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 제휘의 연인 불카누스 (248/306)


#248. 제휘의 연인 불카누스
2023.04.05.


한편, 같은 시각 시우는 화상 회의 시스템을 이용하여 헤드 헌터들을 소집했다.

“제주도 사변에 대한 일은 다들 알고 있을 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길게 뻗은 통유리창을 등지고 앉은 시우. 그 앞에는 반투명한 홀로그램으로 10인의 헤드 헌터의 모습이 각각 떠올라 있었다.

은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긴급회의에 응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의지가 아닌 헤드 헌터 사이의 조약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소집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다.

시우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흑염의 프린세스를 선두로 제주도 사변을 정리하고자 한다. 따라서 많은 전투 인원이 필요하지. 헤드 헌터인 당신들의 조력이 필요해.”

그러자 개중 가장 덩치가 큰 남성, 몽골 출신의 칸이 대꾸했다.

「보통 문제가 아니긴 하더군. 하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상당히 일이 많아서 말이야. 최근 S급 게이트가 터졌거든. 여기도 전투 인원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야.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하길 바라.」

“그쪽 일?”

시우의 가지런한 눈썹이 불편한 기색으로 씰룩였다.

「합의하의 거래를 통한 협업은 가능하지만, 부탁을 받느냐 마느냐는 자유잖아?」

「확실히, 그런 건 조약에 없는 내용이죠.」

칸의 말에 백색 마녀가 동의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우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다. 이대로 제주도를 방치할 경우 그 피해는 당신들의 국가에, 아니 지구에 위협이 될 테니까.”

푸른빛을 띠는 홀로그램 앞에서 시우의 새파란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일이 일어난 후에는 늦어.”

「…….」

그럼에도 칸과 백색 마녀는 시큰둥한 낯빛이었다. 그들도 보도를 통해 제주도의 참혹한 광경을 이미 확인했겠지만, TV 화면이 비친 것과 실제로 목도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곳에 조디악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

「……!」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조디악의 우두머리라니, 확실한 정보야?」

「어째서 제주도에……?」

“그곳에서 흑염의 프린세스가 직접 목격했다고 하니 확실한 정보지. 다만 아직 놈이 제주도에 남아 있는지, 왜 나타난 것인지, 그런 건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어.”

그걸 알아내는 것이 지금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고. 시우가 덧붙이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앉았다.

홀로그램 기계에서 흘러나온 지직, 하고 노이즈가 섞인 옅은 소음이 정적 위에 흘렀다. 시우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조력이 필요한 거죠?」

비로소 반응을 보인 것은 칸과 백색 마녀가 아닌, 발키리였다. 헤드 헌터들 중 그나마 유일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그녀는 어디선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참인지 갑옷 차림새를 하고는 옆구리에 은빛 투구를 끼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흑염의 프린세스가 설명할 거야. 추후 일정을 정할 테니 되도록 한국에 와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겠지. 어쨌든 우리 중 당시 제주도에 있었던 건 그녀가 유일하니까.”

「…….」

“물론 직접 한국에 오지 않아도 좋아. 각국에 있는 탑을 조사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특히 빛나기 시작한 두 개의 탑 위주로.”

한국에 있는 인원만으로 전 세계의 탑을 조사하는 건 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게다가 협회는 정부의 명령으로 제주도 탐색대를 구성 중에 있다.

‘헌터계의 주요 기둥들이 탐색대로 빠지고 나면, 타국의 탑에 발령할 인원이 그렇게 여유롭지만도 않을 터.’

탑 입장 자격이 있는 헤드 헌터에게 조력을 요청하는 건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당연한 순서였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백랑의 말대로 이번 제주도 사변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에는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헤드 헌터 2위 엘리멘탈 마스터가 말문을 열었다.

「다만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칸의 말대로 우리에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되도록 빠르게 부탁하지. 한국에서의 회의 일정은 며칠 내로 전달하겠다.”

시우는 화상을 통해 보이는 헤드 헌터들을 쭉 훑은 뒤 삑, 하고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껐다.

그리고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일정표를 빠른 속도로 넘기며 확인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당장 흑염의 프린세스가 필요하다며 길길이 날뛰는 정부와 협회를 설득하는 일이 있겠다.

현재 늑대와 산하 길드의 인력을 제주도에 쏟아붓는 식으로 그녀의 빈자리를 메꾸고는 있지만, 협회와 정부는 그런 보통의 헌터 수백 명보다 흑염의 프린세스 한 명을 데리고 오라며 눈치를 주었다.

