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마음을 담은 도시락
(259/306)
259. 마음을 담은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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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마음을 담은 도시락
2023.04.16.
“헌터님께서는 칠면조 알레르기가 있으시니 그쪽 요리는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물론 도시락에 칠면조가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요. 아! 김치는 너무 익은 것보다는 살짝 덜 익은 것을 선호하시는 것 같더군요. 이건 제가 챙겨 두겠습니다. 그동안 대표님께서는 거기, 소시지에 칼집을 내 주시겠어요?”
……칼집?
도마 앞에 우두커니 선 시우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간단한 요리라면 시우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입맛이 까다롭고 냄새에 민감하다 보니, 시중에 파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직접 해 먹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위한 행위였다. 요리란 만들기 쉽고 치우기 편한 것이 최고였다. 지금까지는 분명 그랬다.
“한쪽 끝에만 살짝 칼집을 내면 문어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답니다. 반으로 잘라서 그 단면에 칼집을 내면 꽃 모양이 되기도 하고요.”
“…….”
시우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도마 위 소시지들을 응시했다.
소시지에 칼집이라니. 문어 모양? 꽃 모양?
어차피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도대체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시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토끼 모양으로도 가능한데 그건 상당히 난이도가 있어서, 처음은 역시 문어가 가장 간단할 겁니다. 차라리 당근을 꽃 모양으로 다듬어 보죠. 음, 그게 좋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휘는 어딘가 굉장히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모양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연하죠. 받는 사람의 기분이 달라지니까요.”
“기분이?”
“네. 도시락 뚜껑을 딱 열었을 때 그냥 밥과 반찬이 담겨 있는 것보다는 색깔이나 모양이 화려한 것이 훨씬 눈길을 사로잡지 않겠습니까? 도시락의 생명은 데코레이션! 바로 장식이거든요.”
“흠.”
그렇단 말이지. 도마 앞에서 한참을 주저하던 시우는 결국 식칼을 손에 쥐었다.
칼질에는 꽤 익숙한 그였으나 이렇듯 작은 소시지에 반복해서 미세한 칼집을 내는 작업은 처음이었다.
결국 도시락을 완성할 때쯤, 시우의 손에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도시락은 꽤 괜찮게 완성이 되긴 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제휘가 시우의 손을 응시했다.
“대표님 손이 그래서야 대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정도쯤 별것 아니야.”
시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제휘가 감아 준 반창고를 떼려고 했다. 만일 제휘가 기겁을 하며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저 손가락이 조금 베였을 뿐인데 호들갑을 떠는 제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가 치유력을 가진 시우라면 하루 이틀 사이 흉터도 남지 않고 말끔히 나을 수준에 불과한데 말이다.
시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손을 뻗어 도시락 통을 쥐었다.
“고마워.”
아주 짧은 한 마디. 제휘는 귀를 의심했다. 시우가 이렇게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은 제휘가 실버문에 입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휘가 감격에 젖기도 전, 시우는 얼른 도시락 통을 품에 안았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럼 먼저 가 보지. 뒷정리를 부탁해.”
“네, 넵! 제가 깨끗하게 치워 두겠습니다.”
시우는 겉옷을 입는 것도 잊고 그대로 빙글 몸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갔다.
제휘는 그런 시우의 등을 향해 두 손을 입에 모아 소리쳤다.
“헌터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주방을 빠져나가던 시우가 우뚝 멈춰 서는가 싶더니 힐끔 제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랬으면 좋겠네.”
조금은 어색하고 수줍은 미소. 시우와는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단언컨대 그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제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대표님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어쩐지 코끝이 시큼하기도 하고 눈이 부시기도 해서, 제휘는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시우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대표님, 파이팅……!’
제휘는 젖은 행주를 꾹 눌러 짜며 주방 청소를 시작했다.
* * *
은하의 오피스텔.
불을 끄고 커튼을 친 거실은 어두웠다. 은은한 TV 불빛만이 유일한 발광체였다.
