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7)화 (247/306)


#247. 그 아이가 있는 곳
2023.04.04.


경기도 남양주시 외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강가.

제주도 한라산이 있던 자리에 백색의 성채가 등장하고 세계의 탑이 하나씩 정체불명의 빛줄기를 뻗치기 시작한 지금, 남양주시를 포함한 전 세계의 탑 인근 지역은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어찌어찌 시선을 피해 여기까지 오는 것에는 성공한 은하와 에단이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한 탓에 더 이상 탑 가까이 이동하는 것은 꽤 난관일 듯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

에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에단은 고양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인적이 드물수록 좋고, 장소는 탑이 가까울수록 알맞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은하와 에단은 각자 방향을 나누어 혹시나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하긴 지금 이 상황에서 남양주시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이만 에단에게 돌아갈까. 빙글 몸을 돌린 은하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

검은 눈동자에 잠깐 고민의 기색이 스치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든 은하가 물끄러미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연락처]

[녹스 010-XXXX-XXXX]

오늘만 해도 수도 없이 그녀에게 연락할지 말지 고민했던 은하였다.

함께 제주도에 가기도 했고 멀리서나마 백색 성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아마 그녀도 이준의 말로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포츈텔러 안드레아에게도 이미 전해졌겠지.

GIA의 멤버인 그들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은하는 도통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섣불리 괜찮은가 묻는 것도 이상하고, 나 때문에 그가 죽어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것은 더욱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준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게 고민하며 남양주시까지 온 은하는,

‘우선 고양이를 되찾자.’

지금 비로소 결론을 내렸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한들, 그들에게는 이준에 대한 이야기를 확실히 전달해야만 하겠지.

다만 그건 통화나 메시지 따위가 아닌, 실제로 만나서 전해야 할 이야기라고 판단했다.

은하는 결국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고 에단에게로 돌아왔다.

“어때?”

“아무도 없어. 그쪽은?”

“마찬가지야.”

이후 에단은 곧장 준비에 돌입하는 듯했다.

‘언노운 게이트를 생성하겠다는 건 진짜일까.’

은하는 에단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채 유심히 그를 지켜보았다.

고양이, 그러니까 쌍아궁의 반쪽인 루시는 언노운 게이트를 헤매고 있을 것이라는 게 에단의 추측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언노운 게이트를 여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한번 말할게. 이건 강제적이고도 일시적으로 입구를 여는 행위라, 출입구가 열리는 즉시 닫힐 거야.”

에단은 힘을 해방하기 직전, 확인차 은하에게 경고했다. 언노운 게이트에 진입하는 일은 뜻대로 가능하나 탈출하는 일은 그렇지 않으리란 뜻이었다.

즉 내부의 일정 조건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영영 그곳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미 두 번이나 그곳에 갇혀 본 경험이 있는 은하였다.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음은 바뀌지 않은 것 같군.”

은하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린 에단은 정면을 응시했다.

포장된 도로 너머로 북한강이 보였다. 바람이 나지막하게 수면을 쓸자 그 자리에 고요한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에단이 무언가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돌연 태풍처럼 거세게 변했다.

도로가에 서 있던 나무가 금방이라도 우지끈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잠들어 있던 강의 표면이 해일처럼 거칠게 깨어났다.

피부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의 양. 다만 그것은 게이트가 생성될 때 느껴지는 균열의 파동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마 게이트 관리국은 이 현상을 읽어 내지 못할 것이다.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가운데 포장된 도로 주변의 가드레일이 마시멜로처럼 뜯어져 날아가고, 부러진 나뭇가지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한껏 휘몰아친 수면 위로 서서히 검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거대한 언노운 게이트의 입구가 생성되었다.

“됐어.”

에단이 힐끗 은하에게 눈짓했다.

“직접 보니 어때?”

“……엄청나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언노운 게이트를 생성하는 거지?”

“이건 별의 기운에 반응해서 열리는 일종의 오류 현상이야. 쓰레기통이라고 부르기도 해.”

“쓰레기통?”

“각 차원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를 감지한 시스템이,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처박기 위해 만들어 낸 것.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언노운 게이트야.”

시스템은 곧 질서를 뜻했다. 그 질서는 사실 별의 개입을 묵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데바조차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은하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각 차원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라니, 예를 들면?”

“나.”

에단이 짧게 답했다.