물론 흑염의 프린세스가 일반적인 헌터 수백 명분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는 시우도 동의했다.

하지만 F급 컨셉 헌터로 오해받을 시절에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협회와 정부가 이토록 태도를 바꾼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헌터는 광대도 병기도 아닐뿐더러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도구 같은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만일 은하가 현 상황을 알게 되면 분명 하던 일을 멈추고 협회의 호출에 응답할 것이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마저 뒤로 미룬 채 말이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니까.

한숨을 내쉰 시우는 갑갑하다는 듯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렸다.

‘우선 다른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좋겠군.’

제주도에 나타난 백색 성. 그리고 은하가 보았다는 남자, 데바.

아마도 곧 제주도에서 큰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그걸 대비해서 장비나 아이템이 많이 필요하겠지. 늑대가 가진 걸로는 부족할 것이다.

‘망치 길드에 미리 의뢰를 넣어 두어야겠어.’

다만 직접 망치를 찾기에는 다른 일로도 바쁜 시우였다.

‘누군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살피던 서류를 잠시 손에서 놓은 시우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 앞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저 아래에 있는 제휘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그는 길드 본부 입구 쪽에 있는 작은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순간 시우는 결심했다.

제휘에게 망치의 길드 마스터인 표의혁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일러두는 편이 낫겠다고. 지난번에 선배의 장비를 수리하는 일로 의혁과 안면이 있을 테니 다른 길드원보다는 차라리 제휘가 적임자일 것이다.

‘결정됐군.’

전화를 해서 제휘를 여기로 호출할 수도 있었지만, 바깥 공기도 쐴 겸 시우는 화상 회의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곧장 향했다.

* * *

본부 앞 자그마한 공원을 서성이던 제휘는 근처 연못에 비친 제 모습을 힐끔 확인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자, 누군가 뒤에서 툭 하고 어깨를 건드렸다.

“뭐 해?”

조금 빛바랜 색의 탈색모를 질끈 묶은 채 쭉 찢어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망치 길드의 표그루였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크롭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티셔츠의 기장이 워낙 짧아 그을린 빛깔을 한 탄탄한 복부를 반쯤 내보이고 있었다.

“아, 빨리 오셨군요.”

눈을 둘 곳이 없어진 제휘는 부러 먼 곳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점심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죠?”

“그냥 걸어왔어.”

“예? 여기까지 말입니까?”

“어, 이제 날도 많이 따듯해졌잖아. 오랜만에 걸으니까 좋던데. 어쨌든 여기 있지 말고 슬슬 이동하는 게 어때? 서서 먹을 수는 없잖아.”

그루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슥 들어 보였다. 분홍색 하트 무늬가 뿅뿅 그려진 보자기였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수제 도시락인가.’

제휘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상하로 크게 움직였다.

“지금 그쪽 상황에 밥이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담당하고 있는 헌터가 일이 있다고 해서 매니저까지 굶고 다니는 건 프로답지 못해. 무슨 뜻인지 알지?”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제휘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다. 제주도의 일로 가뜩이나 바쁜 요즘, 눈앞에서 이준을 두고 돌아온 은하는 확연히 어두워졌다.

그에 따라 며칠 사이 제휘도 덩달아 우울해하고 식사도 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루는 손수 도시락까지 만들어 그에게 전해 주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대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심은 것 같다.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그루가 머쓱한 얼굴로 목을 긁었다.

“기대는 하지 마. 요리는 오랜만이라.”

“아, 아뇨! 그루 씨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제휘가 두 주먹을 꼭 쥐고 빽 소리치자 그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짹짹짹…….

조그만 도시 정원 속에 참새의 울음소리가 두 사람을 감쌌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그루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미친 줄 알았네.”

“죄, 죄송합니다…….”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두 뺨이 조금 붉었다. 제휘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져서 다른 쪽으로 휙 시선을 던졌다.

“그, 그럼 그루 씨, 저쪽으로…… 저기 햇볕이 잘 드는 벤치가 있거든요.”

도망치듯 휘적휘적 걸어가던 제휘는 몇 걸음도 가지 않아 다시 우뚝 발을 멈추었다.

“대, 대표님?!”

벌써 회의가 끝난 것인지, 시우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제휘는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눈치를 살폈다. 사실 지금은 엄연한 점심시간이니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우는 제휘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장된 그의 푸른 눈이 제휘에게 꽂혔다가 스르륵 움직여 그 뒤의 그루에게 향했다.

