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태초의 별
(254/306)
254. 태초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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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태초의 별
2023.04.11.
“─그렇게 된 거야.”
은하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시우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소파 위에 앉은 까만 고양이 인형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형태를 하고 있는 주제에 마치 인간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꼬리로 소파 표면을 탁탁 두드리는 모습은 시우로 하여금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럼, 저 인형 안에 조디악이 깃들어 있다는 거군요.”
“그래.”
윤기 나는 까만 털에 황금색 눈동자. 양쪽으로 길게 뻗은 수염에 쫑긋 솟은 두 개의 귀.
목에 걸린 보랏빛 리본은 은하가 매 준 것인지 원래 있던 장식인지는 몰라도, 중앙에 노란 방울이 달려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고양이 인형을 관찰하던 시우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선배는 저 조디악, 쌍아궁과 계약을 했고, 시스템은 쌍아궁을 13번째 신수 ‘고양이’로 인식하고 있고요.”
“응.”
“쌍아궁이 고양이 인형에 깃든 것은 그것 때문입니까?”
시우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은하가 아닌 소파 위 고양이 인형…… 아니, 루시였다.
「원래 인형은 너무 낡아서 취향대로 외모를 조금 바꿨어.」
휙! 도도도…….
소파에서 뛰어내린 루시는 재빨리 다가와 은하의 무릎 위에 폭, 하고 앉았다.
「그런 지저분한 모습으로는 매. 일. 밤. 언니 옆에서 잘 수 없으니까.」
루시가 보란 듯이 입을 찢어 히죽 웃어 보이자 시우의 가지런한 눈썹이 움찔 떨렸다.
다만 시우는 저런 작은 인형의 도발에 넘어갈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속내는 어찌 됐건 표면적으로는 냉정을 유지한 채였다.
“그렇다면 측정기가 오작동 했던 것도, 시스템이 선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도 설명이 되는군요.”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얻은 것치고는 이해가 빠르군, 인간. 보기와는 달라서 놀랐어.」
“루시, 조용히 해.”
「…….」
은하의 한마디에 루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귀가 축 처진 것이 조금 토라진 모양이었다.
은하는 제 무릎 위에 올라온 루시를 땅에 내려 두었다. 딸랑……. 구슬픈 방울 소리가 울렸다.
“에단, 루시를 잠시 돌봐 줘.”
“그럴까?”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에단이 힐끔 이쪽을 쳐다보자 루시가 펄쩍 뛰었다.
「시, 싫어! 저자는 날 잡아먹을 거야! 조용히 있을 테니까, 보내지 마!」
으, 으아아…….
깜찍한 비명과 함께 루시와 에단이 멀어졌다.
에단은 거실 쪽 소파에 앉아 루시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쭉쭉 늘리며 놀았다. 은하는 그쪽을 힐끔 쳐다볼 뿐 딱히 에단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에단이 루시를 죽이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일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면 은하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
오히려 인형에 깃들고 나서부터는 은근히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방식이 조금 짓궂긴 했지만 말이다.
소파 쪽의 에단과 루시의 양상을 지켜보던 시우는 다시 은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저 고양…… 쌍아궁은 인형의 몸을 빌려서 현신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래, 온전한 모습으로는 언노운 게이트에서 나올 수 없었으니까. 대가가 필요했거든.”
“대가요?”
은하는 시우에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첫 만남 때에는 그 대가로 은하의 이름을 요구했던 고양이지만, 이번에는 인형에게 육신을 빌리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런 방법도 있다며 힌트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에단이었다.
“그렇군요.”
모든 설명을 들은 시우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제 신수가 선배에게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네 신수가?”
“네.”
시우의 신수라면 분명 12신수 중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였다. 그가 개의 화신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시우의 신수는 일찍이 내게서 특이한 기운을 느꼈던 거야.’
개는 특별히 후각이 발달한 신수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상한 점은 시우였다.
“그런데 왜 날 의심하지 않았지?”
자신의 신수가 그런 발언을 했더라면, 시우의 입장에서는 묘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테다.
“그때는 조디악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데다 신수 중에는 고양이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선배는 워낙 오랫동안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었잖습니까. 여러 냄새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야수형 몬스터의 냄새가 엉겨 붙은 것이라 치부했습니다.”
애초에 시우는 신수의 말을 귀담아듣는 편도 아니었다.
