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GIA 참전
(268/306)
268. GIA 참전
(268/306)
#268. GIA 참전
2023.04.25.
예상치 못한 조디악의 습격으로 대한민국 헌터 협회가 기능을 상실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을 포함한 나머지 몇 개국의 헌터 협회도 조디악 혹은 고위 몬스터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어쨌든 헌터들에게 지시를 내릴 협회장이 자리에 없는 이상 우리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시간도 더는 없겠네요.”
시우의 의견에는 은하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은하 일행은 곧장 협회를 벗어나 늑대 길드 소유의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는지, 비행장을 관리하고 있던 길드원들은 입구까지 나와 자신들의 마스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전용기를 준비해. 제주도로 간다.”
“아, 마스터, 그것이…….”
시우의 뒤를 바쁜 걸음으로 따라오던 늑대 길드 소유 비행장의 관제사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각진 안경 너머로 그가 시우 옆의 인물들을 슬쩍 확인했다.
분홍색 머리 청년, 흑염의 프린세스, 그리고…….
‘인형?’
흑염의 프린세스 품에는 어쩐지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고양이 인형이 있었다.
어쨌든 듣는 귀가 많은 이상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지. 주변을 확인한 관제사가 “크흠.” 하고 작게 헛기침하더니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그…… 손님이 와 계신데요.”
“손님?”
장난하는 건가, 지금. 시우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손님이라니. 눈치도 없이 방문한 손님 쪽도 그렇지만 그것을 굳이 보고하는 관제사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님은 돌려보내고 WZ-08을 당장 대기시켜.”
WZ-08은 늑대가 가진 전용기 중에 하나로, 다른 전용기보다 크기가 작고 소음이 적으며 속도가 빠른 특징이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상황에서 WZ-08만큼 적격인 전용기가 없다는 소리다.
“WZ-08 말씀이십니까? 그, 그런데 손님분들께서 특별한 전용기를 준비해 오셨는데요…….”
“특별한 전용기?”
“예, 마스터. B5 비행장에 정차 중인데, 우선 그쪽으로 가셔서 확인해 보심이.”
“전용기라면 늑대가 소유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시우가 관제사를 스쳐 지나갔다.
“가시죠, 선배.”
시우가 은하를 데리고 이륙장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이렇게까지 차갑게 문전 박대를 당할 줄은 몰랐네요.”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미성이 들려왔다. 우뚝, 시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듯한 단발머리를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슬픈 대접을 받은 건 GIA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GIA의 포츈 텔러, 안드레아였다.
그의 뒤에서 은발에 까만 초콜릿색 피부를 한 여성이 슬쩍 손을 흔들었다.
“또 뵙습니다.”
그녀, 녹스의 시선은 가장 선두에 선 시우가 아닌, 그 뒤쪽의 은하에게 향해 있었다.
안드레아 뒤쪽에는 그녀 외에도 네 명의 인물이 함께 서 있었는데, 저마다 목에 코인 형태의 은색 펜던트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시우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GIA?”
* * *
녹스, GIA의 코드 네임 ‘유다’의 능력으로 은닉 상태에 돌입한 작은 전용기가 상공을 날고 있다.
늑대 길드 소유의 비행장에서 은하와 시우가 돌아오길 한발 앞서 기다리고 있던 GIA는 그들의 제주도행을 돕겠다며 자처했다.
GIA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시우는 녹스를 감시할 겸 그녀와 함께 기장실에 가 있겠다며 사라졌고, 에단은 전용기에 올라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루시는 평범한 인형인 척 얌전히 은하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우리가 이곳으로 올 것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죠?”
안드레아와 마주 보고 앉은 은하가 물었다. 혹시 이런 것까지 현안으로 볼 수 있는 건가?
“협회가 습격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당신과 백랑이라면 일찍이 단말기를 통해 협회장에게 긴급 소집 코드를 받았을 텐데 막상 도착한 협회가 그 지경이라면 곧바로 제주도로 향할 것이고, 그렇다면 가장 먼저 방문할 곳이 늑대 소유의 비행장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죠. 안드레아는 뺨을 감싸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답했다.
은하는 그런 안드레아를 낱낱이 살피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제주도로 먼저 넘어가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요. 굳이 비행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정확하십니다.”
안드레아가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가 어렴풋이 사라지고 그의 눈빛이 조금 진지하게 변했다.
“한국 헌터 협회를 습격한 조디악이 천갈궁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산군에게 들었습니다.”
그리 대답한 은하는 조금 의문스러운 눈으로 안드레아를 응시했다. 직접 협회 본부까지 갔었고, 그곳에서 유엘을 만난 은하의 경우 그곳에 나타난 조디악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GIA…… 안드레아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은하의 눈빛에 담긴 미약한 의심을 읽은 것인지 안드레아가 살짝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야고보…… 아니, 협회에 심어 둔 멤버가 있거든요. 고대윤 협회장은 지금 그가 보호하고 있고요.”
그리 말한 안드레아는 자세를 바꿔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요한과 함께 닥터 플랜트의 연구소에 방문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그 이후에도 저희 GIA는 해당 연구소에 대한 조사를 이어 갔습니다. 아주 최근까지도요.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죠.”
“어떤 겁니까?”
“닥터 플랜트가 딸을 살리기 위해 조디악 천갈궁의 힘을 빌렸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천갈궁은 무엇을 위해 닥터 플랜트를 이용했던 걸까요?”
거래라는 것은 보통 양측의 득을 위해 성립되는 행위였다. 심지어 로제와 예가임의 경우 거래가 아니라 일방적인 협박, 혹은 속임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예가임에게는 로제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 그를 만났고 또 상대해 보기도 한 은하가 생각하기에 그 목적은─.
“유희…… 라든가.”
