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껍데기 속 검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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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껍데기 속 검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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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껍데기 속 검은 그림자
2023.04.21.
재민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의심을 품기보다는 환희를 느꼈다.
남해안 지역에서 몇 년도 전에 일어났던 참사. 그때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님, 제천대성 유환이 버젓이 살아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여기저기 찢어진 도복. 손등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 덥수룩하고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카락. 두꺼운 눈썹 아래 맹수처럼 사납게 찢어진 눈매까지. 모든 것이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도대체 어떻게…… 아니,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재민은 회의 중이라는 것도 잊고 유환을 향해 달려갔다.
회의장에 있는 그 누구도 재민을 탓하지 않았다. 재민을 포함한 불멸의 길드원들이 얼마나 제천대성을 따랐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겠지.
“내가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지.”
대윤의 말에 따르면, 협회는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사건 이후에도 사후 수습과 현장 복원을 위해 대병풍도와 그 근방에 꾸준히 요원을 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손 두 발 멀쩡히 살아 돌아온 제천대성을 발견한 것이 바로 어제 오후의 일이라 전했다.
대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곳은 언노운 게이트였는데.”
그는 A급 헌터 ‘매발톱’으로,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사설 용병 단체 ‘검은 여단’을 이끌고 있는 자로 더 유명했다.
오랜 기간 길드에 소속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의 게이트를 돌아다녔던 그에겐 헌터가 언노운 게이트에서 보란 듯이 생존하여 복귀했다는 건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설령 그것이 S급 헌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흑염의 프린세스도 그곳에서 돌아왔으니 제천대성이라고 불가능했을 리가.”
매발톱 곁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대꾸했다. 남자는 정부 소속의 특수 요원으로, 이명은 따로 없고 ‘빅터’라는 코드 네임으로만 불리는 자였다.
“다들 진정하게. 지금 중요한 것은 제천대성이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돌아왔느냐가 아니네. 앞으로 무엇을 할지, 그것이 가장 최우선이지.”
술렁이는 회의장을 대윤이 잠재우는 동안 재민은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유환을 응시했다.
“형님…….”
유환의 시선이 힐끗 재민에게 닿았다.
“허재민인가. 걱정을 끼쳤군.”
“아니요…… 아닙니다.”
답지 않게 자꾸 울컥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까닭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님이 이런 꼴을 보면 사나이가 웬 눈물을 보이냐며 호통을 치실 텐데……. 재민은 코를 훌쩍이며 손으로 벅벅 눈가를 문질렀다.
툭─
돌연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재민의 머리 위에 올라왔다.
“그간 고생 많았다.”
씨익.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는 형님의 얼굴에 재민은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매년 늘어 가는 적자와 땅에 떨어진 명성으로 해체 위기까지 겪었던 불멸 길드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형님이 돌아오셨으니까.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는 단단하고도 굳건한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흑염의 프린세스가 보이지 않는군. 그녀와는 나눌 이야기가 많은데 말이지.”
재민의 머리에서 손을 내린 유환이 주변을 주욱 확인하며 말했다.
“긴급 소집령을 내려 두었으니 빠르든 늦든 간에 이쪽으로 오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도착이 늦어지는 듯하네.”
“흠, 그렇군.”
유환은 조금 아쉬운 기색이었다.
이후, 대윤의 선도하에 여차여차 회의가 재개되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인원이 많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관계로 회의를 이어 가도록 하지. 우선 트릭스터와 군단 길드 그리고 괴도는 앞서 제주도로 넘어가 주게.”
그러자 아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반론했다.
“뭐? 설마 우리끼리 가라는 건 아니겠지?”
“협회의 요원과 매발톱이 이끄는 검은 여단의 용병들도 함께할 걸세. 흑염의 프린세스와 백랑도 연락이 닿는 즉시 제주도로 지원을 보내겠네.”
그리고 이번에는 유환과 재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천대성, 자네는 불멸 길드를 이끌고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권 지역을 수습해 주게나.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혹시 모를 급습에 대비해야 해.”
“알겠다. 하지만 지방은?”
“다른 길드에게 맡겨 두었으니 그쪽은 염려 말게.”
거기까지 말한 대윤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번 임무로 자네들이 큰돈을 벌 수는 없을 테지. 하지만 이 임무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걸려 있어. 그것은 바로…….”
그는 그곳에 모인 면면들을 마지막으로 쭈욱 둘러보며 무겁게 말을 이었다.
“──우리의 미래라네.”
“…….”
모두의 시선이 협회장, 대윤에게 고정되었다.
“이번 일로 전 세계 헌터계의 무언가가 크게 바뀔 것 같은 직감이 들어.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일지, 부정적인 변화일지는 알 수 없지만…….”
툭, 투둑─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가 협회 본부의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대윤은 그것을 응시하며 마지막 명령…… 아
니, 부탁을 입에 담았다.
“최선을 다해 주게, 제군들. 협회장으로서…… 아니,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부탁하겠네.”
* * *
“바로 출발할 거지?”
협회 본부를 빠져나가기 직전, 민주는 근처에 있는 아연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래,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일인데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 하, 정말이지 수지 타산에 안 맞는 일이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나도 너튜버나 해 볼까. 차라리 그편이 벌이가 좋을지도. 아연은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제 단검을 휘리릭 던졌다 받는 일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민주가 이해가 가지 않는 양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구시렁대면서 왜 가는 거야? 난 네가 거절할 줄 알았어.”
