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5. 별 사냥 (265/306)


#265. 별 사냥
2023.04.22.


쿠구구…….

무너지는 가로등을 턱! 한 손으로 붙잡은 은하는 나머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괜찮습니까?”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여자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는 은하를 알아본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평소였다면 사진이나 사인 따위를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만일 방금 흑염의 프린세스가 저 가로등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깔려 죽었을 테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저쪽에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으니 그곳으로 대피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한 여자는 은하가 알려 준 방향으로 후다닥 뛰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멋있어! 역시 우리 언니가 최고야! 하며 당신의 정의로운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긴급 상황이다 보니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돌아다니기 힘들었던 은하는 루시에게 잠시 시스템에 들어가 있으라 부탁했다.

어쨌든 이로써 눈에 보이는 모든 민간인을 무사히 구해 낸 은하는 지탱하고 있던 가로등을 서서히 내려 두었다.

“보기보다 힘든 일이네, 헌터란 거.”

불똥이 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에단이 어느새 은하 옆에 훌쩍 다가와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은하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구출이 마지막이었나.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민간인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동하자. 슬슬 신시우와 합류하는 게 좋겠어.”

은하는 땅에 내려 두었던 양산을 다시 쥐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어째서인지 에단은 은하를 따라오지 않고 우두커니 선 채 서쪽 방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휘이잉, 나지막한 바람이 불어오며 덥수룩하게 눈을 가리고 있던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반쯤 숨어 있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단?”

은하의 목소리에 에단은 그제야 그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소리?”

은하는 에단이 방금 전까지 주시하고 있던 쪽으로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은하가 막 지나쳐 온 방향이었다. 꼼꼼히 확인했으니 그쪽에 민간인이 남아 있을 확률은 없었다.

“소리라면, 누군가의 비명이라든가?”

“아니. 뭔가 쾅, 하고 부서지는 소리.”

에단이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콰광! 하는 소리를 내며 가로등이 쓰러졌다.

땅의 흔들림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가로수나 건물이 점점 더 격렬하게 부서지고 있으니, 에단이 들었다는 소리도 분명 그런 소리가 아닐까.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신경 쓰이는 장소를 일일이 확인할 시간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의 구출.

그것을 대충 끝냈으니 한시라도 빨리 시우와 합류하여 협회에 출석해야 했다.

그리 판단한 은하는 시우와 만나기로 했던 원점으로 돌아갔다. 반대쪽도 대충 상황 정리가 끝난 모양인지 시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쯤하고 협회로 가는 게 좋겠어.”

은하는 협회 본부가 있는 서쪽 방향을 응시하며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도로 상황이 이 지경이다 보니 차 따위의 교통수단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직접 뛰는 것이 빠를 테다.

“선배.”

시우는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은하를 불렀다. 그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것을 봐 주십시오. 민간인 구출 와중에 발견한 것입니다.”

“……이건.”

시우가 내민 것은 그의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이빨이었다. 크기를 미루어 보았을 때 당연히 인간의 것도, 강아지나 고양이의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니 이빨 표면에는 보랏빛 혈액이 살짝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은하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몬스터?”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게이트가 출현한 징조는 전혀 없었는데.”

“실험용으로 잡아 둔 몬스터가 근처 연구실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혼란을 틈타 의도하여 몬스터를 풀어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

은하는 시우가 쥐고 있는 이빨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협회에 가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했다.

* * *

콰아아아앙─!!

“무, 무슨 일이지?!”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 최상층 협회장실. 정부 측 인사와 중요한 통화를 막 끝낸 대윤은 돌연 건물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 거친 굉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컥 문이 열어젖히며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황급히 들어왔다.

“협회장님! 피하셔야 합니다!”

그를 본 순간 대윤의 표정이 굳었다. 노크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는 평소 대윤을 보좌하는 비서가 아닌 협회의 특별 요원이었다.

“급습인가?”

“모르겠습니다. 12층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폭파가 있었습니다.”

폭파라고? 테러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이곳은 대한민국 헌터계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 내진, 내열, 방탄 등 각종 사고에 대비하여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런 곳에서 ‘폭파’라니…….