은하가 중얼거렸다.
예가임은 자신의 네뷸러에 사람들을 가둬 두고 기억과 이름을 빼앗았다. 그리해서 그들을 전사나 노예로 만들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유흥거리. 그는 네뷸러의 주민들을 그렇게 불렀으니까.
“처음에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본격적이었죠.”
그에 은하가 시선을 들어 안드레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조디악은 네뷸러를 벗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천갈궁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서 닥터 플랜트와 접촉했다는 거겠죠.”
그렇게 적당한 장기짝을 찾은 예가임은 이후 환각을 보여 주는 등의 세뇌를 시키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안드레아는 덧붙였다.
“그것이 정말 ‘유희’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이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예가임이 인간이 아니고 일반적인 기준을 벗어난 가치관을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뚜렷한 목적 없이 그 모든 일을 했다는 건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약 3년 전 출현했던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의 경우, 헌터들의 체력과 마력을 흡수하여 그 크기를 키우는 나무 형식이었습니다. 조디악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닥터 플랜트는 그곳에 많은 헌터들을 이끌고 갔죠. 단순히 학살을 위한 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양분으로 삼기 위해서.”
“바로 그겁니다. 닥터 플랜트는…… 아니, 천갈궁은 그들을 양분으로 삼고자 했던 거죠. 즉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데바를 포함한 다른 조디악들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면서까지 이뤄 내야 할 목적이 말이죠.
안드레아는 힐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고도가 많이 낮아진 건지 가까워진 바다 풍경이 그곳에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그것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서론이 길어졌군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그곳에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아이템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아이템이요?”
“네. 닥터 플랜트는 그것을 이용해 딸을 살리려고 했고, 천갈궁 또한 그것이 목적이었을 겁니다.”
“그럼 이번에 그가 살아 돌아온 것도─.”
“네, 그 아이템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우리 GIA가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그 아이템이 소모성 아이템인지 아닌지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단 하나뿐인지 혹은 여분이 남아 있는지 알고 싶어요. 만일 그 아이템이 아직 어딘가에 숨겨져 있고 우리가 그것을 구할 수 있다면…….”
안드레아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은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 결의에 차 있었다.
“어쩌면 요한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것이야말로 GIA가 이번 제주도행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루시를 감싸 안고 있는 은하의 양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안드레아의 말대로 이준을 살려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느릿하게 뛰던 가슴이 쿵쿵 빨라졌다.
“혹시 그 아이템에 대해 짐작 가는 부분이 있습니까?”
안드레아가 은하에게 물었다.
은하는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토벌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그곳에 홀로 남아 오랫동안 머물기까지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녀에게 단서를 묻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로, 은하에게조차 짐작 가는 곳이 없다면 그 외에 정보를 얻을 만한 구석은 이제 없을 거란 소리기도 했다.
‘예가임의 목적. 그리고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그리고 ‘양분’.
그 순간 은하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바로 그 게이트를 이루고 있던 황금빛 열매였다.
그러자 은하의 속내를 읽은 루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가 태워 버린 그 열매에는 확실히 많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겠지만, 죽은 예가임이 부활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긴. 그 정도 힘을 가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거라면 로제는 진즉에 그중 하나를 훔쳐 죽은 딸을 살리고자 했을 테다.
‘그랬다면 제천대성도 살릴 수 있었겠지.’
은하는 황금빛 열매에 대한 일을 안드레아에게 전달했다.
“그랬군요. 황금빛 열매라…….”
안드레아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강한 생명력이 깃든 열매라면 천갈궁이 그것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겠군요.”
“하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남은 열매가 없을 겁니다. 봉쇄 당시 모조리 태우기도 했고, 남은 찌꺼기는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제가 다 먹었으니까요.”
“어쩌면 일찍이 챙겨 두었던 여분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다른 아이템이 있었다거나.”
안드레아의 말이 끝나자 유유히 상공을 날고 있던 전용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착륙이 가까워진 듯했다.
안드레아는 창밖을 힐끗하고는 다시 은하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조금 더 정보가 필요하겠군요. 제주도에서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 중얼거린 안드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혹시 이후에라도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제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으니까요.”
“물론입니다.”
안드레아는 은하의 대답에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이후 그들은 무사히 제주도에 착륙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안드레아와 녹스뿐만 아니라 다른 GIA의 멤버도 다 함께 진입하는 듯했다.
“뭐야, 이놈들은.”
막 잠에서 깬 에단은 졸린 눈을 비비며 GIA 멤버들을 쳐다보았다. 시우는 그런 그를 다소 한심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까지 같은 전용기를 타고 왔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편 안드레아는 턱을 들어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백색 성을 응시했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곳은 더 이상 이전에 알고 있던 제주도가 아니었다.
칠흑에 잠긴 하늘. 고요하게 잠든 해변가. 흐느끼듯 불어오는 바람. 마모된 낙엽과 뒤섞여 검은색을 띠는 모래.
색감을 잃어버린 흑백 풍경에 유일하게 빛이 나고 있는 것은 오직 저 백색 성뿐이었다.
생기를 잃어버린 죽음의 땅. 이곳은 마치 그렇게만 보였다.
가라앉은 눈으로 낯선 제주도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는 안드레아에게로 은하가 한 걸음 걸어갔다.
“GIA 모두가 참전하실 생각인가요?”
“네.”
안드레아는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예사롭게, 그리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없이 그의 눈빛을 살피던 은하가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GIA는 비밀 조직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제주도 사변에 참전하게 되면 더 이상 비밀리에 활동하기는 힘들어질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복수는 해야 하니까.”
그리고……. 말끝을 흐린 안드레아가 자신의 목덜미에 걸린 펜던트를 소중히 말아 쥐었다.
“데리고 와야죠. 요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