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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자그마한 힌트 (260/306)


#260. 자그마한 힌트
2023.04.17.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그런 후회가 밀어닥쳤다.

말은 잘해 놓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덜컥 두려워진 시우는 뒤늦게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아니…… 아닙니다, 방금 그 말은 잊어 주세요.”

미친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시우의 매끈한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졌다. 시우는 혼란에 뒤섞인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그녀를 돕겠다고 그토록 자처해 놓고서, 도대체 왜 나는.

“죄송합니다.”

시우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앉아.”

은하가 그를 막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멈칫 굳은 시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자에 앉은 은하는 젓가락을 손에 들고 묵묵히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

“…….”

달그락─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찬합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렸다.

시우가 보는 앞에서 꿋꿋하게 도시락을 다 먹은 은하가 이윽고 수저를 손에서 놓았다.

은하 앞에 석상처럼 우뚝 선 시우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은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시우는 방금 제게 고백을 했다.

마음을 받아 달라거나, 정식으로 교제하자는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고백이었다. 얼마 전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백이준.’

─그도 제게 마음을 전해 왔으니까 말이다.

그때 은하는 대답 대신 이준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다고.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답이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시우가 어째서 자신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간에 그는 제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사과한다거나 얼버무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생각해 볼게.”

은하의 말에 시우의 얼굴이 더는 없을 정도로 쩌적 얼어붙었다.

“네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약속해.”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사라락─

또다시 바람이 불어오며 라일락 꽃잎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시우는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돌아온 것에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 그 뜻이 무엇인지 시우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네.”

그럼에도 시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충분합니다, 그것으로도.”

그런 시우의 앞에서, 은하도 비슷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순백의 라일락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부드럽게 두 사람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그럼 식사를 마저─.”

시우는 은하 어깨 너머의 나무, 그 아래에서 살짝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누군가 있나?’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지금 시간에 이쪽 정원을 방문할 사람은 없다. 심지어 시우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따로 명령까지 해 둔 상태였는데…….

더군다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은, 분명 그림자를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은하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 역시도 아무것도 못 느끼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기분 탓이었나?’

─확인해 볼까.

시우가 슬쩍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안 된다─!!」

빼액, 크게 소리를 친 작은 그림자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루시였다.

시우는 물론 은하까지 흠칫 놀라 몸을 굳히는 가운데, 루시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인간!」

루시는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뗀다면 그 잘난 얼굴을 갈기갈기 할퀴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언니, 그런 거 아니지?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지?」 하며 은하의 발목에 매달려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절대 언니를 보낼 수 없어!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절대로!」

“루시…….”

은하는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로 루시를 응시했다.

아득바득 소리치는 루시 뒤로, 시우는 힐끔 나무 뒤를 확인했다. 그림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뿐인가. 선배와의 단둘만의 분위기도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러나 시우는 차라리 이게 잘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홀가분히 인정하고, 그것을 선배에게 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시우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루시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올려 두었다.

“걱정 마, 뺏을 생각도 능력도 없거든.”

지금은.

짧게 덧붙인 시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루시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까 그림자를 보았던 나무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역시 없어.’

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우는 손으로 코 주변을 매만졌다.

사실 이 나무 주변에는 희미하게나마 특이한 향이 남아 있었다. 시우는 이 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놈이군.’

잘 익은 과일처럼 달콤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쌉싸름함이 느껴지는 것 같은 특유의 체취.

한번 맡은 향은 절대 잊지 않는 시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향은, 에단이 분명했다.

“왜 그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하가 물었다.

“……이곳에 누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봅니다.”

시우는 이곳에 에단이 왔었던 것 같다는 말을 굳이 은하에게 전하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

“착각이라고? 네가?”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치의 은하 앞에서, 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환각이라도 보았나 봅니다. 요즘 날씨가 부쩍 더워졌지 않습니까.”

“……뭐?”

그러자 은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환각이라니?”

“아지랑이라고도 하잖습니까. 햇볕에 땅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그 위로 연기 같은 게 피어올라서─.”

“그거야.”

시우의 말꼬리를 자른 은하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수 초 후, 휙 등을 돌리며 어디론가 황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마워, 신시우. 도움이 됐어.”

