것이 틀림없다며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회겠군.’
루시의 이야기를 듣던 은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셰이핌을 처리하기만 하면 결계가 사라질 거고, 에단이 여기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에단은 물론 다른 헌터들도 누구나 이곳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며, 그것이 이 네뷸러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 단언합니다.]
데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 쌍어궁을 숨겨 둔 것이리라. 또한 그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가장 힘이 세고 충직한 별, 사자궁에게 지키도록 명한 것일 테고.
은하는 루시에게 들은 이야기를 시우와 민주, 아연에게 전해 주었다.
“언니, 방금 누구랑 얘기한 거예요? 혹시 신수? 아니, 언니 계약자였어요?”
“뭐…… 그렇지.”
“왜 말 안 했어요? 아니, 그보다…… 뭐지? 왜 내 쥐 새끼는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거임?”
“조용히 좀 해. 지금 그게 중요해?”
민주는 정신이 사납다는 듯 아연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넌 아까부터 왜 자꾸 조용히 하라는 거야? 어차피 여기서 굿판을 벌여도 가까이 가지 않는 이상 저 사자는 움직이지 않는데 뭘 얼고 있냐고. 어휴, 아래에 달린 거 떼라, 그냥.”
“뭐래, 미친 거 아니야?”
“내가 고통 없이 잘라 줄 수도 있고.”
아연이 단검을 꺼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짧은 다툼이 벌어졌다.
시우는 그들의 목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은하를 향해 말했다.
“……결계라. 그렇다면 어떻게든 여길 공략해야지만 다음이 있겠군요.”
“그래, 맞아.”
빙글 몸을 돌린 은하가 저벅저벅 얀, 사자궁을 향해 걸어갔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걸까, 널찍한 바위 위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녀석이 슬쩍 눈을 떴다.
“언……!”
민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아연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자궁은 입이 찢어질 듯 크게 하품을 하더니 다시 눈을 감고 드르렁드르렁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정해진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관심을 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영역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 방에 죽일 자신이 있는 거겠지.’
──그게 누구든지 말이다.
저 사자는 그럴 만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고.
어쨌든 저 사자가 그 건방진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은하는 그것을 마음껏 이용할 작정이었다.
“야, 야……. 언니를 데리고 와야 하는 거 아냐?”
“기다려.”
당황하는 아연 앞에서 시우가 짧게 입을 열었다.
사자를 향해 걸어가던 은하가 돌연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가 걸음을 세운 곳은 사자의 코앞이 아닌, 그 왼쪽에 있는 기둥이었다.
“저쪽, 반대편 기둥 아래의 마법진은 처음부터 있었던 건가?”
왼쪽 기둥 앞에 선 은하가 오른쪽 기둥을 바라보며 묻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아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없었어요. 분명 저놈이 기둥을 부수고 난 다음에 생긴 것 같은데…….”
은하의 예상대로였다.
‘루시는 오른쪽 기둥 아래가 쌍어궁이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했어.’
즉 왼쪽 기둥 역시 다른 조디악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였다. 운이 좋다면 데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저 중앙 탑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은하는 우선 그것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 왼쪽 기둥을 부수면 이 아래에도 오른쪽 기둥이 그랬듯 마법진이 나타날 것인지 말이다.
“흡……!”
단전에 가득 힘을 준 은하가 크게 양산을 휘둘러 기둥을 내리쳤다. 그런데.
“…….”
쾅! 하는 소리가 나야 정상일 텐데 주변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방금 자신이 양산으로 기둥을 내려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만일 양산 손잡이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저릿한 감각이 없었다면 헛스윙을 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있는 힘껏 내려쳤는데도 불구하고 기둥은 멀쩡했다. 희미한 실금조차 번지지 않고 굳건하기만 했다.
그제야 은하가 무얼 하려는지 깨달은 것인지 민주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소용없어요, 누나.”
민주는 발밑을 향해 슬쩍 턱짓을 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토끼가 그려진 빈 수류탄 껍데기가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민주 역시 이미 시도해 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겠지.
“다른 방법 따위 없을 테니까. 놈을 죽이는 것 외에는.”
“…….”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민주의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오히려 사자가 자고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연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언니?! 아까 내가 한 말 듣긴 들었어요? 쟤 힘 장난 아니라니까? 스치기만 해도 뼈가 가루가 될걸!”
“…….”
“언니? 언니! 잠깐만요. 언니가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쟤는 진짜 무리예요. 절대 못 쓰러트린다고요.”
“쓰러트리지 않아도 이용할 수는 있겠지.”
“……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당한 곳에 멈춰 선 은하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드레스 리본을 스르륵 풀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으며, 은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놈이 기둥을 직접 부수게끔 유도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