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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진지한 상담 (258/306)


#258. 진지한 상담
2023.04.15.


“──그래서, 바닥이 차가우니 옷을 벗어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시우는 헛기침과 함께 변명…… 아니, 진술을 마쳤다.

루시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흘기고 있었지만 은하는 “그래?” 하며 대꾸할 뿐 굳이 깊게 캐묻지 않았다. 애초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듯이 그렇게.

몇 초 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시우를 인식했던 걸까, 은하가 힐끗 고개를 들었다.

“……왜?”

“아뇨, 아무것도.”

시우는 금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방금 전 시우는 은하에게 재킷을 덮어 주기 위해 살짝 상체를 숙인 상태였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떡하니 눈이 마주친 것이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놀랄 상황이었다. 시우의 심장은 아직도 벌렁벌렁 진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은하의 얼굴은 평온하리만큼 무덤덤했다. 오히려 시우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사스러운 얼굴로 휙 고개를 돌리는 은하를 본 순간, 시우는 깨닫고 말았다.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배는…… 나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아.’

충격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시우 역시 그녀가 자신을 이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여태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선배에게 남자로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노력했던 적도 없었으니까. 지금 그녀와 자신의 관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기도 해서, 이렇듯 막상 깨닫고 나니 어쩐지 입안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시우는 또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깨달았다.

──자신은 선배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었던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부터였지? 정확한 계기는 없었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면 꽤 오래된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몇 시지?”

이미 시우에게서 시선을 거둔 은하는 주변을 슬쩍 훑어보며 물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시우가 손목시계를 힐금 확인했다.

“이제 곧 오후 4시입니다.”

은하는 “그래?” 하며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뒤 몸을 일으켰다.

시우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그런 은하를 눈으로 좇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속내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말이었다.

“……설마 훈련을 이어 가시려고요?”

“응, 그래야지.”

은하는 팔을 쭉 뻗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식사는요?”

“대충 챙겨 먹었어.”

「거짓말. 하나도 안 먹었어. 인간아, 언니한테 밥 좀 차려 와.」

“루시.”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히자 루시는 흠칫 놀라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은하의 눈치를 보느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했다.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선배. 쉬면서 하셔야죠.”

“그럴 수는 없어.”

“어째서요?”

시우가 묻자 은하의 까만 눈이 일순 그에게 향했다. 조금 퍼석하게 마른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앞서 눈치챘다.

“내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예상대로였다.

그 순간 시우는 일주일 전 은하를 보며 느꼈던 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선배는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질 생각인 거다.’

모든 사람을 구하고 데바를 해치우는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스스로 해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조력하겠다고 나선 헤드 헌터의 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에도 실망하지 않았으며, 이렇듯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혹독한 훈련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배는 누구에게도 의지하고 있지 않다. 헤드 헌터에게도, 다른 동료들에게도, 고양이에게도, 에단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것은 선배가 그만큼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주변에 의지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일까.

‘만일 후자라면 나는…….’

시우의 주먹에 꾸욱 손이 들어갔다.

“선배는…….”

말끝을 흐린 시우가 푸른 시선을 스르륵 들어 올렸다.

“선배는, 왜 혼자서만 하려고 합니까? 늘 내게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도움이라면 요청했어. 이 훈련실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잖아.”

“그게 아닙니다.”

“……?”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더…….”

은하는 시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답답해진 시우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신음을 토하듯 중얼거렸다.

“조금 더 의지해도 되잖아요.”

나를, 그리고 모두를.

“선배가 지금 짊어지려는 짐은 누군가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만큼의 무게입니다. 그게 헤드 헌터 1위 ‘흑염의 프린세스’라도요.”

“알아. 그러니 이럴 시간이 없지.”

단호하게 답한 은하는 조금 표정을 풀며 시우를 응시했다.

“고마워, 신시우.”

시우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고맙다고……? 그가 다시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은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짐의 무게 따위는 상관없어. 누구에게나 주어진 임무나 운명 같은 게 있잖아.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아들을 잃은 알코올 중독자가 훈련소 소장이 되어 미래를 이끌어 갈 헌터를 양성했던 것처럼.

의리와 형제애를 목숨처럼 여기던 남자가 어떤 끝이 도래하든 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것처럼.

늘 동료들의 발목만 잡았던 유약한 청년이 페로몬 능력을 이용하여 은하와 모두를 보란 듯이 구해 냈던 것처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하는 훈련을 재개했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여 제어실로 돌아온 시우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유리창 너머로 은하를 바라봤다.

시우는 은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늑대의 길드장이 되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은 그였다. 그런데도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무엇이 아직도 부족하여, 그녀로 하게끔 저를 의지할 수 없게 만드는가. 아니, 그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니.’

도대체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은하에게 도움이 될까. 은하는 훈련소를 빌려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시우의 생각은 달랐다.