이후 은하와 신뢰 관계가 쌓이고 난 뒤부터는 그녀를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조디악이 신수가 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하군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
에단의 손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던 루시가 은하 대신 대꾸했다.
「조디악이든 신수든 어쨌든 뿌리는 같은 거니까.」
“뿌리?”
「신수와 조디악은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계기로 눈을 뜬 인외 존재야.」
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루시는 가볍게 거실 바닥에 착지하더니 다시금 은하와 시우 쪽으로 총총 걸어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디악과 신수. 루시의 말에 따르면 두 쪽 다 원래는 전설로만 남았어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전설은 인간이 가지지 못하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데, 그 대신 인간 세상에 현존(現存)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 금기를 최초로 깬 ‘전설’이 바로 태초의 별, 백양궁과 금우궁이야.」
기분 탓일까, 루시의 눈이 힐끔 에단을 향했다. 하지만 지금 시우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깼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시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루시는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라며 투덜대면서도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태초의 별은 금기를 깨고 다른 차원, 즉 인간의 세상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차원마다 각기 다른 ‘전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은하의 차원에 존재하는 12신수 같은 존재들 말이다.
「금우궁, 데바는 다른 전설들에게 개입을 받지 않기 위해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불평등한 질서를 만들었어.」
시스템은 각 차원을 채널(Channel)이라는 명칭으로 나누었고, 각 채널에 존재하던 ‘전설’들은 그 시스템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스템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된 건 신수뿐만 아니라 조디악도 마찬가지야. 조디악이 네뷸러 바깥으로 이동할 수 없는 건 시스템 때문이거든. 물론 일련의 귀찮은 과정을 거치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일련의 과정이라면?”
「저거.」
루시가 핑크 젤리를 들어 TV를 가리켰다.
TV 화면에서는 한창 제주도 사변에 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모니터에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백색 성. 한라산이 있던 곳에 나타난 그 기묘한 건물이었다.
「어떤 채널에 12개의 탑을 세우고, 저 백색 성을 완성하면 그 채널은 우리가 있던 채널과 동기화돼. 그러면 조디악은 이쪽에서도 현신이 가능해져.」
“…….”
“…….”
은하와 시우는 TV 화면 속 백색 성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데 이 채널은 다른 채널이랑 조금 다르더라고.”
이번에는 루시가 아닌 에단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은하와 시우의 시선이 그에 닿자, 소파에 걸치듯 기대 있던 에단이 슬쩍 상체를 세우더니 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구부정히 턱을 괴었다.
“데바 녀석도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거지. ‘전설’이 인간들에게 권능이라는 걸 나눠 줬으리라고는.”
그래서 이번 계획에는 상당히 애를 먹는 것 같아 보이더라. 에단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TV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던 은하가 스르륵 입을 열었다.
“만일 신수가 조디악처럼 현신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조디악에 필적하는 힘을, 인류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은하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에단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건 무리야.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이쪽 채널의 ‘전설’이 현신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만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수들이 조디악과 맞서 싸울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기도 하고.”
“왜지?”
“조디악도 그렇듯이 신수 역시 제멋대로거든.”
전설이라는 건 그래. 선악이랄 것도 따로 없지. 에단은 빙그레 웃었다.
즉, 결론은 신수의 힘을 빌리는 건 힘들 거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 시우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군.”
시우의 푸른 눈이 에단에게 향했다. 그를 중심으로 맴도는 공기가 서서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 시우는 지금 에단에게 극명한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 나 말이야?”
에단이 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지. 내가 그 ‘태초의 별’ 중 하나니까.”
“……!”
휘익!
단숨에 은하와 에단 사이를 가로막고 선 시우는, 은하를 감싸듯 그녀 앞에 척! 하니 팔을 뻗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의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시우는 아직 에단이 조디악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으니. 은하는 지금 당장 에단을 공격할 기세인 시우를 말렸다.
“괜찮아, 신시우. 에단은 우리와 목표가 같아.”
“……네?”
시우는 은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아니, 그보다 선배는 알고 있었던 건가? 언제부터?
“에단은 조디악에서 돌아섰어. 적이 아니라는 소리야.”
그리 말한 은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시우의 팔을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시우는 은하가 그러는 대로 팔을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표식이 없었던 거지?”
이전에 시우는 에단과 사우나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에단의 알몸을 보았는데, 신체 어디에서도 조디악의 표식인 별자리 문양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샅샅이 뒤져 보지 않았던 거겠지. 지금이라도 다시 살펴보겠어?”
