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헤드 헌터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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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헤드 헌터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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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헤드 헌터의 선택
2023.04.14.
훈련을 마치고 올라온 은하까지 합류하여, 늑대 본부 9층 특별 응접실에서는 헤드 헌터의 비밀회의가 시작되었다.
은하는 그들에게 당시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최근 이집트의 탑에서도 빛이 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나요?”
은하의 이야기가 끝난 뒤, 등에 커다란 검을 멘 채 주홍색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젊은 여자, 발키리가 시우를 향해 물었다.
“네, 이미 전달받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 이집트에 현지답사를 가 봤는데, 빛나고 있다는 건 사실이더군요. 다른 탑이랑 마찬가지로 그 빛은 제주도로 향하고 있고.”
“입구는?”
“봉쇄됐어요. 헤드 헌터인 나도 들어갈 수 없으니, 아마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겠죠.”
발키리의 말에 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처음부터 탑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던 거군요.”
“역할이라면?”
창가에 앉아 있던 뮤턴트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심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신 대답한 건 은하였다.
“일종의 송신탑 같은 개념.”
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 집중되었다.
“조디악은 처음부터 백색 성을 건설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탑은 그에 대한 사전 작업이었던 거고.”
그러자 발키리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른 조디악들이 인류의 손에 의해 소멸할 때, 우두머리라는 데바 놈이 그걸 막지 않았던 이유도…….”
“우리가 탑을 봉쇄하든 말든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거 아니야? 그 당시에는 백색 탑을 만들어 낼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었던 걸 수도 있고.”
뮤턴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데바 입장에서 나머지 조디악이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었던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동료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뮤턴트의 말을 부정한 발키리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눈매를 찌푸렸다.
헤드 헌터로 선별되기 전, 그녀는 캐나다에서 ‘은갑옷의 잔다르크’라고 불리기도 했다. 자비롭고 용감하고, 또한 정의로운 그녀의 명성은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동료의 죽음을 모른 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은하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발키리가 그녀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목적이라면…….”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조디악의, 데바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구의 네뷸러화. 그리고 둘째는 우성 인자를 선별하여 낙원으로 데리고 가는 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 데바라는 녀석은 같은 조디악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을 거란 말인가요?”
“아마도.”
짧게 긍정한 은하가 발키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디악이 죽어 공석이 생긴다 한들 다른 채널에서 구한 적당한 인원으로 갈아 치우면 될 테니까.”
“그런…….”
테이블 위 발키리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습니까?”
백랑에게 질문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했던 발키리와 뮤턴트와는 달리, 심안 유엘은 은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시우를 제외한 헤드 헌터 중 유일하게 1위 흑염의 프린세스를 인정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심안이라고.
“탑이 모두 빛나기 전에 제주도로 들어가서 놈을 치는 것.”
은하의 대답에 발키리가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게 전부입니까?”
“네. 그 이상의 작전은 세워 봤자 무의미할 테니까.”
그건 시우도 동의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극히 한정적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약 3주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동안 최대한의 준비를 마친 뒤 우리는 제주도로 이동할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모든 탑이 빛나기 시작한다면 일정은 그만큼 당겨지겠지만.”
은하는 그곳에 모인 헤드 헌터들을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함께 가겠다면 당신들에게는 조난자의 수색과 본부와의 연락, 그 외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투를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자 발키리는 여전히 당혹감에 젖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잘못 이해했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은 지금 혼자 데바의 목을 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은가. 은하는 지금 다른 일들을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 혼자 데바를 상대할 것 같은 말투였다.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담백하게 돌아온 대답에 발키리가 어이를 상실한 듯 입술을 벌렸다.
“한라산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녀석입니다. 가능할 리가 없어요.”
“그럼 반대로, 이곳의 누구에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
발키리와 뮤턴트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심안 은유엘도 마찬가지였다. 발키리와 뮤턴트와는 달리, 인류 최초의 봉쇄자인 유엘은 과거 조디악과의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싸움으로 유엘은 두 눈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조디악의 우두머리인 데바를 상대하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자신이 없었다. 유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평화도, 두 눈도 아니었다.
‘오직 산군의 안위.’
우두머리를 잃은 단체가 얼마나 쉽게 몰락하는지는 불멸 길드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개죽음이 확실시된 싸움이라면, 산군을 이끄는 자신이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시우의 경우, 데바를 상대하는 건 은하에게만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중 누구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곳의 모든 이가 입을 닫고, 은하의 물음에 대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 후, 누군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기 시작했다.
