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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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대비
2023.04.13.
「설정값 245755. 출력값 378941. 개체 수 4. 설정 레벨 90. 제한 시간 없음.」
「LOADING…….」
「적용 완료. 몬스터가 생성되었습니다.」
위이이잉─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은하의 눈앞에 홀로그램 몬스터가 네 마리 나타났다.
시우는 유리창 너머에서 팔짱을 낀 채 은하의 훈련 양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인가.’
늑대 길드 본부의 지하 훈련장에서 은하의 훈련이 시작된 지도 말이다.
그가 안팎에서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해 내는 동안 은하는 거의 이곳에 틀어박히다시피 하여 훈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일주일간 급한 일정을 소화해 낸 시우는 첫날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거의 들르지 못했고, 이제야 조금 짬이 나서 방문한 것이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시우의 곁에 있던 연구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유리창 너머의 은하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시우의 아버지인 백야 신귀훈이 늑대를 이끌던 시절 때부터 길드의 연구팀에 소속한 남자였다. 저 모의 게이트 장치를 개발하는 것에 일조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백야가 사망하면서 길드를 나갔던 자였지만 은하의 훈련을 위해 시우가 다시 늑대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장치를 가동하는 것 정도는 시우도 할 수 있었지만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대처하는 건 전문가만 가능한 일인 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선배의 일인 만큼 신임이 가는 자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늑대의 연구팀에 소속해 있었으며 늑대에게 충성을 바쳤던 이 남자가 적격이었다.
“수치 증가표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도련…… 아니, 마스터.”
그는 아직 시우를 ‘도련님’이 아닌 ‘마스터’라 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시우는 남자가 건넨 표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노랑, 빨강, 파랑 등 각각의 색깔로 표시된 줄이 죽죽 그어진 복잡한 그래프가 보였다.
일주일 동안 은하가 훈련한 총 시간과 그녀가 쓰러트린 몬스터의 개체 수가 정확하게 출력되어 있었다. 그녀의 각종 능력치가 어떤 종류의 전투에서 얼마만큼 증폭 혹은 반감되었는지, 또 예상 획득 경험치의 총량은 얼마나 되는지까지.
그건 오랜 기간 이 장치를 발명하고 만져 왔던 이 남자조차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우는 그런 것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은하의 실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한 군데 있었다.
‘이건…….’
그동안 은하가 이곳에서 얻은 예상 경험치의 총량이 ‘0’이었다.
‘선배가 조디악의 화신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선배가 만일 단말기를 확인했다면, 이 훈련으로 경험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을 거다.’
그럼에도 은하는 일주일 내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이나 지독한 훈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무언가 얻고자 하는 게 있는 건가.’
──경험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이 훈련에서.
시우는 다시 시선을 들어 유리창 너머의 은하를 응시했다.
은하가 싸우고 있는 상대 몬스터는 구름처럼 하얗고 몽실몽실한 기체가 한데 뭉친 거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 코, 입은 없고 오른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몸이 기체로 만들어진 만큼 물리적인 타격을 거의 입힐 수 없었다.
놈을 쓰러트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움직임을 구속할 수 있는 종류의 상태 이상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하에게 그런 스킬은 없다.
‘어떻게 할 생각일까.’
시우는 은하의 움직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스릉─ 촤악!
장검을 겨눈 몬스터가 은하에게 돌진했다. 은하는 빠르게 튀어 올라 놈을 향해 양산을 휘둘렀다.
슈우우…….
놈의 배 부근이 양산의 움직임을 따라 가로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곧 다시 뭉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스릉─
은하의 뒤쪽에서 또 다른 몬스터가 검을 들어 올렸다.
재빨리 그것을 인식한 은하는 다음 순간 이전보다 조금 더 높이 도약했다. 그러더니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속도로 네 마리의 손목을 가격했다.
챙! 챙그르르…….
정신을 차렸을 때, 몬스터들은 모두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놓친 뒤였다.
몸이 기체로 되어 있을 뿐, 그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장검은 실제 물건이었다. 놈들을 공격하기보다는 놈들의 공격 수단을 일시 봉쇄한 것이다.
