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 충돌 (251/306)


#251. 충돌
2023.04.08.


은하는 고양이를 감싼 자세를 유지한 채 양산을 똑바로 쥐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휘며 웃는 에단이 흙먼지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이냐는 은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짧게 입을 열었다.

“비켜, 은하.”

“무슨 짓이냐고 물었어.”

그러나 에단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어서 비켜. 너까지 다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은 즉, 은하의 뒤에 있는 고양이를 다치게 할 생각은 있다는 소리였다. 은하는 고양이를 번쩍 끌어안고 뛰어올라 에단으로부터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여기서 움직이지 마.”

은하가 작게 속삭이자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나, 나는…….”

고양이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겁에 질린 듯한 눈빛으로 유추하건대 아무래도 에단이 누구인지 알아본 듯했다.

“괜찮아.”

은하는 그런 고양이의 머리 위에 툭 하니 손을 올렸다.

“착하지.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에단에게로 돌아섰다.

에단은 어딘가 삐딱한 눈초리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은하가 고양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섣불리 공격을 할 수 없는 까닭인 듯했다.

“거짓말을 한 거야?”

“거짓말?”

“이러려고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냐고.”

은하가 화를 누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짓말은 한 적 없어.”

따지고 보면 에단의 말은 진실이기는 했다. 에단은 은하를 고양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는 했지만, 그 외의 약속은 하지 않았다.

“난 데바 놈을 포함한 조디악을 말살시킬 거라고 분명히 말했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은하.”

그 순간, 에단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공식적으로는 그 녀석은 아직 조디악이니까.’

─분명 그랬다.

에단과 고양이, 아니 루시는 엄연히 다르다. 루시는 공식적으로 조디악에서 퇴출당한 것이 아니니 여전히 ‘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루시 역시 에단의 적에 포함된다는 소리였다.

지금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처치하기도 까다롭다. 그러니 죽이려거든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은하는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에단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

눈 깜짝할 새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순간 이동을 했다고 착각할 만큼 빠른 속도. 하지만 은하는 그가 어디로 움직였는지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

‘에단이 노리는 건 고양이야.’

그러니까 그가 나타날 곳은 높은 확률로─.

‘뒤……!’

부웅!

은하가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그녀의 예상대로, 에단은 정말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이미 고양이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그대로 고양이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그는 은하의 공격에 슬쩍 상체를 젖혀 그것을 회피했다.

에단의 붉은 두 눈에 얼핏 놀라움이 스쳤다. 그는 은하의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자신의 속도를 따라올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까닭이다.

사실 속도를 따라왔다기보다는 공격 경로를 예측한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휘릭! 탁, 탁!

가볍게 몸을 뒤로 꺾은 에단은 덤블링을 하듯 두세 번 정도 뛰어 거리를 만들었다.

은하는 양산을 바로 쥐며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도저히 무리일 정도는 아니지만, 에단의 속도를 따라가는 건 힘들어.’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모르지만, 체력이든 마나든 먼저 바닥을 보이는 건 은하 쪽일 것이 뻔했다. 그건 태생적인 문제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간 쌓인 전투 경험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억지로 상대의 속도를 쫓는 일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끝이 정해진 짧은 양초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피는 꼴일 테니까.

불행 중 다행인 건 에단의 표적이 고양이라는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고양이 주변만 경계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에단이 은하까지 공격해 오지 않는 이상은.

에단은 은하가 양산을 바로 쥐는 사이 재차 고양이에게 접근해 왔다.

부웅!

은하는 빈틈을 보이지 않고 또 한 번 크게 양산을 휘두르며 그를 위협했다. 물론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할 뿐, 은하의 양산에 에단이 부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그만둬, 에단.”

“너야말로.”

에단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빙그레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을 보며 은하는 깨달았다. 에단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라고.

“난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비켜, 은하. 이게 마지막 경고야.”

에단의 홍채가 서늘하게 빛났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 피부로도 느껴졌다.

그러나 진심인 것은 은하 쪽도 마찬가지였다. 은하는 허리춤의 리본을 스르륵 풀었다.

“말해 두지만 넌 이 애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들지 못할 거야.”

리본으로 대충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은하는 에단과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네가 날 쓰러트릴 생각으로 덤비지 않는다면 말이야.”

“…….”

“…….”

적막 속에서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바로 그때.

슈욱!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루시의 까만 머리카락이 화악 흩날리는가 싶더니 에단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단숨에 루시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쥘 기세로 팔을 뻗었다.

그 모든 것이 1초도 되지 않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아까와 같은 상황. 그러나 속도는 아까보다 빠르다.

뻐억!

놓치지 않고 따라붙은 은하는 에단의 팔목을 양산으로 내리쳤다.

손끝으로 타격감이 분명 전해졌으니 회피한 것은 아닐 테다. 일반인이었다면 팔뼈가 으스러지고도 남았겠지만,

“아야.”

에단의 경우 장난스레 툭 내뱉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다시 루시에게서 멀어진 에단. 은하는 단 한 순간의 접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와 루시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방금 전 타격 때문인지 에단의 오른쪽 팔꿈치가 반대 방향으로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에단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그것을 원상태로 끼워 맞추었다. 우드득, 관절이 맞춰지는 소리가 살벌한 반면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공격은 또 한 번의 시선 교환과 함께 다시금 이어졌다.

