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습격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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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습격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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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습격자의 정체
2023.04.23.
협회 본부 내부로 진입한 유엘과 가란, 의영. 본부 전체가 자욱한 연기와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벽이 박살 나며 뒤편에 숨겨져 있던 전선이 생선 뼈처럼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튀는 스파크가 화재의 원인인 듯했다.
가란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휘둘러 길을 텄고, 세 사람은 의영의 고유 스킬 ‘종이접기’로 입체화된 종이 학을 타고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한 층 한 층 이동했다. 도중 생존자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9층에 도달하였을 때.
“수령님.”
의영이 나지막이 유엘을 불렀다.
“그래. 누군가 있군.”
세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남성보다 훨씬 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반대편 복도 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슈우욱…….
그들이 타고 있던 종이 학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손톱 크기로 작아졌다. 탓, 지면을 밟은 의영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존자입니까?”
떠보듯이 물어보자 검은 연기 속에 파묻혀 있던 사내가 힐끗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의영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천대성?”
눈앞에 선 남자는 분명 불멸 길드의 주인이자 대한민국의 S급 헌터였던 제천대성 유환이었다.
“어떻게 제천대성이 여기에?”
뒤쪽에 서 있던 가란 역시 유환을 알아보더니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세간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는 산군이더라도 그가 몇 년 전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복 차림의 세 사람을 응시하던 유환이 짧게 입을 열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 저쪽에 생존자가 있다. 따라와.”
그리 전한 유환은 성큼성큼 걸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눈빛 교환을 마친 가란과 의영이 이윽고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네놈이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엘이 문득 입을 열었다. 가란과 의영은 물론 앞서 걸어가던 유환 역시 발을 멈추었다.
“협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스으으…….
유엘의 손아귀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한데 모이는 듯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광경.
이윽고 빛무리가 모두 사라졌을 때쯤, 유엘은 손에 기다란 검을 쥐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투를 준비하는 그를 보고 놀랐는지 가란이 “수령님?” 하며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유엘은 유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자는 제천대성이 아니다.”
“네……?”
가란과 의영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이었다. 유환의 미소가 진해지더니, 돌연 그가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격렬한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유환의, 적의 급습이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딛고 있는 복도 바닥이 무너진 뒤였다.
탓!
9층에서 순식간에 4층까지 내려오게 된 유엘은 검으로 땅을 찍어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엄청난 속도, 그리고 파괴력이다.’
시야에서 사라진 유환이 어느새 유엘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가 딛고 있던 복도 바닥을 힘껏 내리친 것이다.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저 남자는 9층에서 4층까지, 5층 높이나 되는 천장과 바닥을 오로지 맨주먹 하나만으로 단숨에 뚫어 버렸다. 만일 반응하지 못했더라면 깨진 것은 복도 바닥이 아니라 자신의 두개골이었을 테다.
유엘은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었지만 가란과 의영에게는 속도 면에서도 파괴력 면에서도 아직 벅찬 수준의 상대였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방금 전 공격으로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꽤 하는군.”
뚜벅─
안개처럼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래 봬도 일격에 죽일 생각으로 내려친 건데 말이야.”
유환이 맹수의 것처럼 커다란 주먹을 빙글빙글 돌리자 그의 손에 달라붙어 있던 콘크리트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뿌옇게 번져 있던 시야가 되돌아오며, 유엘은 자신의 발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은 마치 대포알이라도 떨어진 듯한 거대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수령님, 괜찮으십니까?”
의영이 후다닥 다가와 유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엘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훌훌 털어 내며 답했다.
“놈은 제천대성의 능력도 같이 사용하고 있어. 너희에게는 다소 벅찬 상대일 거다.”
“아뇨,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가란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스킬을 사용하는 것조차 어려울 테지.”
의영은 유엘의 말귀를 이해했다. 누군가를 보호하면서 전투를 이어 간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그러니 유엘은 의영에게 자신 대신 가란을 보호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을 지켜 가면서까지 놈에게 승리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의영은 분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 나아가 충성심에 실금을 번지게 했다.
그런 의영의 속내를 읽은 걸까, 유엘이 그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려 두었다.
“고맙다. 덕분에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겠어.”
“……수령님.”
“가란을 부탁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엘은 유환…… 아니, 유환의 껍데기를 쓴 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길 말은 다 남겼나?”
놈은 여유로운 기색으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기다려 줄 줄은 몰랐는데.”
유엘의 말에 조디악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그는 유엘이 부하들과 대화하는 내내 호의로 기다려 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거점의 무기력화, 그리고 데바께서 백색 성을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이 헌터 협회 본부야말로 대한민국 헌터계의 주요 거점. 그러니 이곳을 박살 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헤드 헌터 1위인 흑염의 프린세스가 이곳 대한민국 소속인 까닭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분의 ‘백색 성’이 한반도 남쪽 방향, 제주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디악이 지구의 헌터계를 견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거점은 미국이나 다른 국가의 협회가 아닌 바로 이곳, 대한민국의 헌터 협회 본부였다.