‘시간을 벌기에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놈들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것을 선배도 알 텐데.
더군다나 레벨이 90 정도나 되는 몬스터라면 학습 능력 또한 가지고 있을 터. 홀로그램 제작에도 이 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을 거란 소리다.
즉, 놈들이 다시 무기를 주워 들기 전에 결판을 내야만 했다.
파앗─!
은하가 다시 한번 도약했다.
힘이 닿는 한 공중의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른 순간, 그녀는 양산을 바로 잡았다.
‘또다시 양산 공격?’
아니, 통하지 않는다는 건 방금 공격으로 확인했을 텐데. 시우의 눈이 가늘게 변하던 찰나,
화아아악!
검은 불꽃이 은하의 양산 주변을 감쌌다. 은하가 그 상태 그대로 크게 360도 회전을 하자 양산과 흑염이 공중에 둥글고 커다란 잔상을 남겼다.
까만 불씨가 마치 눈송이처럼 여기저기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놈들을 공격할 줄로만 알았던 시우는 조금 놀란 눈으로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그는 은하가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했던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스스스스…….
기체로 된 몬스터가 서서히 반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시우가 스르륵 입꼬리를 올렸다.
‘주변 온도를 높여서 기체 형태를 한 놈들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군.’
길에 안개가 심하게 생성된 경우, 공기를 건조하게 만드는 것으로 안개를 저감할 수 있다.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까닭은, 바람을 이용하여 열기를 조금 더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였다.
타닥, 타닥…….
바닥에 닿은 불씨가 여기저기로 튀었다. 기체로 된 몬스터들은 마치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대충 승부가 난 것 같군.’
시우는 그제야 한숨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제휘로부터의 전화였다.
“어.”
시우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은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헤드 헌터들이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우의 눈이 힐끔, 유리창 오른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오후 7시 13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마 밤 10시까지는 본부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알았다.”
전화를 끊자 마침 전투를 끝낸 은하가 보였다.
아무리 홀로그램이라고 한들, 레벨 90 몬스터를 네 마리나 동시에 상대하는 건 S급 헌터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듯했다.
이후로도 계속 전투가 이어졌다. 이제는 전투 외에 또 다른 지점이 걱정이었다.
제어실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은하는 이른 아침부터 이곳을 방문하여 지금까지 약 12시간에 걸쳐 훈련을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그녀가 취한 휴식은 최소한의 식사를 위한 30분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의 전투에 시간을 쏟았다고.
그러나 시우가 본 은하의 얼굴은 뿌듯하다거나 만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닥에 쓰러진 홀로그램 몬스터는 곧 지지직, 노이즈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미묘한 얼굴로 그것을 응시하는 은하에게, 시우가 마이크를 통해 말을 걸었다.
“선배,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러자 은하가 스르륵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들린 시우의 목소리에 얼핏 놀란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보였다.
시우가 제어실에 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일주일간 다른 일정으로 바빠 얼굴을 비추지 않았거니와, 이쪽에서는 은하가 서 있는 훈련실의 모습이 보이지만 저곳에서는 제어실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은하는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니, 조금만 더 부탁해.」
“듣기로는 이미 오늘 하루만 해도 30마리나 처치하셨다는데요.”
「30마리‘밖에’ 처치하지 못한 거지.」
은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그녀는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었다.
「언니, 저 인간의 말이 맞아. 조금만 쉬다가 다시 하자.」
은하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고양이 인형, 루시가 앞 발바닥으로 은하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나 은하는 손에서 양산을 놓지 않았다.
‘아직이야.’
이 정도로는 데바를 쓰러트릴 수 없다. 그 생각만이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은 은하가 훈련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수확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언노운 게이트에 루시를 되찾으러 갔을 당시, 은하에게 두 쌍아궁의 가호가 겹쳐지며 새로운 능력이 부여되었다.