입고 있는 티셔츠의 목 부분을 주욱 늘린 에단이 능글맞게 웃었다.
“여기서 벗어 줄 수도 있는데.”
그러자 시우의 얼굴이 더는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사양하지. 네 벗은 몸을 두 번씩이나 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 아쉽네.”
에단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했다.
시우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에단이 적이 아니라는 은하의 말을 믿기는 했지만 그가 믿음직스럽지는 못한 눈치였다.
시우를 따라 다시 자리에 앉은 은하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는 큰 조력자가 생긴 거나 다름없어. 루시와 에단은 조디악의 능력이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야.”
시우 역시 제주도가 눈 깜짝할 새 침몰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그게 가능한 자라면, 아마 상상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태 상대해 본 적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상대할 일이 없을 만큼의 강적.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협회 쪽 상황은 어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듯합니다. 앞으로 길어야 한 달이겠지만요.”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의 주장으로는 나머지 탑들이 전부 빛나기 시작할 때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은 소요될 거라고 하지만, 만일 그 전에 탑이 이상 현상을 보인다면 그들에게 남은 기한은 조금 더 짧아질 테니까.
“최대 한 달…….”
되뇌듯 중얼거린 은하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한. 그동안 데바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정도의 힘을 키워야 했다.
“우선 헤드 헌터들이 다음 주 중에 방한할 예정입니다. 몇 명이나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그들을 만나서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고 계획을 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시우의 말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헤드 헌터와의 회의가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어떻게 힘을 키울지, 바로 그것이다.
‘단시간에 실력을 일취월장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실전 경험을 쌓는 일이야.’
하지만 은하 정도 수준이 되면 B급 이하의 게이트에 투입되어 봤자 경험치다운 경험치를 얻을 수 없었다. 최소 A급, 가능하면 S급 이상의 게이트에서의 실전이 필요했다.
다만 남은 시간은 한정적인 만큼, 언제 출현할지 모르는 A급 이상의 게이트를 주야장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문득 은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신시우.”
은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에 갔던 그 지하 훈련소 말이야. 아직 쓸 수 있다고 했던가?”
“……? 네, 조금만 손을 본다면요.”
은하는 잠시 망설였다.
그곳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실전에 가까운 전투를 빠른 시간 내에 반복하여 경험치를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시우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악몽을 일깨우는,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시우에게 그곳을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과연 옳을까.
그런 은하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던 걸까, 시우가 비스듬히 한쪽 입술을 올렸다.
“필요하십니까?”
“……빌릴 수 있을까 해. 물론 너만 괜찮다면.”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시우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기계에 이상이 있지 않은 한, 내일 하루 손을 봐 두면 이틀 뒤부터는 바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네.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힘이 닿는 한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그 장소는─.”
“상관없습니다. 그 장소가 선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제게도 다행이니까.”
시우는 자신의 팔뚝을 살짝 감쌌다. 옷에 가려져 있어서 겉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온 살갗에는 아직도 흉터가 셀 수 없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각성자에게는 자가 치유력이라는 것이 생긴다.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소리였다.
자가 치유력은 각성자의 능력치가 향상될수록 함께 상승한다.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헌터일수록 회복력이 빠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우는 어린 나이에 개의 화신이 되었고 일찍이 S급 반열에 오른 헌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토록 몸에 많은 상처가 남았다는 것은…….
‘자가 치유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잦게, 그리고 깊게 상처를 입기를 반복했던 거야.’
혹은 자가 치유력을 얻기 전, 그러니까 각성하기도 전부터 고된 훈련을 받아 왔다거나.
어느 쪽이든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었을 테다.
그런데도 시우는─.
“그곳이 선배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도 그곳을 덜 꺼림칙하게 여기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해 놓고는 조금 쑥스러웠던 걸까, 그는 “그러니까 제 말뜻은…….” 하며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선배는 다른 사람을 잘 의지하지 않으니까요. 제게 그런 부탁을 해 주셔서 기쁘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은하는 괜스레 옷깃을 만지작대는 시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고마워, 신시우.”
그러자 허공을 유영하던 푸른 시선이 은하에게 닿았다. 시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별말씀을요.”
시우는 답지 않게 쭈뼛쭈뼛하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걸린 귀가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
“…….”
거실 쪽 소파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에단과 루시의 눈이 동시에 가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