“좋은데.”
뮤턴트였다.
“난 찬성. 주변 게이트를 토벌하는 일에도 질렸고, 여기 있는 편이 훨씬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재미라니, 당신…….”
발키리는 그런 뮤턴트가 거슬리는지 인상을 쓰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득실로만 움직이는 다른 녀석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낫지 않아?”
……물론 뮤턴트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오히려 잘됐어. 만일 함께 데바를 상대하자고 했다면 거절할 생각이었거든. 난 댁들이랑 달리 B 랭크밖에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수색 작업이라면 특기야. 조난자 수색 작업은 내게 맡겨.”
시우는 나머지 두 사람, 발키리와 유엘을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발키리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대답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는 않았다.
“……돕겠어요.”
그걸 위해 여기 먼 나라 한국까지 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헤드 헌터로 선별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혼자서 데바를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그녀가…… 아니, 우리가 패배할 확률은 아마 90% 이상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력을 바라는 자를 거절할 까닭이 되지는 못하죠.”
여기서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발키리는 사실 지난번 아르헨티나 회담 때 은하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력해 달라. 은하는 그리 말했었다.
그 당시 탑은 인류에게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키리는 은하의 말에도 구태여 나서지 않았다.
발키리를 포함한 헤드 헌터들은 은하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조디악이 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게 오산이라는 은하의 주장은 옳았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백색 성이 나타났고, 조디악의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일 아르헨티나 회담 직후 헤드 헌터가 힘을 합쳐 모든 탑을 봉쇄했더라면? 무언가 다른 계획을 세워 행했더라면? 어쩌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답은 아마도 NO.
이건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GIA의 포츈 텔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흑염의 프린세스는 확신을 갖고 헤드 헌터들을 설득하려고 했고, 설득에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움직이기를 선택했다.
이 여자의 눈에는 무언가 보이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것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저 직감이나 신념에 맞게 행동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키리는 궁금했다.
이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과연 자신이 제시한 90%의 패배 확률을 뚫고, 어떤 결과를 보여 줄지.
가슴이 쿵쿵 뛴다. 헌터가 되고 처음으로 게이트에 투입됐던 날처럼, 생생하고 긴장되지만…… 결코 싫지 않았던 그 기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양감(高揚感)이었다.
“…….”
발키리는 노을이 깃든 듯한 주홍빛 눈동자를 들어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지막, 심안의 의견은?”
시우는 마지막으로 심안 유엘을 돌아보았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시우의 시선을 느낀 심안은 그가 묻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제주도에서 우리 가란이 빚을 졌다고 들었습니다.”
기분 탓일까. 고개는 분명 시우를 향하고 있었지만 검은 천 너머의 그의 눈길은 은하에게 닿아 있는 듯했다.
유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군의 안위. 만일 한국에 S급 게이트가 출현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면 정부에도 협회에도 조력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얼굴 없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산군은 도의(道義)를 압니다.”
─우리도 돕지요.
그가 한복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뮤턴트, 발키리, 심안, 백랑, 그리고 흑염의 프린세스까지 총 다섯.
헤드 헌터 12인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였다.
* * *
회의가 끝난 뒤.
제주도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거나 급한 소식이 있을 때까지 개별 행동을 하기로 한 헤드 헌터들은 저마다 흩어졌다.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은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늑대 길드 본부의 지하로 내려가겠노라 말했다. 은하만 내버려 두고 귀가할 수 없었던 시우는 결국 함께 훈련실에 내려가기로 했다.
복도 끝자락에 비밀스럽게 설치된 관계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
“듣자 하니 최근 들어 외국에 S급 게이트 출현이 잦다고 합니다.”
시우가 돌연 해외 헌터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도 사변과 관련이 있는가 싶어서 그를 향해 눈길을 돌리자 층수 표시등에 시선을 고정한 시우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쪽 상황을 전달해 두었으니, 아마 그쪽 일을 정리하고 나면 뒤늦게라도 연락을 줄 겁니다.”
……아. 다른 헤드 헌터에 대한 이야기였군. 은하는 뒤늦게 시우의 대화 의도를 파악했다.