아니, 그보다.

“12층이라면─.”

“예, 제천대성이 대기하고 있던 층입니다.”

“그는 지금 어찌 되었나?!”

“본부에 남아 있는 특임 B조에게 확인을 명령해 두었습니다, 폭파의 여파가 생각보다 극심하여 작업이 지체되고 있는 듯합니─.”

요원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앙!!

또 한 번의 굉음이 본부를 덮쳤다. 다리가 크게 휘청거리고 벽에 걸려 있던 협회의 휘장이 철퍼덕 땅으로 추락했다.

“우선 협회장님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결국 대윤은 자세한 상황 파악을 뒤로 미루고 요원의 보호 아래 협회 1층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는 길 몇 차례의 굉음이 더 이어졌지만 다행히 별일 없이 본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

본부를 빠져나온 대윤은 협회 입구 부근에서 아연한 얼굴로 턱을 들었다. 바깥에서 보니 본부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참혹했다.

마치 맹렬한 포탄이라도 여러 방 얻어맞은 듯 건물 군데군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화재가 난 것인지 그곳으로부터 검고 탁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게 보였다.

분명 강력한 방탄유리였을 창들이 와장창 깨져 있고, 무너진 모래 사이로 빠져나오는 개미처럼 협회 직원들이 앞다투어 로비로부터 피신하고 있었다.

설계부터 건축까지 착실하게 계획하여 세워진 건물이 이렇게까지 망가지다니. 역시 적의 급습이라는 생각이 치밀었다.

‘하지만 어떻게?’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는 로비나 카페 따위의 편의 시설이 있는 1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층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처음 폭파가 일어난 장소는 귀빈실이 위치한 12층. 즉 출입을 승인받지 못한 일반인의 출입은 까다로웠다.

그리고 두 번째 폭파는 6층, 행정실이 위치한 중요한 층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적으로 추정되는 존재는 곧장 협회장실 및 사령실이 위치한 최상층을 폭파했다. 대윤이 협회장실을 빠져나오고 불과 2~3분 이후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콰아아앙─!!

“……!”

또 한 번의 굉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무척 가까운 곳, 2층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넝쿨처럼 뻗어져 나와 대윤이 서 있는 곳까지 두껍게 덮쳤다. 눈과 목이 따가워져서 쿨룩거리면서도 대윤은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2층을 폭파시켰어. 내부에 남은 인원이 더 이상 탈출할 수 없게끔 하려는 속셈인가?’

아니, 사실 저것이 폭파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다. 폭파가 아니라 단순한 ‘파괴’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실제로 적의 모습이나 능력을 확인한 것도 아니고 내부 현황을 지켜본 것도 아니었으니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저 굉음의 원인이 폭파인지 파괴인지가 아니었다.

‘적의 목적은 아마도…….’

──협회 본부의 무기력화.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핵심이 되는 층을 골라서 공략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적은 협회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혹은 사전에 미리 본부 구조를 조사하여 계획적으로 범한 행동이라거나. 대윤의 머릿속에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의 명부가 페이지를 넘기듯 촤라락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번뜩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대윤은 주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요원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나! 당장 테러범을 찾지 않고!”

“하, 하지만 현재 본부에 남아 있는 요원들의 수가 너무 적습니다. 그마저도 절반은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고요.”

랭크가 높은 요원들은 대부분 트릭스터, 괴도 조를 따라 제주도로 출발한 후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대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강제로 명령을 내려서라도 그들을 본부 내부로 들여보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불안이 치밀었다. 협회가 무기력해지면 가장 득을 보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조디악……!’

만일 현재 본부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조디악 중 하나라면? 이곳에 있는 인원만으로는 높은 확률로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A급 이상 헌터들에게도 긴급 소집 코드를 추가로 전송해! 특임 C조와 D조도 B조를 뒤따라 내부로 진입한다! 벽을 뚫어도 좋고 유리창을 깨부숴도 좋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입해서 적을 처리하라!”

그때였다.

“혀, 협회장님!”

우지끈, 콰앙─!!

