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포츈텔러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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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포츈텔러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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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포츈텔러의 요구
2023.04.12.
다음 날, 은하는 시우가 낡은 지하 훈련소를 손볼 동안 다른 일정을 처리하기로 했다.
「여기는 호텔이잖아.」
은하의 품에 안겨 있던 루시가 낚싯줄 같은 수염을 씰룩이며 턱을 들었다.
「언니, 호텔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거야?」
“사람을 좀 만나러.”
「진짜 진짜 크다! 성 같아! 저기에는 도대체 몇 마리의 생선이 있는 건지 궁금해!」
루시가 품 안에서 꺅꺅 소리를 지르더니 눈을 별처럼 반짝였다. 저도 모르게 힐끗 주변을 살핀 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슬쩍 몸을 숨겼다.
“루시, 외출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바깥에서는 되도록 말을 아끼는 게 좋겠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을 하는 인형은 상당히 이목을 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고양이 인형을 보고 조디악이라고 눈치채지는 못하더라도 불필요한 시선을 받아 좋을 것은 없다.
「아, 맞다. 그랬지.」
루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진짜 인형으로 돌아가기로 한 듯 온몸을 축 늘어트렸다.
곧이어 띠링, 하고 알림음이 귓가를 울렸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그럼 이런 식으로는 말을 걸어도 되냐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이거라면 괜찮겠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까.”
루시가 신수화(化)하여 시스템에 속한 동안, 육체 역할을 하던 고양이 인형은 평범한 인형이 되었는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은하는 그것을 품에 안은 채 으리으리한 호텔 내부에 들어섰다.
* * *
은하가 방문한 호텔은 여의도에서 가장 큰 호텔로, 녹스 말에 따르면 현재 GIA는 그곳의 최상층에 해당하는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앉아요.”
GIA의 멤버, 포츈텔러 안드레아는 은하에게 서재 겸 응접실 의자를 빼내 주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얘는 남자야, 여자야? 하며 중성적인 외모를 한 상대의 성별을 궁금해합니다.]
은하는 루시를 품에 안은 채 안드레아가 준비해 준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녹스를 통해 은하가 방문할 것을 미리 전해 들었던 모양인지,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 위에는 따듯한 홍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드레아는 곧장 맞은편에 앉지 않고 손가락 위에 있던 흰 새를 창가의 새장 속에 넣었다.
“착하지, 윌리엄. 답답하겠지만 잠시 들어가 있어.”
그러자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은하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새 이름이 윌리엄인가요?”
“네, 요한이 지어 준 이름이죠.”
은하는 새까만 눈을 움직여 새장 속 흰 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윌리엄. 이전에 이준이 키웠다는 개의 이름이 분명했다. 결국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은하에게 미용을 시켜 주겠다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은하의 주먹에 살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백이준에 대한 일은…….”
“사과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라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된 건 당신 탓이 아니니까요.”
달칵.
새장을 닫은 안드레아는 은하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휘저었다.
그렇다. 마에스트로의 죽음은 흑염의 프린세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를 막지 못했던 안드레아 자신의 탓이라면 모를까.
“나와 녹스를 포함한 GIA의 멤버 중,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도 그랬을 테고요. 그러니 사과는 됐습니다.”
찻잔에 각설탕을 두 개 넣은 그는 티스푼으로 느릿하게 잔을 휘저었다.
달그락달그락…….
잔과 스푼이 부딪히는 소리에 새장 속 흰 새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은하는 찻잔에 손을 뻗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떨구지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 고정된 자세를 유지했다.
“내가 당신의 방문 요청에 응한 이유는, 당신의 각오를 듣기 위해서예요.”
각오. 안드레아의 말에 은하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GIA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요한과,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모여 만든 비밀 기구랍니다.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 조금 덜 슬퍼도 되는 세상을 위해서였죠. 하지만 요한이 그러더군요. 사실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건, 당신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고요.”
홍차로 살짝 입술을 축인 그는 달칵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잔을 내려 두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웃고 있지 않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오히려 오랜 동료를 잃기까지 했다.
은하는 아직 웃을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출 겁니까?”
뜨거운 홍차 위로 일렁일렁 흔들리는 증기 너머, 안드레아의 시선이 화살촉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은하를 관통했다.
“아니요, 절대.”
은하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러자 줄곧 굳어 있던 안드레아의 표정이 그제야 얼음이 녹듯 서서히 풀렸다.
그대로 의자에 살짝 등을 기댄 안드레아는 찻잔을 거머쥔 채 자신의 능력인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 능력은 현안입니다. 미래를 볼 수 있어요. 모든 것을 다 내다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인류의 존망이 걸린 큰 재앙일수록 ‘보일’ 확률이 높답니다.”
“들은 바로는 이번 백색 성에 대한 예언도 각국의 헌터 협회에 전달하셨다고요.”
“역시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현안을 통해 본 내용이죠.”
현안을 개안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더라면 보다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굳은 얼굴을 한 안드레아는 손에 쥐고 있던 찻잔 겉면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사실은…… 한 가지, 세간에는 전달하지 않은 내용이 더 있습니다.”
찻잔을 휘젓던 은하가 얼핏 시선을 들었다. 안드레아는 어느새 두 손을 비운 채 똑바로 은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난 당신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싸움으로 목숨을 잃을 겁니다.”
경고나 위협, 혹은 우려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담담한 ‘전달’이었다.
안드레아는 은하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지는 않지만, 이준이 이야기하는 그녀를 오래도록 들어 왔으므로.