‘무언가. 무언가 조금 더…….’

그때였다.

털썩!

몬스터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 은하가 중심을 잘못 잡고 바닥에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선……!”

놀란 시우가 당장 제어실을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은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어났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서 말이다.

「다음.」

은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

유리창 너머를 지켜보는 시우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시우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몬스터 재생성을 위해 스위치를 켜는 일밖에 없었다.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휘에게 전화가 왔다. 망치에 의뢰했던 아이템의 일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따로 확인하시겠다면 최상층으로 올리고, 확인이 필요 없으시다면 바로 창고로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창고로 보내. 확인은 나중에.”

그리 답한 시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다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

「예?」

“지금 본부에 있나?”

「네. 이제 막 도착한 참인데…….」

“잘됐군.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길드장실로 와.”

통화를 종료한 시우는 유리창 너머로 은하의 모습을 힐끔 확인하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제휘가 전화를 끊자 곁에서 의뢰품 박스를 껴안고 있던 그루가 슥 고개를 돌렸다.

“뭐래?”

“음,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길드장실로 오라고 하시네요.”

“그래? 다녀와, 그럼.”

영차. 그루가 들고 있던 의뢰품 박스를 내리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제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루 씨도 같이 가셔야죠.”

“내가? 왜?”

“아마도 완성된 의뢰품에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신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저 혼자 가는 것보단 제작자인 그루 씨도 함께 가는 편이 더 낫겠죠.”

사실 제휘는 한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시우가 그를 부른 까닭은 망치의 의뢰 건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은 함께 백랑의 집무실이자 길드장실이 있는 최상층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대표님. 박제휘입니다.”

천장에 닿을 듯 길고 화려한 문을 똑똑 두드리자 그 너머로 “들어와.” 하고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십시오.”

제휘가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살짝 눈매를 찌푸린 그루가 서서히 길드장실로 들어섰다.

처음 든 감상은 ‘과연 대한민국 최대 규모 길드인 늑대의 길드장실답다’였다.

호텔 로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광활한 공간. 한쪽 벽면이 통째로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햇살이 그대로 내리쬐었다.

늑대 길드의 마크가 새겨진 커다란 휘장이 걸린 왼쪽 벽면. 그 아래로는 각 국가와 기관에서 받은 상패나 감사장 등이 도미노처럼 주르륵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탁 트인 창가 바로 앞에는 가로로 길게 쭉 뻗은 업무 데스크가 있었는데, 그 곁에 놓인 푹신한 의자는 사무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왕좌에 가까울 만큼 커다랗고 화려했다.

제휘와 그루에게 등을 보인 채 창밖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 늑대의 주인 백랑 신시우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왔군.”

“예, 대표님. 이것이 의뢰품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제휘는 데스크 위에 의뢰품 박스를 올려 두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우는 그쪽을 향해 힐끗 눈길을 줬을 뿐 박스를 열어 그 안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데스크를 지나쳐 저벅저벅 제휘에게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 도시락을 만들었었지, 아마.”

도시락? 시우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제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우는 괜히 헛기침을 한 뒤 제휘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며 말을 이었다.

“……본부 1층 정원에서 말이야. 점심시간에 불카누스와 도시락을 먹었잖아. 아닌가?”

“아, 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도시락은 제휘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루의 작품이었다. 그리 덧붙이기 위해 제휘가 입술을 달싹인 순간, 시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건 어떻게 만들지?”

“예?”

“도시락. 보통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고.”

아……? 제휘가 눈을 끔뻑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멍한 얼굴을 하면서도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휘보다는 그루 쪽이 훨씬 더 상황 파악이 빨랐다.

“만드는 방법이나 형식이 뭐가 중요해. 좋아하는 사람이 만드는 거라면 뭐든 다 맛있겠지.”

엥? 제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루를 돌아보았다.

“그, 그루 씨?”

도대체 그루 씨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혹시 대표님이 여기서 불쾌한 기색을 보인다면 자신은 그를 말릴 자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요즘 제주도 일로 신경이 예민하신데 어쩌지.

그런데 그런 제휘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시우에게서는 예상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 관계는 아니야.”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리듯 답한 시우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제휘는 저도 모르게 쩌적 얼어붙었다.

‘저 표정. 그리고 말투.’

굉장히 낯설지만 친숙하기도 했다. 마치 주변인에게 처음으로 연애 상담을 하는 사춘기 소년 같기도 한─.

‘아……!’

그 순간 제휘의 머릿속에 일순 벼락이 내리쳤다.

시우가 어째서 갑자기 도시락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표님!”

제휘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시우 앞에 섰다. 흠칫 놀란 시우가 퍼뜩 시선을 들자 결연한 얼굴의 제휘가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날.

저택으로 돌아온 시우는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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