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 별무덤 (249/306)


#249. 별무덤
2023.04.06.


“이걸로 마지막이군.”

촤악─ 탁!

양산을 크게 휘둘러 피를 털어 낸 은하가 중얼거렸다.

뒤쪽에 서 있던 에단은 몸과 목이 분리된 ‘붉은 눈의 흑호’를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잖아.”

급소만 찾아 어찌나 빠르게 도륙하는지 에단이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다섯 마리나 되는 녀석들을 눈 깜짝할 새 처리한 은하였다.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은하는 이 녀석들을 질릴 만큼 상대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더군다나 당시의 은하와 지금의 은하는 전투력의 차이도 극명했다. 그때는 한쪽 팔을 잃을 각오까지 하며 덤볐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쉽게 녀석을 처리했느냐가 아니었다.

은하는 녀석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그때 그 언노운 게이트인가?’

같은 종류의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해서 동일한 게이트라고 판단하기에는 섣부르다. 그렇지만 동굴 형태를 한 게이트 내부도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다.

‘조금 더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은하는 움찔거리는 흑호의 미간에 정확하게 양산을 꽂았다가 뽑아냈다. 그리고 미약한 움직임을 보이던 녀석이 축 늘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가자, 에단.”

또각또각…….

습기 찬 동굴을 걸으며 은하는 에단에게 물었다.

“이곳 어디에 고양이가 있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어?”

“글쎄. 워낙 넓은 곳이라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별이 가진 특유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고양이는 지금 시스템에 동화된 상태라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시스템창에만 나타나는 반쯤 가상적인 존재라 기운을 읽어 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건 확실해.”

“확신하는 이유가 있어?”

“말했잖아. 언노운 게이트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거라고. 쌍아궁도 마찬가지야. 아니, 오히려 그쪽은 나보다 더하지. 공식적으로는 그 녀석은 아직 조디악이니까. 원래라면 너희 채널에 ‘실존’하는 것부터가 오류거든.”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지. 에단이 덧붙였다.

고양이는 언노운 게이트에 ‘떨어진’ 존재다. 사실은 또 다른 쌍아궁인 루나가 떠민 것이지만, 표면적으로는 그저 사고에 지나지 않는 일에 불과했다.

반면 에단은 조디악의 우두머리인 데바에 의해 추방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조디악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어디에나 속할 수 있는 그런 애매한 존재 말이다.

그러니 엄연히 따지자면 에단과 루시는 경우가 달랐다.

“그 녀석이 너를 따라 이곳에서 탈출한 거라면, 분명 네게서 뺏어 간 것이나 요구한 것이 있었을 텐데.”

은하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내게서 뺏어 간 것이나 요구한 것?’

……이름. 이름이다.

은하는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은, 그 애를 다시 데리고 나가려면 또다시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는 소리겠네.”

“글쎄. 그럴 필요는 없을걸.”

두루뭉술하게 답한 에단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은하를 슥 하니 지나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은하, 여기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지만 여긴 예전에 내가 갇혀 있었던 언노운 게이트와 거의 흡사하거든.”

“뭐?”

“그 언노운 게이트도 이렇게 동굴 형태를 하고 있었어. 아까 내가 해치운 호랑이 모습의 야수형 몬스터는 거기서 서식하던 몬스터였지. 확실한 건 좀 더 가 봐야 알겠지만.”

“아니, 잠깐.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었다고?”

그건 금시초문이었다.

이후 은하는 어두운 동굴을 걸으며 에단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오래전 동료를 대신해서 언노운 게이트에 갇히게 됐고, 그곳에서 고양이를 만나게 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살아남았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는지까지도.

“흐응.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네.”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니까.”

물론 현실에서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은하가 체감하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만일 오래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은하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고양이를 되찾기 위해 여기까지 제 발로 들어온 것이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건가?”

“무슨 뜻이야?”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기억하느냐고.”

“사소하다면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생 기억하기도 해.”

물론 그 기억이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넌 아니야?”

은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무심히 물었다. 에단은 잠시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더니 싱겁게 답했다.

“난 솔직히 그런 건 딱히 기억해 두지 않는 편이라. 별로 소중한 기억도 없었고, 거추장스럽기만 해.”

거추장스럽다. 에단은 과거의 기억들을 그런 식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은하는 흘러가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쓸쓸한 이야기네.”

그러자 에단의 붉은 눈이 힐끔 그녀를 향했다.

“쓸쓸하다니?”

“무너질 것 같을 때나 괴로울 때, 그런 기억들이 힘이 되곤 했거든.”

“…….”

“네게 그런 기억이 없다면 넌 어떻게 힘든 시간을 이겨 냈을까 해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은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기억한다.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에단은 그렇지 않았다.

에단은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로 은하를 빤히 응시했다.

“……잘 모르겠는데.”

어느새 그의 걸음은 멈춰 있었다.

“그냥 잤던 것 같아.”

몇 걸음 앞서 걸어가던 은하 역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잤다고?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 은하의 까만 눈에 포착된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은하는 커진 눈을 하고 서서히 손을 뻗었다.

“산호네.”