대표적인 변화는 체력, 마력, 민첩성 등 전체적인 능력치가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은하는 순간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려 자신이 원할 때에 ‘각성 상태’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도 은하의 눈이 각성 상태라 알리듯 황금색으로 물든 적은 있었지만 요즘처럼 스스로가 제어했던 적은 없었다.
‘이번 에단과의 전투가 큰 도움이 됐어.’
그 전투로 마력을 끌어 올려 신체를 구성하는 온 혈관에 순식간에 퍼지게 하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으니까.
각성 상태에 돌입하면 은하는 인간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공격력과 방어력이 기존의 몇 배나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고작 10분이 한계야.’
또한 상대가 강적이면 강적일수록 소모하는 마력은 커지고, 각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짧아진다.
만일 제주도에서 데바를 상대할 때 각성 상태에 돌입한다면, 예상컨대 유지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한라산을 폭파시킬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놈이다.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해.’
그러니 은하에게는 보험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번에 해금된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였다.
시스템이 이것을 알렸을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확인해 보니 ‘아세팔리’가 해금되면서 새로운 액티브 스킬 ‘머리 없는 인형(Headless Marionette)’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도저히 가늠이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세팔리? 머리 없는 인형? 음…….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스킬인데…….」
루시도 스킬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든가.’
은하는 여러 가설을 생각하고 모의 전투를 이어 가며 실험해 보았지만, 지난 7일간 새로운 스킬의 사용법에 대해 얻은 점은 전무했고 그것이 더 그녀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저 은하의 컨디션이 걱정인 시우는 그녀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곧 본부에 헤드 헌터가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쉬시는 게 어떨까요?”
「조금만 더 부탁할게. 준비가 필요하면 먼저 올라가 있어. 시간에 맞춰서 나도 그리로 갈 테니까.」
은하가 이렇게 나오면 시우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시우는 결국 은하 앞에 또 다른 몬스터를 생성해 주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움직임. 흑염이라는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단순히 신체 능력만으로 적을 압도할 만큼의 실력.
적어도 시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여태 보아 왔던 그 어떤 헌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전투력이었다. 심지어 루시 때문인지, 시우가 기억하던 때보다 은하는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은하는 부족하다는 듯이 힘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엇이 은하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역시 마에스트로의 죽음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무언가 찌릿, 가슴을 스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유리창 너머의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는 가슴을 스친 이상한 감각을 무시하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10시까지는 회의실로 와 주세요. 9층입니다.”
전투에 몰두 중인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우는 이후에도 몇 초간 그녀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휙 등을 돌렸다.
“가십니까, 마스터.”
“그래. 훈련이 끝나면 네가 직접 9층 회의실로 선배를 안내하도록.”
그렇게 유유히 훈련실을 빠져나오려던 시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제어실 담당자에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대 몬스터의 설정 체력 수치를 조금 줄여 놔. 선배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리해서라도, 은하가 조금이나마 더 쉴 수 있도록.
* * *
오후 9시 54분.
늑대 길드 본부 9층, 특별 응접실에 도착한 시우는 당황한 나머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왔군.”
시우를 보며 손을 한 번 쓱 들어 보이는 남자는 정돈되지 않은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머리 스타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왼쪽 얼굴을 뒤덮은 기이한 문양에 껄렁껄렁한 태도. 이탈리아 출신의 헤드 헌터 5위, 뮤턴트였다.
“이곳이 당신 길드인가? 한국 최고의 길드라는 말은 진짜였나 봐. 이탈리아에도 이 정도 커다란 본부를 가진 길드는 없는데, 솔직히 좀 놀랐어.”
옷깃에 통역 배지를 부착한 그는 시우에게 괜스레 친한 척을 하며 어깨동무를 했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군.”
탁. 가볍게 뮤턴트의 손길을 쳐 낸 시우가 그를 지나쳐 저벅저벅 응접실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여인, 캐나다 출신의 헤드 헌터 4위 발키리, 그리고 심안 은유엘과 눈이 마주쳤다.
시우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아무래도 초대에 응한 헤드 헌터는 이 세 명뿐인 것 같았다.
‘전원 출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작 세 명이라니.
예상보다도 적은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