마치 대윤의 말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 또 한 번의 폭파가 일어났다.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었고 본부 내부에 있던 협회 직원과 요원들이 깨진 유리창을 통해 팝콘처럼 후드득 튕겨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보란 듯이 대윤의 눈앞에 추락했다.

대윤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12층 귀빈실을 관리하는 직원이었다. 제천대성이 협회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보게! 괜찮은가?! 의무반! 의무반은 어디 있나!”

대윤은 그를 흔들어 깨우며 의무반을 찾았지만 근처에 있던 요원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미 틀렸습니다. 숨이 멎었어요.”

“그럴 수가…….”

대윤은 발밑에 쓰러진 협회 직원을 응시하며 참혹한 얼굴을 지었다.

살아 있었다 한들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불러도 시간 내에 도착할지는 미지수다. 도움을 얻을 만한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다. 서울, 아니 세계 어디든 이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상황일 테니까.

“…….”

대윤은 천천히 턱을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화마(火魔)에 집어삼켜진 협회 본부. 우박처럼 떨어지는 건물 파편들과 유리창 조각. 검게 물든 하늘. 아득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끊이지를 않았다.

툭, 투둑…….

쏟아지는 검은 비로 그의 뺨과 어깨 위가 무겁게 젖어 들었다.

──이 얼마나 무기력하단 말인가.

고개를 떨군 대윤은 밀려오는 자책과 절망에 아랫입술이 하얗게 번지도록 세게 깨물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어떡할까요, 협회장님?”

휘이이이…….

매캐한 연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모두 물러나게.”

조용히 입을 연 대윤이 천천히 재킷을 벗었다.

“내가 직접 진입할 테니.”

“그런……! 협회장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요원은 두 팔을 가로로 크게 뻗어 대윤 앞을 막아섰다.

현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을 맡고 있는 고대윤.

그는 A급 헌터 출신이었다. 전성기 때는 S급 반열에 오를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전선에서 벗어난 뒤 자그마치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협회장이 된 이후 대윤은 단 한 번도 실전에 임한 적이 없었다. 헌터 협회의 얼굴이자 한국 헌터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굳건히 건재해야 했기에 늘 헌터나 요원들에게 보호받아 왔고, 대윤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날렵하던 몸은 녹이 슨 철처럼 굳었고 짐승과 같았던 직감은 둔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대윤의 눈이 발밑에 쓰러져 죽은 요원에게로 향했다.

‘직접 그 상황을 목격한 것도, 타파해야 하는 것도 헌터들입니다. 볕 잘 드는 책상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당신들이 아니라.’

백랑의 일침이 그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대윤은 무릎을 굽혀 뜬 눈으로 숨을 거둔 요원에게 자신의 재킷을 덮어 주었다.

“안 됩니다, 협회장님! 협회장님께서 누구신지 잊으신 겁니까! 당신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그래, 잊고 있었지.”

대윤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스러져 가는 본부를 응시했다.

“나도 한때는 위험 앞에서도 시민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헌터였다는 것을.”

대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불씨가 튀고, 콘크리트 덩어리가 무서운 굉음을 흘리며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곳으로.

“다, 당신은!”

그때, 뒤쪽에 서 있던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대윤의 눈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큰 키에 훤칠한 외모를 가진 두 남자, 그리고 가운데에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선, 앳된 이목구비의 소년.

“……심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대윤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가운데 저 소년이 심안이라면, 양쪽에 선 저 남자들은 가란과 의영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산군은 세간의 일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심지어는 몇 년 전 대병풍도에 역대급 규모의 언노운 게이트가 출현했을 때도 그들은 조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산군에는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산군의 우두머리인 심안이 헤드 헌터일지라도 말이다.

“어째서 산군이 이곳에…….”

대윤의 말에 심안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실 산군이 여기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도의를 위해서,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입은 은혜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협회장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심안은 대윤 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슥 지나쳤다.

“가자, 얘들아.”

푸른 도포 자락이 휘날리며, 아렴풋한 난초 향이 코끝을 가볍게 스쳤다.

“별 사냥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