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위령비 앞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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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위령비 앞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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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위령비 앞의 그녀
2023.04.18.
어느덧 시간은 또다시 며칠이 흘러, 제주도로 향하기까지 일주일을 앞둔 금요일이 되었다.
은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훈련을 마치고 나왔다. 며칠 사이 훈련의 성과가 눈에 띄게 증가한 까닭도 있었지만, 오늘은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겠어?”
시우의 승용차에 올라타기 전, 은하가 물었다. 자동차 문을 열어 주던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요.”
그리 말한 시우는 은하의 두 손을 힐끗 확인했다.
“인형은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응.”
“따라오려고 했을 텐데요.”
“그랬는데, 그냥.”
시우의 예상대로 루시는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며 은하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은하는 굳이 루시를 떨쳐 냈다.
시우가 은하에게 마음을 전한 그날 이후, 루시는 전에 없을 정도로 시우를 경계하고 있었다. 신시우의 ‘신’ 자만 언급해도 도끼눈을 부릅뜰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둘을 마주하게 만든다면 얼마나 시끄러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은하가 가려는 목적지는 무엇보다 정숙(靜肅)이 중요한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선배, 쓰세요.”
차 문을 연 시우는 조수석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야구 모자를 은하에게 건넸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을 염려하여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미리 모자를 준비해 온 듯했다.
“고마워.”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모자를 받아 들면서 두 사람의 손끝이 얼핏 스쳤다.
“아…….”
은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모자를 받아 썼지만, 시우는 분명 보았다. 찰나의 순간 은하의 손가락이 움찔 떨리는 것을 말이다.
운전석에 올라탄 시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다행이네요.”
“뭐가?”
안전벨트를 매던 은하가 힐끗 시우를 쳐다보았다. 시우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억누르지 않은 채 시동을 켰다.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혔다.
“……뭐가.”
한 번 더 묻자 시우는 못내 이기지 못한 척 대답했다.
“그날 제 고백이 없던 일로 된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아서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릴 생각은, 이젠 없나 보다. 은하는 받아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시우는 더 이상 사족을 붙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값이 나가는 차라서 그런 건지 꽤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소음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정적이 쓸데없이 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주변이 없는 은하로서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특히나 그가 제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이전처럼 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애초에 시우는 이준처럼 은하와 알게 된 지 그렇게까지 오래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러고 보니 시우와 둘이 있을 때는 보통 어떤 이야기를 했더라? 미간을 좁히고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훈련에는 차도가 조금 보입니까?”
빨간 신호가 걸렸을 때, 다행히 시우가 먼저 화두를 던져 주었다.
“……그럭저럭. 놈을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 중이었는데, 조금이나마 감이 잡혔거든.”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 것 같지는 않아.”
은하는 자신의 두 손을 빤히 응시했다.
거듭된 훈련으로 아지랑이를 만들어 내는 건 어떻게든 가능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 아지랑이 자체가 전투력이나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지랑이로는 그저 적을 혼동시키고 시간을 벌 뿐, 정작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건 은하 본인이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열기로 피워 낸 아지랑이는 은하의 필살기가 되지 못했다.
꾸욱 손바닥을 말아 쥔 은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좀 더 특별한 스킬이 필요해.”
“예를 들면 어떤?”
이후 은하는 시우에게 새롭게 해금된 권능 ‘아세팔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세팔리라면 분명, 옛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 없는 종족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검지로 핸들을 톡톡 건드리던 시우가 미간을 좁혔다. 보아하니 그도 그 스킬의 쓰임새에 대해 예상 가는 바가 없는 듯했다.
아세팔리가 해금되면서 ‘머리 없는 인형(Headless Marionette)’이라는 스킬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세팔리, 그리고 머리 없는 인형. 두 명칭의 공통된 의미는 무두(無頭)였다.
“고양이 인형은 뭐라고 하던가요?”
“루시도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 같았어.”
은하의 말에 시우는 “흠…….” 하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한 건 사용해 보기 전까진 알 수 없겠지만, 머리가 없다는 의미는 혹시 그 스킬을 발동하는 순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요.”
시우의 의견은 은하도 일찍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했다.
‘만일 그게 맞다면 이 스킬은 위험해.’
발동 조건과 스킬의 용도를 알지 못하는 한 더더욱 그랬다. 훈련 시에는 물론 데바와 전투 시에도 섣불리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역시 이 권능에 기댈 수는 없겠어.’
은하가 아랫입술을 소리 없이 짓씹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초조한 모양이었다. 룸미러를 통해 은하의 모습을 확인한 시우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이집트 쪽 탑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새롭게 빛나기 시작한 탑은 없다고 합니다.”
은하가 살짝 시선을 들어 시우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시우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음 말을 이었다.
“발키리는 자신의 유니콘을 이용해서 제주도 상공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쪽도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더군요.”
“유니콘?”
“그녀의 스킬 중 하나로 일종의 펫 같은 겁니다. 유니콘을 타고 전장을 휩쓰는 모습에 발키리라는 이명이 붙었죠.”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 달칵, 안전벨트를 푼 그가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아직 예정된 출발일까지 일주일이나 남았습니다. 여러모로 초조하실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우니 조금은 어깨 힘을 빼시는 게 어떨까요.”
시우는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바람에 크게 펄럭이는 세 개의 깃발에는 각각 대한민국의 국기, 국방부의 마크, 그리고 헌터 협회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대한민국 1세대 헌터 추모관]
─그곳이 은하의 목적지였다.
* * *
추모관 내부.
“와, 미친, 이게 다 뭐냐.”
