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3. 이리 와, 루시 (253/306)


#253. 이리 와, 루시
2023.04.10.


에단에게 양산을 겨눈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은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바위를 말이다.

불행히도 은하가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고 있는 도중이었다. 저 바위에 깔리게 되면 운이 나쁘다면 즉사, 운이 좋아도 중상일 것이다.

‘어떡하지?’

아니,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양산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에단에게로 빠르게 뻗었다.

타악─!

“……?!”

에단이 강한 힘에 의해 밀려났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을 들어 눈앞의 상황을 파악했다. 은하는 순간적으로 에단을 밀쳐 내고 혼자 바위에 깔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에단의 표정이 일순 무섭게 굳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그곳을 덮치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고양이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안 돼! 언니!”

그런데.

“…….”

투둑, 툭─

부서진 돌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겹쳐진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했어야지. 지금의 네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거든.”

에단이 오른쪽 팔로 단단히 은하를 끌어안은 채, 나머지 왼팔을 휘둘러 바위를 부숴 버린 것이었다.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나직이 속삭인 에단은 왼손을 뻗어 은하의 머리카락에 걸린 돌 파편을 스르륵 떼어 내었다.

붉게 부어오른 그의 왼팔에는 바위 파편이 다닥다닥 꽂혀 있었다. 에단은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른팔로 휘감았던 은하를 서서히 풀어 주었다.

“네 맘대로 해.”

“……뭐?”

은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정도 힘이라면 내 가호는 필요 없겠네.”

에단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왼팔을 가볍게 털어 내더니 고양이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니 저건 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러더니 에단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아 팔에 박힌 돌 파편들을 툭툭 빼내기 시작했다. 태도만 보아서는 고양이를 죽이는 것을 정말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은하는 곧장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에단을 빤히 살피며 그 속내를 살폈다.

‘방금 에단은 고양이를 죽일 수 있었어.’

바위가 떨어지기 직전, 은하는 어리석게도 한순간 방심했다. 에단을 겨누고 있던 양산에 힘을 풀었고, 그를 감시하던 시선을 들어 천장을 살폈다.

그 찰나의 순간, 만일 에단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제게서 단숨에 벗어나 고양이의 목을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에단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왼팔로 바위를 부수면서까지 은하를 감쌌다.

단순한 변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 전에도 에단은 단 한 번도 은하를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에단의 속내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역시 적이 아니라고, 은하는 생각했다.

“…….”

양산을 쥐고 있는 손에 서서히 힘을 뺀 은하는 고양이가 있는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많이 놀랐는지 황금색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져 있었다. 은하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그 애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자, 루시.”

그리고 흙이 묻고 생채기가 가득한 손을 살며시 뻗었다.

“언니랑 같이.”

“…….”

은하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루시의 눈동자에 무언가 투명한 것이 울컥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루시는 작고 오동통한 손을 서서히 뻗었다.

크기가 다른 두 손이 비로소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그들 주변으로 환한 빛이 일었다. 그동안 은하에게 깃들어 있던 빛, 루나가 마지막으로 전한 바로 그 빛이 부드럽게 뻗어 나가 루시를 감싼 것이었다.

루시는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 루시.」

언니의 목소리였다.

* * *

대한민국 헌터 협회.

“제주도의 80% 이상이 가라앉았다네. 한라산에 나타난 백색 성의 높이가 점점 높아질수록 제주도는 빠른 속도로 침잠하고 있어. 비교적 안전했던 서쪽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동쪽과 별반 다를 바 없지.”

보고서를 훑어보던 협회장 고대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협회장실의 하얀 벽에 가로로 긴 빗금을 그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은 두 잔. 대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우는 그중 한 잔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주도민의 피난 작업은 어떻습니까?”

“그쪽은 순조롭네. 늑대의 조력 덕분에 경상남도에 대피소를 많이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팔락─

대윤이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더니 시우 앞에 탁, 하고 내려 두었다.

“보다시피 어젯밤 이집트의 탑이 빛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거든. 매스컴의 입을 틀어막고는 있지만 며칠 가지 않을 걸세.”

커피 잔에 입술을 가져간 시우는 테이블 위 보고서를 향해 푸른 시선을 힐끔 옮겼다.

“그렇겠죠. 이미 지금쯤 목격자들을 통해 SNS상에서 퍼지고 있을 테니까요. 저도 봤습니다. 그 사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오늘 아침, GIA의 포츈텔러가 전 세계 헌터 협회를 상대로 비밀리에 예언을 전해 온 것도 알고 있는가.”

“……예언, 말씀이십니까?”

커피를 호로록 삼키던 시우가 표정을 달리했다. 그건 시우도 전해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남은 모든 탑들이 빛나게 되면 제주도에 나타난 백색 성이 완성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재앙이 시작되리란 내용이지. 당시 제주도에 파견되었던 용병들이 목격했다는 정체불명의 남자…….”

“데바요.”

“그래, 데바는 ‘성이 완성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던데. 포츈텔러의 예언과 데바의 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네.”

거기까지 말한 대윤은 양손을 테이블 위에 두고 무거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

“성이 완성되기 전에 놈을 쳐야 한다는 소리야.”

“……흑염의 프린세스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시우는 대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윤이 구태여 빙 둘러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역시 이야기가 빠르군. 그러하네.”

대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은하는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데바와의 전투 전 반드시 그곳에 들러야만 한다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와서 전달해 주기로 했다.

그게 벌써 3일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대윤은 지금 당장이라도 흑염의 프린세스를 불러오라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국민들의 불안이 점점 심화되고 있어. 한 달 사이 이민자 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고 있나? 더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정부와 협회의 발 빠른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야.”