‘생각보다 꽤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 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상관없다. 조디악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면 더욱 호기였다. 그만큼 이름 있는 헌터가 이곳에 몰려들게 될 테고, 그것은 곧 제주도 전투에서의 전력 손실이 될 것이니.
적의 정체는 알아차렸으나 속내까지 모두 읽어 낼 수 없었던 유엘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다면 조금 더 기다려 줄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상냥한 면이 있군. 천마궁과는 다르게 말이야.”
……천마궁?
유엘의 말에 줄곧 여유 만만이었던 적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아, 네가 퀴스토를 죽인 인간이로군.”
퀴스토. 아마 그것이 천마궁의 이름일 테다. 놈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은…….
‘역시 조디악이군.’
확신에 확신을 더한 유엘은 땅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았다.
그런데 조디악은 그에 맞춰 전투 태세를 잡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조디악이라는 걸 어떻게 단번에 알아챘지?”
‘이 몸’의 원래 주인과 인연이 깊었던 놈들…… 예를 들면 회의장에 있던 인물들은 물론, 같은 길드였던 허재민조차 바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눈앞의 이 한복 소년은 이 몸의 ‘기억 호수’에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즉 생전에 인연이 닿지 않았던, 생판 남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이 소년은 유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조디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너희들의 기운을 읽는 것 따위 내게는 쉬운 일이야. 어떤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 불길하고 음산한 기운은 가려지지 않으니까.”
유엘의 말에 조디악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유엘이 눈가를 두르고 검은 천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구나.”
“천마궁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이지.”
유엘은 검을 바닥에 끌며 예가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선천적으로 작은 체구를 타고난 유엘에게 꽤 버거워 보일 정도로 크고 기다란 검이었지만, 유엘은 그것을 가볍게 들어 올려 태세를 갖추었다.
우우우…….
유엘 주변으로 푸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별 사냥꾼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이 녀석을 여기서 죽이거나, 하다못해 이곳에 발을 묶어 두는 것만으로도 그분께 도움이 될 테니까.
그가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할짝 적신 다음 순간.
채애애앵─!
날카로운 날붙이가 부딪치는 듯한 카랑카랑한 금속음이 공간 전체를 크게 울렸다.
부딪힌 것은 유엘의 검, 그리고…… 유환의 팔이었다. 혹자는 검과 팔이 맞닿는 것으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 수 있겠냐고 묻겠지만, 육체강화계열 헌터의 선두자였던 유환이라면 특정 신체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바꾸는 일 따위 식은 죽 먹기였다.
‘정말 쓸모 있는 몸이란 말이야.’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육체에 진한 만족감을 느낀 조디악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던 때였다.
푸슉……!
“……?!”
유엘의 검에 부딪혔던 팔뚝에서 돌연 분수처럼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다. 이 단단한 몸이 저런 얇고 가느다란 검의 일격조차 막지 못한다니.
허재민. 그 헌터가 목숨을 걸고 쏟아부었던 필살기에도 흠집 하나 가지 않았던 몸인데…….
“놀랐나?”
“너, 어떻게…….”
“이 능력은 천마궁과의 전투에서 얻은 또 하나의 전리품이지.”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 낸 유엘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며 말했다.
유엘이 말한 또 하나의 전리품이란 ‘원한’이라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그것은 원한이 깃든 자에게 강력한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단순한 내용의 패시브였는데, 유엘의 경우 자신의 눈을 앗아 간 ‘별’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즉 ‘별’을 향한 유엘의 공격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게 된다는 소리였다.
스으으으…….
유엘의 검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푸른 빛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조디악은 발에 접착제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가 속박 스킬을 사용한 건가? 아니, 그게 아니었다.
──이것은, 공포.
‘놀이는 끝이다.’
언젠가 한 번은 겪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돌려보내 주지. 하늘로.”
검을 휘두르기 직전 유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커다랗게 뜨여 있던 조디악의 눈이 일순 크게 흔들린 직후,
촤아아악─!
“……!!”
유엘은 반사적으로 왼쪽 손등을 들어 코와 입을 가렸다.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작고 까끌까끌한 가루가 마치 해일처럼 몰려들어 자신의 주변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유엘은 곧 자신을 덮친 정체불명의 가루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모래?’
그렇다. 분명 모래였다.
유엘이 알고 있는 한, 육체강화계열 제천대성에게 모래에 관련한 스킬은 없었다. 그렇다면 황도 12궁 중에 모래를 가지고 있는 조디악은…….
‘설마.’
유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천갈궁.’
황도 12궁의 천갈궁, 예가임.
분명 몇 달 전 백랑이 쓰러트렸다고 알려진, 바로 그 조디악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