괴도는 돈이 되는 일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제주도가 가라앉든 한반도가 파괴되든, 차라리 돈벌이가 좋고 안전한 나라로 이민을 갔으면 갔지 무보수로 전장 한복판에 뛰어들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괴도는, 아연은 제주도에 가 달라는 협회장의 말에 불만을 표할지언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왜냐고?’
휘리릭, 탁!
단검을 땅콩처럼 던졌다가 받은 아연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언니도 갈 테니까.’
그것은 아주 단순 명료한 이유였다. 그러나 아연은 그것을 굳이 민주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남이사 가든 말든 뭔 상관.”
“……싸가지는 여전하네.”
앞서 걸어가던 민주는 걸음을 멈추고 아연을 슬쩍 노려보았다.
아연은 민주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에는─.
‘제천대성.’
죽은 줄 알았더니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털보 아저씨, 유환이 재민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주시하던 아연이 툭 민주를 건드렸다.
“야, 송민주.”
“왜.”
“언니는 왜 제천대성이 살아 있다는 걸 몰랐을까?”
“뭐?”
“언니도 거기 갇혔었잖아. 그렇게 오랫동안 언노운 게이트 안을 떠돌았으면 둘이 진즉에 마주칠 법도 했을 텐데 말이야.”
“거기가 좀 넓어? 비밀 통로도 많았던 데다 워낙 미로 같은 곳이었잖아. 시체를 직접 찾지 못했더라도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네 말대로, 그렇게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면 더더욱. 나라도 그랬을걸.”
“그런가.”
아연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유환을 좀 더 응시하다가 이내 휙 시선을 거두었다.
“근데 타이밍 한번 지리네. 이 사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딱 나타나는 게.”
“원래 영웅 놀이를 좋아하던 아저씨였잖아.”
“죽다 살아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네.”
그렇게 아연과 민주가 자리를 벗어난 뒤. 유환과 재민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2층 버튼을 꾹 누르고 여성의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지금도 여전히 형님이 살아 돌아오신 것이 믿기지 않았던 재민은 자꾸만 힐끔힐끔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형님도 분명 불멸 녀석들이 많이 그립겠지. 녀석들을 가족처럼 보살피고 챙기던 분이니까.
‘형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알면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재민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본부로 넘어갈까요? 도성윤과 나머지 길드원들이 본부에서 대기 중일 겁니다.”
그런데 금방 고개를 끄덕일 줄로만 알았던 유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두 여기로 집합시켜. 녀석들이 다 모이는 즉시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아…….”
그래, 급한 상황이니 불필요한 이동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시는 걸 테다. 막상 본부까지 오는 길만 해도 도시가 아수라장이 된 게 보였으니까.
‘역시 형님이셔.’
늘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때그때 낼 수 있는 최대한 효율과 이득을 좇으셨지. 닥터 플랜트, 그녀와 관련한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저어…… 형님, 그분께서는…….”
순간 로제에 관한 일을 물어보려던 재민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녀를 언급해 보았자 좋은 일은 없으리라.
협회 본부 12층에 도착한 재민은 유환이 시키는 대로 불멸 측에 집합 연락을 보냈다. 형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전달하지 않았다.
협회 본부 12층에는 귀빈실이 모여 있었다. 보통 국내외의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는 데에 쓰이는 방이었는데, 지금은 유환이 이곳에서 불멸 길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마실 것을 좀 내드릴까요?”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유환에게 물었다.
“아, 고맙군.”
“물과 녹차, 과일 주스, 커피, 맥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물 한 잔만 부탁하지.”
멈칫.
연락을 마치고 귀빈실로 들어오던 재민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를 발견한 유환이 힐끗 재민 쪽을 쳐다보았다.
“왔군. 너도 마실 것 한잔 부탁하든가.”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겉으로는 싱긋 웃으며 손을 휘저어 보이는 재민이었으나 그의 속에는 자그마한 의문이 도사렸다.
‘형님께서 술을 마다하고 물을?’
유환이라면 분명 맥주를 부탁할 줄 알았다. 아니, 그도 모자라 소주는 구비해 두지 않은 거냐며 이래서 협회 놈들은 센스가 없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재민의 얼떨떨한 시선을 감지한 유환이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왜 그러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윤을 포함한 불멸 길드원들이 도착하는 즉시 임무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알코올 섭취를 피하려고 하신 걸 테고.
재민은 마음속에서 점점 더 고개를 들이미는 의문을 애써 모른 척했다.
“여기 있습니다.”
몇 분 뒤, 협회 직원은 유환에게 물이 담긴 유리잔을 건네주었다.
얼음을 동동 띄운 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켠 유환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아직인가? 많이 늦는군.”
그는 은하를 몹시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시겠지. 그녀를 ‘아우님’이라고 부르며 많이 챙기셨…….’
그때, 유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재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재민은 서서히 시선을 들어 맞은편 소파에 기대앉은 유환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안간힘을 다해 모른 척하고 있던 의구심이 더는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형님.”
재민이 딱딱하게 입을 열자 물잔을 쥐고 있던 유환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왜 그분을 이명으로 부르십니까?”
“무슨 소리냐?”
“형님은 흑염의 프린세스를 ‘아우님’이라고 부르셨지 않습니까.”
“…….”
딸깍─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유리잔에 담긴 얼음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아.”
유환은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쥐고 있던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 두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거기까지는 몰랐네.”
그리고 다음 순간,
“……!”
콰아아아앙─!!
돌연 맹렬한 굉음이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 12층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