“하지만 그녀가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간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텐데요.”

보고서에서 시선을 뗀 시우는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지금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기도 하고요.”

“자리를 비웠다고? 지금이 어느 시국이라고 헤드 헌터 1위가 경솔하게 자리를 비운다는 소린가?”

대윤이 탁! 하고 테이블을 크게 내리쳤다. 시우의 눈빛이 일순 싸늘하게 가라앉았지만, 표정만은 무너뜨리지는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경솔하다는 건?”

“그녀도 뉴스나 인터넷 기사 정도는 보고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지. 지금 당장 제주도로 넘어가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 백랑?”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협회장께서는 그녀를 제주도로 보내 무슨 일을 시킬 생각입니까?”

“그야…….”

협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시우의 눈빛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지금 제주도가, 아니 그 백색 성 내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 협회도 정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 정보도 없는 지금 상황에, 단순히 실력 있는 헌터들을 그곳에 투입시킨다고 한들 도대체 무엇이 나아진다는 겁니까.”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말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헌터들을 제주도로 밀어 넣어 봤자 무고한 희생이 늘어날 뿐이다. 협회도, 정부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들은 모니터를 통해서 제주도의 모습을 일면만 지켜봤을 뿐, 직접 겪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참 우스운 일이다. 게이트가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난 때로부터 30년 이상이 흘렀는데, 이래서야 각성자를 강제로 징집하고 전장에 내몰았던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백랑, 헌터는 평화의 상징이네. 특히 흑염의 프린세스는 헤드 헌터 랭킹 1위가 아닌가. 그녀가 참전한다는 기사 하나만 떠도 국민들의 불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잠잠─.”

탁!

이번에는 시우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시우의 손바닥 주위로 파스스, 새하얀 한기가 피어올랐다.

“직접 그 상황을 목격한 것도, 타파해야 하는 것도 헌터들입니다. 볕 잘 드는 책상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당신들이 아니라.”

“…….”

그 순간 대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새파랗게 젊은 헌터 앞에서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힐끗 시우의 커피 잔을 확인하자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던 그것이 순식간에 식기라도 했는지 살얼음이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목숨을 거는 입장입니다.”

대윤은 다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방금 전 언행이 거짓이었다는 듯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확실한 계획과 최소한의 성공 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은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헌터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니, 단연 저희 입장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른 대윤은 의자 쿠션에 등을 기대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자네가 말해 보게. 어떡하면 좋을지.”

“현재 헤드 헌터들을 소집해 둔 상태입니다. 다음 주 중에는 방한할 예정이고요. 망치 길드에 대량의 아이템 제작을 의뢰해 두기도 했으니, 뚜렷한 계획을 세우는 건 그 후가 되겠죠. 누누이 말씀드렸듯 지금 상태에서 계획을 세우는 건 무의미합니다.”

“흠…….”

대윤은 고심하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물론 탑이 전부 빛나기 전에는 제주도로 향할 생각이긴 합니다. 일정은 저희가 알아서 조율할 거지만. 정부에는 피난민들의 관리만 부탁해 두십시오. 거기까지는 여력이 닿지 않으니.”

“그럼 당장 제주도 수색 작업은?”

“늑대만으로 부족합니까?”

“……지금은 부족하지 않네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 않나.”

“이후 부족하게 되면 다시 말씀해 주시지요. 그때 인원을 채워 놓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문고리를 잡기 전, 우뚝 멈춰 선 시우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에게 경솔하다느니 무책임하다느니 말씀하신 건, 말실수였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럼. 시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협회장실에 남은 것은 식다 못해 살얼음이 동동 뜬 커피 잔과, 멍한 얼굴의 대윤뿐이었다.

“배, 백랑 님, 모시겠습니다!”

“필요 없어.”

협회장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는 협회 요원들을 무시하고, 시우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하아.”

차에 올라탄 뒤 핸들을 쥐는 순간 시우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 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각 국가의 상부는 헌터를 도구처럼 알고 있는 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국민들의 불안이 심화되고 있느니 어쩌니 하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국민들은 거실에 앉아 TV를 통해 재난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는 전장에서 파리처럼 목숨을 잃는 헌터를 보며 약하다느니 쓸모없다느니 키보드로 평가를 내릴 것이다.

‘정작 일이 터진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헌터들에게 의존하겠지.’

그리되면 협회와 정부는 국민들의 눈치를 살피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 헌터들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제주도에 쏟아부을 것이고 흑염의 프린세스는, 선배는 헤드 헌터 1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선두에 서게 될 것이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그들에게 있어 최적의 장기짝이다.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다른 헌터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그녀의 참전만큼 효과적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시우는 좁아진 미간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들었다.

‘최대한 시간을 벌고, 할 수 있는 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

선배를 말릴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지금은 아무 준비도 없이 게이트에 던져졌던 30년 전과는 시대가 다르다. 헌터들에게도 그만큼의 경험과 지혜가 쌓였으니까.

‘다음 일정은…….’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시우의 눈빛이 사뭇 변했다.

신착 메시지 1건. 은하로부터였다.

메시지 내용을 읽은 시우는 곧장 액셀을 밟고 은하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 * *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있지 않아 은하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빨리 왔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오피스텔 내부로 들어선 시우는 신발을 벗기 위해 슬쩍 상체를 숙였다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오호, 이 인간은 또 오랜만이군.」

신발장 앞에 떡하니 선 채 다소 오만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것은─.

‘……고양이 인형?’

시우의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눈앞의 이건 분명 솜이 빵빵하게 들어간 봉제 인형이었다. 그것도 무릎까지도 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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