“저자는…….”

말끝을 흐린 시우의 시선이 또르륵 떨어져 그루가 쥐고 있는 하트 무늬 보자기…… 아니, 도시락통에 닿았다. 그 순간 시우의 미간 주름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아, 소개드리겠습니다. 이분은 표그루 씨라고, 망치 길드의─.”

“연인인가.”

“켈록!”

시우의 중얼거림이 직구처럼 날아드는 순간 제휘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 그, 그러니까…….”

할 말을 고르는 듯 우왕좌왕하던 제휘는 문득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루와 눈이 마주쳤다.

“……예, 맞습니다.”

사실 알게 된 지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루의 제안으로 교제를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아직 여동생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에게 먼저 들켜 버리다니.

한편 혼란스러운 것은 시우도 마찬가지였다.

‘박제휘가…….’

……연애를?

시우의 얼굴색이 심각해졌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제휘는 연애는 물론 결혼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우는 도저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단코 자신이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망치 길드의…….’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이 다물렸다.

망치 길드. 그렇지. 그곳에는 볼일이 있었다.

“마침 잘됐군. 그쪽에 의뢰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는데.”

“망치 길드에 말씀이십니까? 그루 씨는 망치 길드장의 조카이기도 하고 ‘레드’ 등급의 제작 헌터시니 의뢰 건이라면 이쪽으로 바로 전달드리면 될 겁니다. 그렇죠, 그루 씨?”

레드 등급의 제작 헌터라고? 이 여자가? 시우는 사뭇 놀란 눈으로 그루를 응시했다.

아니, 잠깐. 의혁의 조카라면─.

“……그쪽이 불카누스?”

불카누스. 몇 년 전부터 활동을 중단한 전설의 제작 헌터.

불카누스가 제작한 아이템은 소모성 아이템이라도 최소 수억은 훌쩍 넘을 만큼 고가로 유명했다.

더군다나 활동을 중단한 이후로는 기성품들의 희소성이 훌쩍 뛰어올라 이제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특히 장비 아이템의 경우 수백 억을 가지고 옥션에 참가해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불카누스가 지금 눈앞의 이 여자…… 제휘의 연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표의혁과 이목구비가 닮긴 했다.

그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는 이윽고 그녀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세웠다.

“방어구와 무기 제작을 의뢰하고 싶은데.”

“얼마나?”

“방어구와 무기는 최소 100개 이상. 포션도 제작해 주면 좋겠군. 회복용과 상태 이상 해제용, 각각 7 대 3 정도로.”

“급한 의뢰지? 포션은 그렇다 치더라도 방어구와 무기를 각각 100개씩 제작하려면 적어도 넉 달은 걸려. 그렇게 뚝딱뚝딱 만들어지지 않거든.”

시우는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일단 그는 그루에게, 즉 불카누스에게 제작 의뢰를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제작 아이템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우나 늑대의 간부급 헌터들이 쓸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 값을 하는 아이템까지는 필요 없다.

시우가 당황한 이유는 또 한 가지 있었다.

그루는 최소 넉 달을 말했다. 그러나 그 정도 아이템을 혼자 제작하려면 본래 넉 달은커녕 일 년을 쏟아부어도 만들기 벅찰 테다. 일반적인 제작 헌터라면 말이다.

“보아하니 제주도 일로 급히 의뢰를 맡기려는 것 같은데, 기한은 언제까지지? 우선 그것부터 말해. 아이템 개수는 그에 맞춰서 최대로 제작해 보지.”

“……전부 그쪽이 제작할 필요는 없어. 만일 가능하다면 10개 정도만 그쪽에게 부탁하고 싶군. 나머지는 희귀 등급 아이템으로도 충분해.”

희귀 등급이라도 할지라도 ‘메이드 인 망치’라면 기존의 영웅 등급 아이템만큼의 성능이 보장될 것이다.

“그래? 그럼 예산은?”

“그쪽에서 측정해.”

시우의 말에 그루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흠, 정확한 건 공방에 돌아가 재료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대충 어림잡아 300억 선으로 생각해 두면 되겠지.”

“300억?”

시우가 미간을 좁혔다.

“너무 싼데.”

“할인 좀 때렸어.”

“……조건은?”

“눈치가 빠르네.”

그루가 씩 웃었다.

“우리 제휘 연차 20일 추가. 그걸로 퉁. 어때?”

“예?!”

“…….”

제휘가 펄쩍 뛰는 가운데 시우의 미간이 더더욱 좁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