와삭, 허니 버터 팝콘을 입 안 가득 쑤셔 넣은 에단은 TV 드라마에 열중이었다.
요 근래 은하가 훈련을 위해 매일같이 늑대 길드에 출석하는 동안 꼼짝없이 집 지키는 개 신세가 된 에단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지구의 자랑스러운 현대 문물 중 하나인 TV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나와 결혼해 줘.」
스피커를 통해 남자 배우의 달콤한 중저음이 거실을 울렸다.
「겨, 결혼이라니……. 하지만 난 당신 원수의 딸이잖아!」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그런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싼 뒤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원수의 딸? 그딴 건 하나도 상관없어.」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뻔하다면 뻔한 전개였지만 K-드라마에 익숙하지 않은 에단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흐름이었다.
무아지경으로 팝콘을 씹어 삼키던 에단이 “오.” 하며 작게 입을 벌린 순간,
「난 너와 진짜 가족이 되고 싶으니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곧이어 협찬사 광고가 화면 가득 떠오르며 다음 화 예고편이 이어졌다.
한편, 먹던 팝콘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 둔 에단은 소파에 걸치듯 기대고 있던 상체를 스르륵 일으켰다.
‘가족……. 가족이라.’
에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얼마 전 은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상기해 보았다.
‘나는 너와 적이길 바라지 않아, 에단.’
‘그건 내가 너를 구했기 때문에?’
‘그래. 그리고 난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은하는 분명 저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방금, 에단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서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흠.’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에단은 힐끔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시 45분. 최근 은하는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니, 그녀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상당히 멀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쐴 겸, 은하를 만나러 가야겠다.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사 오면 되겠군.’
에단은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홍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 다음 순간,
휘익……!
그는 17층 높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 *
도시락을 완성한 시우가 지하 훈련실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경이었다.
시우의 예상대로 은하는 오늘도 새벽부터 이곳에 와 훈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부터 자정까지 훈련을 쭈욱 이었을 은하겠지만…….
“식사, 어떻습니까?”
시우의 제의에 오늘은 잠시 훈련을 멈추기로 했다.
처음에는 훈련의 흐름이 끊길 것이 우려되어 거절하려고 했지만 루시가 밥부터 먹으라며 워낙 시끄럽게 굴기도 했고, 막상 음식 냄새를 맡으니 배가 고프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자신의 식사를 챙겨 와 준 시우 앞에서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기도 하고.
날씨도 많이 따듯해졌겠다, 기왕이면 바깥바람을 쐬면서 밥을 먹는 게 어떻겠냐는 시우의 말에 두 사람은 늑대 본부 뒤쪽에 위치한 작은 정원으로 이동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은하는 작은 정원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늑대 길드는 본부 정문과 뒤쪽에 총 두 개의 정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문의 정원은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의 넓이로 방문객도 입장 가능했는데, 조명 장식이 잘되어 있어 최근 SNS상에서 떠오르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다. 제휘와 그루가 도시락 데이트를 한 곳이 바로 그 정문 정원이다.
반대로 길드 본부 뒤쪽에 위치한 정원은 정문의 정원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나 길드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정원 중심에 위치한 자그마한 분수를 중심으로 순백의 라일락 나무가 흐드러졌고,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푸른 수국이 빼곡하게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희고 푸른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광경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특히 정원 구석에는 둥근 형태의 유리 돔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크리스탈 장식물처럼 정교한 치장이 가미된 그 건축물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여서 절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 유리 돔은 뭐지?”
“아, 게이트에서 얻은 쓸 만한 약초를 배양하는 곳입니다. A급 이상 게이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구름깃털초’는 상급 회복 포션의 필수 재료인데 24시간 일정 온도를 유지해 줘야 하다 보니 실내 재배가 필수이기도 하고요.”
“늑대가 직접 포션을 만들기도 해?”
“대부분은 제작 길드에 의뢰하지만, 회복 포션 정도라면 늑대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거든요.”
그리 말한 시우는 유리 돔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기 연못 근처가 적당하겠네요.”
