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2. 이미 시작된 재앙 (262/306)


#262. 이미 시작된 재앙
2023.04.19.


추모관에서 나온 시우는 은하를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주었다. 바래다주는 길,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다만 추모관을 향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침묵은 간질간질하고 어색한 기류를 품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무거웠다는 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시동을 끈 시우는 아까도 그러했듯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모처럼 훈련도 일찍 끝난 날이니 어서 올라가서 쉬세요.”

그럼. 살짝 고개를 숙인 시우가 도로 차에 올라타기 전, 은하가 그를 붙잡았다.

“잠시 올라갔다 갈래?”

멈칫. 차 문을 향해 손을 뻗던 시우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그 말이 시우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아…….”

벌어진 잇새로 시우답지 않게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은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였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박자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선배는 갑자기 왜 나를 집에 들이는 것이며, 하고 싶은 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설마……!’

화끈, 시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굴에 열기가 느껴지는 순간 시우는 헙, 하고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큰일이다. 시우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전보다는 조금 더 이성으로 의식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침착해라, 신시우.’

후, 하. 시우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줄어들었다. 추모관에서 느꼈던 그 불길한 감각에 대해서는 이미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였다.

선배는 그저 제주도에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바래다준 것이 고마워서 차 한잔을 권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눈치 없이 미쳐 날뛰는 심장이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비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은하에게 닿지는 않을까 하여, 시우는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이어 갔다.

그런 와중에도 힐끔 엘리베이터 거울로 시선을 돌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았는지, 옷은 구겨지지 않았는지 재빨리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시우?”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하가 힐끗 뒤돌아보았다. 시우는 “아.” 하고 신음하고 한 박자 늦게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를 지나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이토록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시우는 익숙하지 않은 그 감각을 최대한 억누르며 안간힘을 다하여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비로소 현관문이 열린 순간.

「언니이─!!」

휘리리릭, 퐁!

무언가 작고 푹신한 물체가 눈앞에 날아들더니 은하의 품에 풍덩 안겼다.

「왜 이제 와, 왜 이제 와, 왜 이제 와, 왜 이제 와, 왜 이제 와!」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품은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괜한 걸 달고 왔네.”

푸쉬쉭…….

어디선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마치 불청객을, 아니 불순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에단과 루시였다.

그럼 그렇지. 시우는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

돌연 웃음을 터뜨린 그가 이상한지 삐딱하게 그를 응시하던 에단과 루시가 동시에 미간을 슬쩍 좁혔다.

* * *

“이제 슬슬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싶어서 불렀어.”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뒤, 은하가 꺼낸 이야기는 시우의 예상과 일치했다.

은하와 시우는 현재 조력의 뜻을 표한 헤드 헌터들의 조사 진행 상황을 중심으로 협회의 움직임과 정부의 태도에 관하여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 화제는 조디악 출신인 에단과 루시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순조롭다는 거네.”

시우와 얼추 대화를 마친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에 흩어진 탑도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는 데다, 제주도의 백색 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데바에 관한 것이었다.

“데바에 대한 이야기라면 우리보다는 그쪽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시우가 힐끗 에단 쪽을 응시했다. 루시는 이야기가 지루했는지 이미 은하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으니 물을 수 있는 건 에단뿐이었다.

“혹시 놈의 능력이나 약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은하도 에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힐끗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테이블 위에 한쪽 손으로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에단은 다른 쪽 손으로 톡톡 테이블 유리를 두드렸다.

‘이 녀석…….’

시우를 응시하는 에단의 눈빛이 상당히 아니꼬웠다. 그럴 만도 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선배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는 시우가 은하에게 마음을 전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니까.

그때 일을 떠올리니 에단의 붉은 눈매가 스르륵 가늘게 좁혀졌다.

어쩐지 기분이 매우 언짢다. 분노가 치미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가슴속에 찐득하고 거뭇한 짜증이 일렁이는 불쾌한 느낌.

톡, 톡, 톡…… 톡.

테이블 유리를 두드리던 에단의 손가락이 문득 멈추었다.

‘죽일까.’

이런 불쾌하고 성가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면 에단은 고민하는 노력조차 들이지 않고 제거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

힐끗.

에단의 새빨간 눈이 이번에는 시우가 아닌 은하를 향했다.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던 에단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능력은 창조와 파괴.”

그러자 시우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창조와 파괴라니. 꽤 두루뭉술한 능력이다. 하지만 그만큼 범상치 않은 능력이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능력에 약점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가?”

시우가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있지. 태초의 별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거든. 녀석이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나 규모를 가진 다른 것을 파괴해야 해.”

마치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야 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곁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가 “그렇군.”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데바는 낙원을 ‘창조’하기 위해서 다른 채널을 ‘파괴’했던 거였어.”

“맞아. 원래 창조와 파괴는 종이 한 장 차이거든. 녀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

에단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주도의 한라산을 ‘파괴’하고 그곳에 백색 성을 ‘창조’한 것도 데바가 자신의 능력으로 행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시우의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두렵다거나 경이롭다거나 그런 감정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헌터 중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물, 불, 바람 등 자연계열에 속하는 고유 능력이 가장 희귀하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창조와 파괴라니.

‘그런 능력이 실존하기는 한가.’

그것은 자연계열 능력으로도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무엇도 창조해 낼 수 없다는 소리지. 그게 놈의 약점이야.”

