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태풍의 눈으로
(267/306)
267. 태풍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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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태풍의 눈으로
2023.04.24.
한편 은하와 시우는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하고 해당 지점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조사를 이어 갔지만 결국 몬스터의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염려한 그들은 에단과 루시까지 함께 헌터 협회 본부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희가 많이 늦었나 봅니다.”
눈앞의 참사에 잔뜩 표정을 굳힌 시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였던 번쩍번쩍한 협회 건물은 철근 따위의 뼈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절반 이상이 불길에 휩싸인 상태였다.
주변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중 대부분이 협회 요원들 같았다.
그 믿기 힘든 광경을 훑어보던 은하가 중얼거렸다.
“사고가 있었던 건가?”
그에 시우는 푸른 시선을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에 위치한 대부분의 건물들과는 달리 협회 건물은 특별한 소재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보통 일로는 이 지경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았겠죠.”
“급습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제 의견은요.”
은하도 어느 정도 시우의 말에 동감하는 바였다. 시우를 따라 시선을 들어 협회 건물을 응시하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단순히 몬스터 짓은 아닌 것 같은데.”
내구성 강한 이 건물에 이토록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는 건 아마도 적이 그만큼의 파괴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훈련된 협회 요원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 것이 그 증거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몬스터의 짓이라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니까요. 게다가 몬스터가 협회 내부에 진입할 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었을 리도 없고요.”
몬스터가 협회 상층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시우가 덧붙였다. 문제는, 무슨 수로 협회에 진입했느냐인데…….
생각에 잠긴 시우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바깥에서 대충 건물 겉면을 확인해 보아도 하층뿐만 아니라 10층 이상에서도 피해를 입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을린 흔적이나 군데군데의 상흔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피해는 아마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누군가 몰래 잠입했을 가능성은?”
“글쎄요. 협회의 보안은 늑대의 보안 수준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입니다. 각성자여도 헌터 면허증이 없다면 2층 이상부터는 허가 없는 진입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만일 모종의 수로 입구를 뚫었다 하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일일 발급 출입 카드가 필요하고요.”
그때였다.
“흐, 흑염의 프린세스…… 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은하를 불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협회 요원이었다.
이마가 찢어진 것인지 붉은 피가 얼굴 절반을 뒤덮고 있는 남자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애써 말문을 이었다.
“제…… 천대성…… 이…….”
“제천대성?”
예상치도 못한 이명의 등장에 은하는 물론 시우까지 표정을 달리했다.
“제천대성이…… 돌아오셨, 습니…… 다……. 지, 금 협회, 12층…… 에…….”
“제천대성이 어떻게 돌아왔다는 거죠? 협회장께서는요?”
“협회장, 께서는…… 대, 피를…….”
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요원은 거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도와, 도와주십, 시…… 오.”
요원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은하는 혼란에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협회 본부를 눈에 담았다.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 * *
협회 본부에 진입한 은하 일행은 각자 흩어져서 내부를 수색하기로 했다.
사실 일행이라고 해도 시우와 은하 둘뿐이었다. 굳이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에단은 “음, 난 별로.” 하며 밖에 남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에단이 조디악을 해치우는 것에 조력해 주기로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조디악 출신인 그는 세계의 위기나 시민의 구출에 사명감과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할 테니까.
직접 건물 내부로 진입하니 바깥에서 보았던 것보다 불길이 훨씬 더 거셌다.
그러나 불을 다룰 줄 아는 은하에게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시우도 마찬가지일 테다. 얼음과 물로 적당히 진화시키면 그만일 테니까.
슈우우욱……!
은하가 지휘하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불꽃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불길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달리 있었다. 건물 내부를 꽉 채운 연기에 시야는 차단되어 있었고, 코를 찌르는 지독한 탄내 탓에 적은커녕 생존자를 수색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어떡할까.’
은하는 불길이 가득 메운 복도,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가고 있다가는 적을 놓칠지도 몰랐다.
적의 정확한 위치를 알면 해결될 문제다. 추적 기능이 붙은 펜던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추적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이상 펜던트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순간 은하는 본부 바깥에서 요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요원은 분명 제천대성, 그러니까 유환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천대성은 추적이 가능해.’
은하는 펜던트를 감싸 쥐었다.
“추적.”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펜던트는 작동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오자마자 사고에 휘말려 죽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요원의 말이 거짓이었던 걸까?
은하는 펜던트를 손에서 놓고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진실이 어찌 됐든 이렇게 된 이상 펜던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이동해야 했다.
다만 시간이 많이 없었다. 무턱대고 벽과 천장을 뚫어 가며 형편에 맞춰 지름길을 만들어 버리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힘든 이야기였다.
좀처럼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귀가 찢어질 만큼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건물이 기우뚱 흔들렸다.
‘위?’
양산을 바로 쥔 은하는 굉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2층에서 3층까지는 비상구 계단을 통해 이동했지만, 도중부터는 계단이 끊어져 있었던 바람에 무너진 천장 틈새로 뛰어올라 4층까지 도착했다.
4층은 은하가 지나쳐 온 1, 2, 3층과는 달리 불길이 멎어 있었는데, 거대한 폭발이 있었던 건지 한쪽 벽면이 뻥 뚫려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 그 굉음의 원인이 바로 이것인 듯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중, 은하는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당신들은…….”
눈에 띄는 한복 차림새.
심안 은유엘과 그의 추종자 가란, 의영. 산군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데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가란, 의영과는 달리 유엘의 상태가 평소와는 달랐다.