그리고 안드레아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렇습니까.”
은하는 안드레아만큼이나 담담한 어조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을 생각이신 겁니까?”
“네.”
안드레아는 실감했다. 1세대 헌터 출신인 그녀는 언제나 죽음 곁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연기라 해도 저렇듯 평온한 얼굴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중, 은하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거죠?”
“그 후는 어떻습니까?”
“……네?”
“제가 죽고 나서는, 어떻게 되죠?”
은하의 물음에 안드레아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런 걸 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죽고 나면, 글쎄요. 아마 세상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겠죠. 그 평화가 영원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신의 죽음으로 조디악의 침공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은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네요.”
다행…… 이라고?
안드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국 닫힌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난 방금 당신이 죽을 거라고 예언했어요. 두렵지 않나요?”
“그랬던 적도 있었죠.”
짧게 답한 은하가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내가 두렵다고 해서 도망치게 되면 무엇이 바뀌는가요.”
그 한마디로, 안드레아는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느 정도 그려졌다. 아니, 아마도 그녀가 걸어왔던 길은 그가 상상하는 이상일 것이다.
“내가 죽어서 해결될 일이라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내 힘은 그걸 위해 있는 거니까.”
단조로운 어조로 그리 말한 은하는 창가에 놓인 새장 쪽을 바라보았다.
흰 새, 윌리엄이 마치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듯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런 윌리엄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눈이 아주 희미하게 휘었다. 그것은 안드레아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금방 놓쳐 버릴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가로로 길게 트인 눈매에 은하 특유의 무심한 눈빛 탓에, 평상시에는 조금 화난 것처럼도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저렇게도 웃는구나.’
안드레아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은하의 옆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커튼이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 새의 지저귐. 따듯하고 향긋한 홍차에 스푼이 달그락, 부딪히는 기분 좋은 금속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 가운데 은하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방금 전 제가 죽을 거라는 예언을 들은 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드레아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현안이 왜 그녀를 영웅으로 비추었는지. 또한 어째서 이준은, 요한은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이미 그녀는 영웅이었다. 오래전부터.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동안 은하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안드레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감겨진 눈꺼풀 뒤로, 그가 보았던 이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감겨 있던 안드레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길게 말끝을 늘어트린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살짝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륵 풀고 은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세상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재앙에는 희생이 따른다.
알고 있다.
요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한은─.
‘내가 바꾸고 싶었던 건, 은하의 세상이야.’
“……나는 원래 당신이 죽을 거라는 예언을 전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인간이라는 건 원래 그렇거든요. 자신이 죽을 걸 알게 되면 지레 겁먹기 마련이니까. 가던 길도 멈추고 돌아가게 되죠. 그게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왜 내게 그 예언을 전했죠?”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하니까.”
작게 대답한 안드레아가 윌리엄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것이 요한이 바라던 일이었으니까요.”
안드레아는 결국 이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이 힘은 그를 위해 쓰기로 그때 맹세했으니까.
그가 원하는 세상이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내가 원하는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쓴 미소를 머금은 안드레아는 윌리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은하를 바라보았다.
“죽을 각오로 살아왔겠지만, 이번에는 살아남을 각오로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합니까?”
그건 은하에게 상당히 어려운 요구였다.
살아남을 각오로 싸우라니.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힘을 각성한 이후,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선을 넘고 앉았네! 하며 호통을 칩니다.]
[우리 언니는 당연히 안 죽지, 왜 그런 불길한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어이가 없다는 듯 상대를 쳐다봅니다.]
[걱정하지 마, 언니!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불길한 별도 함께인 이상, 언니가 죽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가슴을 팡팡 두드리면서 호언장담합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연속으로 시끄럽게 울려 대는 알림음에 더해지는 시우의 목소리.
‘무너지지 말고 선배의 길을 가 주십시오.’
‘내가 돕겠습니다.’
은하는 자신의 목 언저리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목에는 자신의 것 대신 이준의 황금색 군번줄이 걸려 있었다.
손가락 끝에 금속의 감촉이 닿는 순간 은하는 스르륵 입을 열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러자 짐짓 굳은 채 대답을 기다리던 안드레아는 처음 만났을 당시처럼, 소년처럼 다정하고 천진한 미소로 화답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 *
그날 밤, 늑대 길드 본부의 지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제어실에 앉은 시우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은하는 흑염의 프린세스 세트를 입은 채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모습이었다.
「그래, 부탁해.」
저 너머에 있는 은하의 목소리는 근처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대로 스위치를 누르려던 시우의 눈동자에 잠시 망설임의 기색이 스쳤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지금 그가 스위치를 누르면, 이곳에는 레벨 90 이상의 몬스터가 세 마리나 나타날 것이다.
아무리 홀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을 상대하는 동안 소모하는 체력과 마력은 진짜일 터. 더군다나 상대 몬스터가 홀로그램이기 때문에 설정된 점수를 달성하거나 스위치를 끄지 않는 이상 지치지 않고 재생될 것이다.
더불어 은하는 이러한 모의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으므로 힘을 제어하는 것에 요령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레벨 90 이상 몬스터로 설정해 달라는 은하의 요구가, 시우는 썩 내키지 않았다.
“이건 실전과는 또 다른 형식의 전투입니다. 혼자서 레벨 90 이상 몬스터를 세 마리나 잡는 건 본래 초심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방식이라.”
「괜찮아, 신시우.」
은하가 카메라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를 통해 비치는 그녀의 눈이 미약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