“선배? 어딜 가십니까?”

“훈련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도시락 잘 먹었어. 그리 인사를 남긴 은하는 당황한 시우를 뒤로하고 훈련실로 직행했다. 루시 역시 그런 은하를 놓칠세라 쫄쫄 뒤따랐다.

결국 그곳에 남은 것은 시우뿐이었다. 그는 빈 도시락 통을 힐긋 쳐다보더니 피식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릿하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훈련보다도 아래라는 소리군.’

별수 있나. 그런 그녀가 좋아진 것을.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자신이 만든 도시락을 남김없이 먹어 주었다는 점,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뻤으니까.

* * *

훈련실로 돌아온 은하는 곧장 훈련을 재개했다.

‘아지랑이라고도 하잖습니까. 햇볕에 땅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그 위로 연기 같은 게 피어올라서─.’

그 말이 아주 큰 힌트가 되었다.

은하의 능력은 화염. 아니, 그보다도 더 뜨겁고 강력한 흑염이었다. 능력을 사용한다면 삽시간에 땅을 뜨겁게 달구는 것 따위 식은 죽 먹기였다.

이론대로라면 땅 위에 아지랑이를 피워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난 환각 술사가 아니야.’

땅의 열을 이용하여 아지랑이를 만들어 내는 것까지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짜 환술이 아니라 모방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 데바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환술 관련 스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라면 거의 실체에 가까운 환각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은하가 만들어 낸 아지랑이는 말 그대로 눈속임일 뿐.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라면 그것이 속임수인지 아닌지 간파하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첫째, 3초 이내에 적을 쓰러트린다.

둘째, 아지랑이를 ‘실재’하게 한다.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실에 가깝게.

‘하지만 무슨 수로?’

은하는 환술은 물론 소환술에 관한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3초 이내에 데바를 쓰러트리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높은 확률로 불가능해.’

분하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가능할 리 없는 조건이었다.

은하는 얼마 전 에단과의 전투에서도 그를 압도할 수 없었다. 에단이 은하를 상대로 진심으로 달려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데바는 조디악의 우두머리다.

‘속도나 전투력 면에서는 따라갈 수 없을 거야.’

그러니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결의 ‘스킬’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고작 3초간 아지랑이를 피워 내는 것만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적을 상대하는 일에 큰 기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5초는 필요한데.’

완벽할 필요까지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5초 동안 그를 혼란시킬 수 있다면 이쪽에도 승산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실험부터 해 보자.’

은하는 훈련 내내 손에서 놓지 않던 양산을 잠시 내려 두었다.

현대의 건물은 일반적으로 철근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구성되어 있어서 강한 열을 가하면 구조가 손상되어 건물이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차기 늑대의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훈련실이었다. 바닥, 천장, 하물며 벽이나 유리까지 모두 게이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수한 재료로 제작 및 마감 처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붕괴 걱정은 필요 없었다.

양손을 내려 두고 빈손이 된 은하는 지면에 손바닥을 살짝 가져갔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황금 빛을 머금기 시작하며 손바닥으로부터 흑색을 띤 열기가 뻗어져 나갔다.

쉬이익…….

마치 주전자가 연기를 내뿜듯, 열기를 머금은 바닥 위로 희뿌연 증기가 피어오른다.

“…….”

은하는 바닥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뗐다. 상체를 서서히 들어 올린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직 정확한 온도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열기를 뻗어 내는 속도도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염을 이용하여 땅에 열기를 전달하는 건 가능할 것 같다.

「언니, 땅에 손을 댄 이후에 열기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예열을 하는 편이 조금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루시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조언을 해 주었다.

‘그 전에 예열을…….’

은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은하는 루시의 말대로 해 보기로 했다.

손바닥 위로 팟! 하고 흑염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어느 정도 온도를 달군 다음,

쉬이익……!

다시 바닥에 손을 갖다 대자,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증기가 피어올랐다. 확실히 속도가 오르긴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단숨에 열기를 방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전투 도중 데바 앞에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을 테니까.

‘조금 더 빨리.’

그로부터 은하는 몇 번이고 그 훈련을 반복했다.

이것이 데바를 쓰러트리기 위한 자그마한 키(Key)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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