눈을 가리고 다니던 검은 천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늘 단정하게 여미고 다녔던 저고리가 풀어져 있었다.
게다가 옷에 튄 저 붉은 얼룩은 핏자국이 틀림없었다. 저것은 분명…….
‘전투의 흔적.’
손에 쥐고 있던 양산을 살짝 올린 은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죠? 적은.”
“쓰러트렸습니다.”
“……쓰러트렸다고요?”
가란의 말에 은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에 대답한 것은 뒤에서 의영의 부축을 받고 있던 유엘이었다.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 반대로 놈에게는 독이 되었던 것이죠. 덕분에 처리가 쉬웠습니다.”
그는 힐끔 뒤쪽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만일 내가 제천대성과 인연이 있었더라면, 전투가 조금 더 까다로웠겠지만요.”
은하의 시선이 그의 눈길을 따라 함께 뒤쪽으로 옮겨 갔다. 은하는 그곳에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재민을 발견했다.
그는 의영이 만들어 낸 종이 학에 널브러지듯 걸려 있었는데, 은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흑, 염의 프린…….”
재민은 턱뼈가 부러진 것인지 말을 잇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는 불멸 길드의 간부를 맡을 정도로 강한 사내였다. 그런 인물이 저토록 반 시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그만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일 테다.
“…….”
조금 시선을 옮긴 은하는 재민 너머로 보이는 또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유환의 시체였다.
벌써 오래전에 죽은 그는 이상하게도 마치 방금 숨을 거둔 사람처럼 혈색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극심한 전투를 겪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신체 일부분이 잘리거나 뚫린 흔적도 없었다. 그저 고요히 잠든 것처럼만 보일 뿐.
사실 그것이 제천대성에게 유엘이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의이자 배려였다.
이후 산군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은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디악이 이곳에 있었다니.’
게다가 제천대성의 육체를 껍데기 삼아 협회에 잠입했을 줄이야. 그렇다면 재민 정도 되는 헌터가 꼼짝 없이 저런 꼴을 당한 것도 설명이 되었다.
그는 ‘형님’의 모습을 한 조디악을 결코 공격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심지어 그 조디악은 시우가 한 번 쓰러트렸던 천갈궁 예가임이었다고 한다.
유엘은 이전에도 조디악을 처치한 적이 있으니 놈을 상대하기에 있어 다른 헌터들보다 경험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엘이 예가임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마음에 걸리는 점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죽은 예가임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놈에게 부활에 관련한 능력이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 눈앞에 띠링! 하고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예가임은 생명체를 조종하거나 시체를 숙주 삼아 부릴 수는 있지만, 죽었다 살아나는 능력 같은 건 없다며 장담합니다.]
[부활이라니, 그런 개연성을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능력 같은 건 데바도 가지고 있지 않다며, 그 당시 예가임이 백랑의 일격에 단지 죽은 척을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도리어 백랑의 실력을 의심합니다.]
‘아니야.’
은하는 엄지손톱을 잇새에 끼워 넣으며 당시를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다.
그때 시우의 일격에 예가임이 쓰러지는 것을 은하 역시 두 눈으로 목격했을뿐더러 탑이 봉쇄되었다는 시스템창 역시 팝업되었다. 그 죽음이, 시스템창이 위장이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죽은 예가임은 도대체 어떻게 다시 유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
게다가 무슨 수로 유환의 시체를 손에 넣었다는 말인가. 언노운 게이트에 직접 가서 주워 온 것이 아니라면.
“곧 건물이 무너질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하죠.”
산군이 앞장서서 건물을 빠져나가기 직전, 은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유환의 시체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속에 깃들어 있던 조디악이 완전히 소멸하고, 껍데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그의 시체는 이제 급격하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썩은 내가 진동하고, 팽팽했던 근육과 피부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모해 간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구역질을 하며 눈을 돌렸을 만큼 역하고 메스꺼운 광경이었지만…….
“흑염의 프린세스?”
가란이 당황한 얼굴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 유환의 시체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훌쩍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산군의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갑시다.”
유환을 멘 은하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놈, 들을…….”
종이학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재민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은하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형님, 을…… 모욕한 놈, 들을…….”
은하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피투성이의 손에 시선을 한 번 두었다가, 조금 눈길을 들어 재민을 응시했다. 조금은 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늘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던 그가,
“죽여, 주십시…… 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
은하는 굳은 듯 아무 말 없이 재민의 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대답해 주기보다는 그저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피범벅이 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주었다.
* * *
그들이 협회 본부에서 빠져나오고 단 몇 분 뒤, 산군의 예상대로 협회 본부는 완전히 붕괴했다.
은하와 함께 건물 내부로 진입했던 시우도 다행히 탈 없이 빠져나왔던 모양이었다. 은하가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유환의 시체를 발견한 그는 꽤 놀란 눈치였다.
은하는 산군으로부터 들었던 모든 앞뒤 상황을 시우, 그리고 에단에게 전달했다.
“예가임이 제천대성의 육신에 깃들어 있었단 말입니까?”
싸늘하게 식은 유환의 시체를 응시하던 시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이미 시작된 것이로군요.”
──재앙이.
시우의 끝말에 그들 주변으로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예가임이 이곳에 있었으니, 어쩌면 다른 조디악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
정적을 깨부순 은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힐끗 산군을 향했다.
“여기 일을 부탁해도 될까.”
“……당신은 어쩔 생각입니까?”
“가야지.”
검게 물든 하늘을 향해 턱을 든 은하가 짧게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은은한 황금 빛을 머금었다.
“놈들의 ‘머리’를 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