에단이 툭 내뱉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건 분홍색을 띤 산호였다. 은하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자갈치 시장에 출현한 언노운 게이트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산호 말이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아까 ‘붉은 눈의 흑호’와 조우했을 당시, 이곳이 은하가 갇혔던 언노운 게이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산호를 발견한 순간 그 가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해.”

은하가 중얼거렸다.

“이 산호도 이전에 다른 언노운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본 적이 있어.”

“그렇다면 그 노래하는 몬스터도 만났겠네.”

“그래.”

무심결에 대답한 은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뭘?”

“노래하는 몬스터. ‘자애의 현혹술사’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냐고.”

“여기에 분홍색 산호가 있으니까.”

에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고양이도 산호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미리 알고 은하에게 함부로 만지지 말라 경고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디악은 언노운 게이트에 출몰하는 몬스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노운 게이트에 출입한 경험이 있는 조디악’이겠지.”

에단은 산호를 등진 채 빙긋 미소지었다. 연분홍빛 산호보다 조금 짙은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산호 앞에서 그의 머리카락 역시 옅게 반짝였다.

“네뷸러에는 ‘별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 각 조디악이 지배하는 12개의 네뷸러마다 별무덤은 존재하지.”

별무덤. 은하도 알고 있다. 루나가 전해 준 기억을 통해 엿본 적이 있으니까.

‘고양이가 언노운 게이트로 떨어지게 된 계기도 바로 그 별무덤에서 추락했기 때문…….’

아. 그 순간 은하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그 별무덤이 언노운 게이트의 입구인가?”

“입구라기보다는 통로라고 볼 수 있지.”

“그럼 네뷸러의 개수만큼의 언노운 게이트가 존재한다는 건가?”

“그렇지는 않아. 어느 네뷸러의 별무덤에서 떨어져도 그 끝은 같거든.”

“그럼─.”

“그래, 개별로 존재하는 게 아니야. 별무덤이 배관이라면 언노운 게이트는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배수구 같은 거지.”

그 말은 즉 은하가 겪어 온 언노운 게이트는 사실 모두 이어져 있는 커다란 공간이란 소리였다.

은하가 갇혀 있던 곳도, 자갈치 시장에서 들어갔던 ‘자애의 현혹술사’를 만났던 곳도, 그리고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도 모두 같은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고양이가 이 언노운 게이트에 있다는 것도 설명이 된다.

또한, 만일 고양이가 ‘별무덤’에서 떨어진 후 오랫동안 언노운 게이트를 방랑하고 다녔던 것이라면…….

‘언노운 게이트의 몬스터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동굴 형태를 한 지역에 대해서라면 은하 역시 빠삭하다는 점이었다.

“은하, 어디 가?”

은하는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회갈색 벽이었고 천장은 뾰족한 종유석으로 빈틈이 없었다. 걷고 또 걸어도 비슷한 풍경. 일반인이었다면 백 번은 헤매고도 남았겠지만 은하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걸음을 멈춘 은하는 차갑게 식은 동굴 내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녀를 뒤따라온 에단이 힐끔 그쪽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날카로운 돌이나 금속을 이용해 그린 정(正) 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벽의 표시를 확인한 은하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그들은 무너진 바위 속, 뼈 무덤 속 등등 여러 지점에서 특이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낡다 못해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인 토익 책이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썩어 버린 배낭, 갈색 피가 묻은 군복 조각 따위였다.

“뭐야, 이 쓰레기들은?”

“죽은 동료의 것들이야. 여기에 같이 갇혔던.”

“아하…….”

은하의 말에 에단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에단이어도 방금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당시 언노운 게이트를 빠져나갈 때 은하는 시우와의 전투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것들을 따로 폐기하거나 챙길 겨를이 없었다. 때문에 동료의 유품들은 이곳저곳에 파묻힌 채 흙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온 듯했다.

문득 은하의 눈에 배낭 아래에 깔려 있는 한 장의 종이가 들어왔다. 아니,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라 사진이었다.

은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 들었다.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채 세피아 빛으로 퇴색된 그 사진은, 오래전 훈련소 동기들끼리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군데군데가 찢기거나 피가 묻어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

사진을 쥔 오른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사진의 모서리 부분은 세월에 닳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정 가운데에 선 은하, 그리고 그 왼쪽에 선 채 수줍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이준의 모습만큼은 선명했다.

사진에 고정된 은하의 까만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은하?”

에단이 은하의 안색을 살폈다. 은하는 들고 있던 사진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고 등을 돌렸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때와는 길이 조금 달라졌거든. 흩어져서 찾아보자.”

에단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은하의 뒤통수를 쳐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 그러든가.”

아주 멀어지지 않는 이상, 은하가 어디에 있든 에단은 그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녀에게 ‘가호’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루시의 흔적을 찾을 때까지 잠시 개별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에단이 아는 한 쌍아궁 녀석들은 낯을 많이 가렸는데, 무려 ‘별을 먹는 별’이 동행인이라는 것을 알면 더 깊은 어둠 속에 꽁꽁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 녀석을 끌어내려면 은하 혼자인 편이 낫겠지.

사실 은하는 고양이가 있을 만한 장소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한 바가 있었다.

‘고양이라면 아마 그곳에 있을 거야.’

은하와 고양이가 이 언노운 게이트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공간.

바로 은하가 만든 간이 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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