한 학생이 비속어를 섞어 가며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추모관에 현장 학습이라도 온 듯했다.
“이거 뭐냐. 이상훈, 여기 네 이름도 있는데? 너 1세대 헌터였냐, 큭.”
“아, X발, 나랑 이름은 왜 똑같고 X랄. 기분 더럽게.”
“야, 여기도 봐! 개 쩌는데, 이거?!”
위령비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학생들이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우르르 이동했다.
“하아, 진짜 X나 재미없네. 이딴 데를 왜 오냐? 차라리 네버랜드나 가지.”
“인정. 개 노잼.”
“적당히 눈치 보다가 쌤 버스 돌아가면 PC방 가실?”
“오, 그러자. 집합 시간까지 아직 두 시간 있으니까.”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추모관의 담당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학생들을 통솔하는 선생은 몇 시까지는 버스로 돌아오라며 소리를 칠 뿐 그들의 태도를 꾸짖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찡그린 얼굴의 시우는 학생들이 사라진 방향 쪽을 휙 노려보았다.
“……제가 가서 주의를 주고 오겠습니다.”
“아니, 내버려 둬.”
“하지만─.”
무어라 반박을 하려던 시우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고등학생들과 자신이 무엇이 그리도 크게 다른가, 하는 생각.
시우는 지금까지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정확하게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1세대 헌터가 지금의 헌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대단하고 숭고했던 존재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한 적은 없었다.
헌터가 되기 전에도, 헌터가 된 후에도 말이다.
만일 은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은하가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죽기 전까지 이곳을 방문할 생각이나 했을까.
─자신에게는 과연, 저 고등학생들을 꾸짖을 자격이 있는 걸까.
“…….”
결국 시우는 학생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한편 은하는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며 위령비 앞에 섰다.
위령비에는 격변의 시대, 국가에 징집당해 목숨을 잃은 1세대 헌터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충혼(忠魂).
두 한자가 하얗게 새겨진 비석 위,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자그마한 향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향로에는 얇은 담배나 사탕 막대가 두세 개씩 꽂혀 있었다.
무거운 눈빛으로 그것을 응시하던 시우는 시선을 들어 힐끗 은하 쪽을 바라보았다.
모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탓에, 그녀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위령비를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내 이름은 없구나.”
은하가 중얼거렸다.
“당연하죠, 선배는 살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죽은 목숨이었잖아.”
“…….”
“여기에 적힌 이름이 아마 전부는 아닐 거야. 시신을 확보하고 신원을 확인한 자들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
1세대 헌터 중에 행방불명되어서 지금까지 시신은커녕 군번줄조차 찾지 못한 자는 은하가 아는 한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쩐지 숙연해진 시우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시우를 힐끗 바라본 은하가 조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
“……아까 전 그 학생들과 제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단조로이 답한 은하가 다시 위령비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새겨진 이름 석 자를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고 하더라도, 실감이 나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알던 사람도 아닐 테고, 그 시대를 겪은 사람도 아니잖아.”
당연한 거야. 작게 중얼거린 은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물었다.
“너는 지금 어때?”
“……네?”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갑자기 왜 시우의 생각을 묻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그리 묻는 은하의 목소리가 너무도 진지했기에 시우는 따로 반문할 수가 없었다.
“저는…….”
말끝을 흐린 시우가 은하를 따라 위령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까지 관심도 없었고, 까마득히 잊고 살았지만, 앞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시우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잊지 않겠다고.”
시우의 대답을 조용히 곱씹은 은하는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위령비 가장 하단, 누구의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빈 곳을 손가락으로 스르륵 쓸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난 당신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싸움으로 목숨을 잃을 겁니다.’
안드레아의 예언이 은하의 귓가를 스치는 순간,
“……그래 주길 바라.”
은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시우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더는 요구할 것이 없다는 듯.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시우는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쩌적 굳어 버렸다.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덧없고도 아슴푸레한, 그런 은하의 미소에 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시우는 저도 모르게 위령비를 쓸고 있던 은하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있었다.
“왜?”
은하의 까만 눈이 겨우 위령비에서 떨어져 시우에게 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심장은 불길한 박자로 쿵쿵 뛰어 대고 있었다. 평소라면 죄송하다며 금방 손을 놓았을 시우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쉽지 않았다.
“선배, 혹시…….”
입술을 달싹이던 시우는 이내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다른 쪽도 가 보죠.”
시우는 은하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풀었다.
불길한 예감에 여전히 심장은 엇박자로 쿵쿵 뛰어 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모른 체하며 다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럴 리가 없지.’
선배는 강하다. 시우가 아는 그 어떤 헌터보다도 말이다.
비록 여태 싸워 왔던 적 중 가장 강력한 적을 상대하게 될지라도, 이번 싸움에는 자신을 포함한 헤드 헌터가 넷이나 붙을 것이다. 그뿐인가, 괴도나 트릭스터 등 내로라하는 헌터들은 물론, 에단과 루시까지 조력할 것이다.
아무리 은하가 최전선에 서게 될지라도, 그녀가 죽게 내버려 둘 인원은 없으리라.
더군다나 포츈 텔러는 은하의 향방에 대해 그 어떤 예언도 전해 오지 않았다. 흑염의 프린세스 정도나 되는 핵심 인물이 그곳에서 변을 당할 것을 현안으로 보았다면, 포츈 텔러는 분명 그것을 은하에게든 협회에게든 일찍이 전달했을 테니까.
물론 큰 전투를 앞두고 갑자기 이런 장소를 찾은 은하의 속내만큼은 예상이 되지 않았지만,
‘괜한 기우일 뿐이다.’
시우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며 그렇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