시우의 호출에 응한 헤드 헌터는 총 3명이었다. 그중 한국인인 유엘을 제외한다면, 방한한 헤드 헌터는 뮤턴트와 발키리, 둘뿐이라 할 수 있었다.
“해가 밝으면 다시 한번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지금 시우는 온 힘을 다해 은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그 사실에 은하가 실망이라도 했을까 싶어서.
“괜찮아, 처음부터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
큰 싸움일수록 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라.
오래전 훈련소에서 배웠던 마음가짐 중 하나였다.
호출에 응한 헤드 헌터가 고작 둘뿐이라는 사실에 전혀 맥이 빠지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기대가 작았던 만큼 실망도 작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만큼 내가 더 힘을 키우면 해결되는 일이야.”
그리 말한 은하는 지하 훈련실로 통하는 철문을 열었다. 그 순간 시우는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 감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며칠 뒤 깨닫게 되었다.
* * *
그로부터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며 은하의 마음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조급해지고 있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약 2주일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강해지고 있다는 실감은커녕 새로운 권능에 대한 아주 작은 힌트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수확이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은하는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이어 갔다. 시우가 다른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쉬지 않고 말이다.
“선배는?”
일정을 마치고 훈련실로 돌아온 시우는 제어실 담당자에게 은하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새벽 5시부터 지금까지 훈련을 이어 가시다가…….”
말끝을 흐린 그가 힐끔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시우의 시선이 그에 따라 그쪽으로 움직였다.
“……!”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쓰러진 은하의 모습을 말이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시우의 얼굴을 확인한 길드원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잠시 주무시고 계신 겁니다.”
그제야 안심한 것인지 시우의 눈매가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한순간일 뿐, 곧 다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그가 차가운 눈초리로 말했다.
“왜 저기서 재운 거지? 휴식실을 따로 준비해 두었는데.”
“그, 그게…… 휴식실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몇 차례나 말씀드렸는데도 끝까지 거절하셔서 말이죠. 10분만 자고 일어나서 바로 다시 훈련을 시작할 거라고요…….”
길드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하긴. 은하의 고집은 시우도 절대 꺾을 수 없었다.
시우의 명령 때문에 이곳에 앉아 있는 이 힘없는 길드원이 무슨 수로 은하를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차갑고 지저분한 땅바닥에 널브러진 듯 잠든 그녀를 내버려 둔 사실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선배의 훈련에 큰 도움이 될 줄 알고 일부러 데리고 온 자인데, 이토록 무능하고 생각이 없을 줄이야.
‘사람을 잘못 골랐군.’
다시 지방으로 돌려보내 버릴까, 그런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시우는 가슴속에 참을 인을 새기며 그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알았다. 이만 나가 봐.”
시우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남자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후다닥 훈련실을 빠져나갔다.
철커덕,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 시우는 서서히 제어실을 빠져나가 은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꽤 깊게 잠이 들어 있는 것인지 은하는 곧바로 깨지는 않았다. 물론 시우가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줄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은하가 잠에 빠지면 그녀와 정신이 연결된 루시도 자동으로 무의식 상태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녀의 옆구리에서 고개를 툭 떨군 채 미동도 없는 고양이 인형을 보니 아무래도 그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살짝이라도 어깨를 흔들거나 말을 걸면 은하는 번쩍 눈을 뜰 것이다.
하지만 지친 기색으로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시우는 선뜻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땀을 많이 흘렸는지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나 뺨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기도 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늘 강인하게만 보이던 은하가 창백한 안색으로 땀에 흠뻑 절어 바닥에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것을 보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휴식실까지는 무리여도 제어실에 배치된 소파까지라도 옮기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그러려면 선배를 안아 들어야 하는데.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우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는 푸른 시선으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니 당연하게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시우는 스르륵 재킷을 벗었다.
잠든 그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은 도의적으로도, 그리고 시우의 정신에도 굉장히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그냥 옷만 벗어 덮어 주기로 한 것이다.
재킷을 벗은 시우는 다시 은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쿵! 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신시우?”
언제 잠이 깬 걸까.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 새X 지금 울 언니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냐!」
어느새 은하를 따라 정신을 차린 루시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꽥 소리를 지르더니 「봤어, 내가 다 봤다고!」 하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딸랑딸랑딸랑! 루시의 목에 있는 방울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아…….”
시우의 턱선을 따라 또르륵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