저토록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건 에단이 데바와 같은 태초의 별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자신이 데바에 준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 걸까.

아니, 그게 어느 쪽이든─.

“……터무니없군.”

시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파괴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라니. 그게 무슨 대단한 약점이라고.

제주도만 해도 파괴할 만한 것은 산더미처럼 많지 않은가. 주변의 나무, 바위, 생명체…… 심지어는 자신이 지은 구조물인 저 백색 성까지, 그 모든 것이 파괴 가능한 대상에 속할 것이다.

‘허허벌판에서 싸우지 않는 이상 놈의 약점을 노리는 건 불가능한 건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허허벌판에서 싸운다 해도 지형을 파괴하면 될 테니까.

“그게 유일한 놈의 약점이라면 그다지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군.”

“글쎄, 방법은 있어. 놈을 재우면 되거든.”

에단은 입에 딸기 모양 머리 방울을 문 채 참 쉽게도 말했다. 참고로 저것은 은하가 새로 사 준 머리 방울이었다.

“놈이 잠들면 파괴하고 싶어도 파괴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잠자는 대상을 상대할 때 에단은 무적에 가까웠다. 그것은 비록 적이 데바라 할지라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에단은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질끈 묶으며 자신의 의견에 설명을 덧붙였다.

누구든 잠이 들면 무의식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자신은 그 무의식의 영역을 ‘무아의 공간’이라고 부른다고.

무아의 공간에는 ‘정신의 핵’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파괴하게 되면 사고(思考)가 막히는 것은 물론, 행동 명령을 내리는 뇌의 기능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산송장이나 다름없으니 태우든 찌르든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 에단의 의견이었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시우가 에단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놈을 재우고 ‘정신의 핵’을 파괴한 뒤, 누군가가 바깥에서 마무리 일격을 가하면 된다는 소린가?”

“거의 정확하게 이해했는데, 한 가지는 달라. 아마 난 놈을 재우지 못할 거야.”

“뭐?”

시우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에단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그 일이 가능하단 소린가.

“놈을 쓰러트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너잖아.”

“데바 녀석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만일 그곳에 내가 있는 걸 알면 놈의 신경은 온통 내게 집중되겠지. 인간에게는 그렇지 못해도, 같은 태초의 별인 내게는 위협을 느낄 테니까 말이야.”

데바를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에단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놈을 재울 수 있을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해.”

거기까지 말한 에단은 시우와 은하를 응시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내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때가, 너희에게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소리야.”

“……말도 안 돼.”

그러나 시우의 의견은 달랐다.

“무슨 수로 놈을 재울 수 있지? 그것도 전투 도중에.”

시우의 말은 백번 옳았다. 주변에 수면 가스를 퍼붓거나 잠에 관련된 상태 이상 스킬을 가진 헌터들을 모집한다고 해도, 그런 것이 과연 놈에게 먹힐지부터가 미지수였다.

“잠시 기절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수면이든 기절이든 무아의 공간에 녀석을 가두기만 하면 매한가지니까.”

“…….”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 조디악이니 가능한 일이겠지.

재우거나 기절시키거나 그런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디악의 우두머리를 상대로 그게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게 관건이었다.

그때였다.

“……얼마 동안?”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은하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에단과 시우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1초라도 가능하지만, 3초 정도라면 확실히 핵을 파괴할 수 있어.”

“최대 3초…….”

은하가 조용히 되뇌었다.

일반인에게 3초란 몹시 짧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전투에 있어 3초란 심장을 찌른 뒤 목과 몸을 분리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데바는 창조와 파괴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창조하고, 다른 채널의 생명체를 파괴한 뒤 일부를 조디악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더불어 에단의 능력을 일부 봉인하고 영겁의 시간 동안 그를 지하 미궁에 가두어 버린 존재였다.

그런 놈을 상대로 최대 3초까지 시간을 벌라니.

“무리야.”

시우가 탁, 테이블을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까만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해 볼게.”

“선배, 상대는─.”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은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천천히 접었다가 폈다.

바닥에 열기를 전해 환각에 가까운 아지랑이를 피워 내는 것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은하의 새로운 스킬은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것만 완벽하게 해낸다면 에단이 말한 3초, 최소 1초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말이다.

그 틈을 타서 일격, 단 일격만이라도 데바에게 휘두른다면 에단이 데바의 무아의 공간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할 터.

“백색 성이 완성될 때까지는 아직 일주일 이상의 여유가 있으니까─.”

“누가 그래?”

돌연 에단이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대답한 쪽은 은하가 아닌 시우였다.

“데바가 직접 이야기했다. 백색 성이 완성되면 그때 ‘데리러 오겠다’고.”

“하.”

그러자 에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우습지?”

“어이가 없을 뿐이야.”

그리 대답한 에단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 가로 형태의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사아아아…….

숨이 멎을 듯한 차가운 정적이 그들을 휘감았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TV에서는 계속해서 CM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은하와 시우의 귀까지 닿지 않았다.

“……그게 무슨.”

침묵 속에서 시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포츈 텔러도 그렇게 예언했는데.”

“포츈 텔러?”

에단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게 누군데.”

그때였다.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은하와 시우의 주머니 속 단말기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급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건…….”

시우의 표정이 무섭도록 차게 굳었다.

[Code-001]

그것은 일부 상위 헌터에게만 알려진 기밀 호출 코드로, 협회로부터의 긴급 소집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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