슈욱, 팟! 팟! 팟!

이후로는 일반 사람이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투가 이어졌다.

루시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나 때문에…….’

촤악!

날카로운 쇠붙이가 바람을 가르고,

슈욱, 퍽!

둔탁한 타격음이 왼쪽 귀를 때렸다.

‘또 나 때문에…….’

인형과 쿠션을 품에 가득 안은 팔이 덜덜 떨려 올 때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 너머로 조금 화가 난 듯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이지?”

루시는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으나, 에단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듯한 자세로 앉아 은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에단의 입매는 여전히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은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쓰러트릴 각오로 덤비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거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내가 어떻게 그래.”

“장난 같아?”

은하는 에단의 턱 끝에 날카로운 양산 끄트머리를 위협스레 겨누었다.

“…….”

“…….”

이후 잠시 대화가 단절되었다.

은하에게 고정되어 있던 에단의 붉은 시선이 문득 루시 쪽으로 힐끔 기울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 떨리는 순간, 은하는 에단에게 더욱더 가까이 양산을 겨누었다.

“허튼 생각 마.”

화르륵!

루시 주변으로 흑색 화염이 피어올랐다. 루시 주변을 동그랗게 두르고 피어오른 흑염은 마치 루시를 품에 안듯 부드럽게, 또한 접근을 허하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타올랐다.

그제야 에단의 입가에 줄곧 머물러 있던 미소가 스르륵 사라졌다.

“……왜 말리는 건데?”

에단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시선으로 물었다.

“저걸 죽이면 네 가호는 완전히 사라질 거야. 그럼 내가 더 좋은 가호를 네게 줄 수 있는데, 왜?”

에단은 그편이 은하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쌍아궁이 소멸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상 새로운 가호를 덧씌울 수 없는 노릇이니, 그만큼 번거롭고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달리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 필요 없어. 이 아이를 되찾으려고 한 건 가호 때문이 아니니까.”

에단의 눈동자에 의문이 스쳤다. 가호 때문이 아니라면 어째서? 마치 그리 묻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은하는 굳이 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에단, 넌 지금 나를 방해하고 있어. 그딴 식으로 봐주면서 싸울 거면 지금이라도 관두든가, 진심을 다해 싸우든가 어느 한쪽을 정해.”

양산을 거머쥔 은하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울끈 돋아났다.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 마.”

또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미약한 황금빛을 머금었다. 그 뒤에 숨은 저 소녀와 같은 빛깔이다.

에단의 입매가 다시금 서서히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은하의 눈은 더욱더 가늘어졌다.

“가족이라고 했잖아.”

“……뭐?”

은하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는 순간,

휘익!

에단이 은하의 코앞에 서 있었다.

붉은 홍채의 주름이 선연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어딘가 달콤한 체취가 코를 마비시킬 듯 훅 다가왔다.

은하가 뒷걸음질 칠 새도 없었다.

“왜 내 편이 아니라 저것의 편을 드는 거야?”

“무슨─.”

은하가 살짝 상체를 뒤로 빼려는 순간 에단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뱀처럼 단단히 휘감았다.

“은하, 대답해.”

에단이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제는 그의 숨결이 뺨에 닿을 정도였다.

“넌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거짓말을 한 건 네가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었어.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힘에 허리를 감고 있던 에단의 팔에서 한순간 힘이 빠졌다.

팟!

은하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에단의 가슴팍을 세게 밀쳐 냈다.

“루시 역시 내 가족이야.”

“……!”

높게 일렁이는 흑염 속에서, 황금빛을 품은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똑, 똑, 똑…….

천장의 종유석으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몇 번 이어진 뒤, 무감정한 얼굴로 은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에단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

또다시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흑염이 루시를 감싸고 있는 이상 섣불리 그쪽으로 접근할 수 없을 텐데.

은하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번에 에단이 나타난 곳은 루시 쪽이 아닌 은하의 바로 뒤쪽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귓가에 달콤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나도야, 은하.”

탁.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그의 손이 은하의 어깨 위에 올라간 뒤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진짜니까.”

슈우욱……!

연보랏빛을 띤 기이한 기운이 은하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혼이 빠져나가듯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독가스? 아니, 수면의 종류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도저히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은하는 멀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양산을 지지대 삼아 애써 버텼다.

“에, 단…….”

“잠깐 자고 있어.”

에단은 다른 한쪽 손을 뻗어 은하의 눈을 덮었다. 아니, 덮으려고 했다.

“……지 마.”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게 루시 주변을 일렁이던 흑염이 돌연 폭풍처럼 거세게 춤추기 시작했다.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린 은하는 자신의 어깨 너머를 놀란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에단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을 좇아 서서히 고개를 돌린 그 끝에서, 은하는 보았다.

“언니한테 손대지 마─!”

검은 불꽃 사이로 번쩍! 선연한 황금 빛을 발하는 한 쌍의 눈동자를.

16809361987054.jpg/20230408115813028284_5BECB59CECA2855DLv99_ED9D91EC97BCEC9D98_ED9484EBA6B0EC82B28129.png al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