연못 근처에는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기둥을 무성하게 휘감은 담쟁이넝쿨에 지붕을 뒤덮은 푸른 이끼가 고즈넉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
[물고기!]
참방!
연못 근처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루시를 뒤로하고, 시우와 은하는 정자에 앉았다.
“그…… 제가 이런 걸 만든 건 처음이라……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도시락 뚜껑을 열기 전 시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예고했다.
“네가 만들었다고?”
그렇게 묻는 순간, 은하는 시우의 손가락에 칭칭 감긴 반창고를 발견했다.
순전히 제휘가 만들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우가 직접 싸 온 도시락이라니 상당히 의외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시우가 은하의 집에 들러 몇 번 요리를 해 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카레라이스처럼 간단한 요리 위주였지만 맛이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시우는 도시락 뚜껑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선배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비로소 뚜껑을 열었다.
“이건…….”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두툼한 계란이 들어간 동글동글 김밥에 오색 과일로 장식된 연어 샐러드,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와 볶은 김치를 올린 유부 초밥, 짭조름한 소시지 야채 볶음까지. 찬합에 아기자기하게 들어간 그것들은 무엇 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메뉴가 없었다.
특히 문어 형태로 칼집을 내서 볶은 소시지에는 계란 흰자와 검은 통깨로 눈까지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한편 시우는 도시락을 보고 쩍 굳어 버린 은하를 긴장된 눈초리로 응시했다.
저 반응은 도대체 뭘까. 별로인 건가? 제휘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은하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이 수 초가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떻…… 습니까?”
결국 기다리지 못한 시우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그제야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하가 눈을 재빨리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얼른 듣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듣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미안. 이런 도시락이…… 너무 오랜만이라.”
이런 도시락? 은하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던 시우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하는 도시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은하야, 이것 봐. 문어 소시지. 엄마가 TV 보고 따라 만들어 봤는데, 어때? 귀엽지?’
아주 오래전, 수학여행을 가는 날 엄마가 싸 줬던 도시락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잊고 있었어.’
은하는 나무젓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문어 모양 소시지를 하나 집었다. 그렇게 느린 움직임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시우는 그녀가 소시지를 집고 입으로 옮기기까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문 은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맛있다.”
신기한 일이었다.
짧은 그 한 마디에, 스쳐 지나가는 듯한 엷은 그 미소에, 일주일 전부터 시우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형용하지 못할 응어리가 마치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져 버렸다.
사라락…….
희고 푸른 꽃잎들이 연못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루시가 연못 곁에서 참방거리고 있는지 맑은 물소리가 들려오고 나무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라일락이 커튼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눈앞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법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선배,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깨달았을 때는 저절로 입술이 움직인 뒤였다. 시우는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시우는 오른손으로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왼손을 스리슬쩍 감싸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불그스름한 홍조가 떠오른 뺨 위로 속눈썹이 옅은 그늘을 드리웠다.
“제주도 일이 끝나면, 선배는 무얼 하고 싶습니까?”
참방─
수면이 찰랑이는 맑은 소리가 이어진 뒤 은하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시험을 준비해 보려고 해.”
“시험, 이요?”
예상하지 못한 단어에 시우가 살짝 시선을 들었다.
“애견 미용사. 아직 늦지 않았다면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서.”
……아. 시우는 은하가 애견 미용 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당시 신수 개의 능력을 빌어 ‘휴지’로 현신했던 시우는 몰랐던 은하의 면모를 엿보았다. 헌터로서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
선배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너는?”
이번에는 은하가 물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길게 말끝을 흐린 시우는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두 주먹에 얼마만큼의 힘이 들어가 있는지.
짧은 순간 시우의 머릿속이 혼란에 물들었다.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면 안 된다며 억제하는 마음이 마구 충돌해 댔다.
하지만 결국 시우는 입을 열기를 선택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선배의 곁에 있고 싶어요.”
본능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선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과도 같은 감각이 시우의 입술을 움직인 것이다.
“……그래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