“그리고 데바 놈. 시스템이 인식하기에는 우리는 다른 ‘채널’의 존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하늘에 묶여 있어야 할 별이 지상에 내려와 있으니 충돌이 일어나는 거지. 그리 덧붙인 에단은 은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지금 시스템은 ‘가호’가 깃든 너를 반쪽짜리 별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테니 요령을 익힌다면 은하 네가 직접 이걸 열 수도 있을걸.”

“…….”

은하는 시선을 들어 불길한 스파크를 튀기는 언노운 게이트 입구를 응시했다.

‘닥터 플랜트도 이런 식으로 언노운 게이트를 만들어 냈던 건가.’

로제는 조디악…… 그중에서도 아마 예가임의 ‘가호’를 받았을 것이다.

다만 은하의 경우와는 조금 다를 테다. 12신수와 각성자가 그러하듯 계약을 제시했던 고양이와는 달리, 로제의 반응과 일기를 떠올려 보면 예가임은 딸을 빌미로 로제를 속이면서 꾀어낸 듯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에단의 말대로라면 시스템은 그런 로제 역시 ‘반쪽짜리 별’로 인식했을 것이고, 그녀에게 반응한 시스템이 언노운 게이트를 생성해 냈으리란 추측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상해.’

은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가임은 어째서 로제를 속이거나 딸을 빌미로 삼아 가면서까지 그녀에게 ‘가호’를 주었던 걸까.

단순히 유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든가.’

이를테면 언노운 게이트 안에 그가 목표로 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거나.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은하를 향해 에단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언노운 게이트의 입구는 금방 닫힐 것이다.

“은하, 관두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어떡할─.”

──래?

그렇게 끝까지 묻기도 전이었다.

휘릭!

에단의 시야에 은하의 드레스 소매가 넓게 휘날렸다. 깨달았을 때 이미 은하는 언노운 게이트에 몸을 던진 이후였다.

멍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던 에단은 이내 픽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따라 검은 균열을 향해 걸어갔다.

시커먼 먹물이 번지듯 에단의 뒷모습이 완전한 어둠에 먹혀들었을 때, 살벌하게 스파크를 튀기던 입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남은 것은 망가진 포장도로와 가드레일, 아무렇게나 쓰러진 나무들, 그리고 다시금 고요한 잠에 빠진 북한강뿐이었다.

* * *

언노운 게이트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보인 것은 축축한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 있는 바위 벽이었다.

은하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습한 냄새. 어두운 공간. 사방에 가득한 바위 벽과 천장에서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종유석까지.

“동굴이네.”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피던 에단이 중얼거렸다.

은하는 처음으로 갇혔던 언노운 게이트가 이곳과 매우 흡사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식수를 확보하고 몬스터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한 자리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시간이 없어.’

은하는 그 모든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다.

두 번이나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노운 게이트 내부와 현실 세계는 높은 확률로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이곳에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현실로 돌아갔을 때 몇 년은 훌쩍 지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데바에 의해 지구는 더 이상 지구가 아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는 늦다.

“여기 어딘가에 루시가 있는 거지? 좀 더 깊은 곳으로 가 보자.”

은하는 바위 벽을 따라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던 에단은 문득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난 솔직히 네가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어.”

“왜?”

“널 여기에 가두고 혼자 나가 버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나름대로 회심의 한마디였다. 덜컥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거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하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위 벽을 짚으며 대꾸했다.

“안 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에단이 다시 묻자 은하는 그제야 에단을 향해 휙 시선을 던졌다.

이미 이전의 대화로 둘 사이의 신뢰와 협력은 확실시된 것이 아니었던가. 에단은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어떤 속내로 저런 걸 묻는지조차 은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장난기 섞인 눈빛과 미소가 걸린 입매 탓에 진심인지 농인지도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넌 내 힘이 필요한 거잖아.”

작게 한숨을 쉰 은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바를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고, 너 혼자서도 그걸 충분히 이뤄 낼 수 있다면 굳이 여기까지 날 데려와서 ‘가호’를 되찾아 줄 수고를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그리 말한 은하는 양산 끄트머리로 바위 벽 표면에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혹시나 길을 잃었을 때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한 표시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난 너를 믿어.”

벽에 표시를 마친 은하가 다시금 에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만일 여기서 네가 날 가두고 혼자 빠져나간다면, 그건 그냥 내가 실수한 게 되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을 거야. 너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던 말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모두 진심이니까.”

가자. 은하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더 깊은 동굴 내부로 걸어갔다.

에단은 그런 은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은하.”

앞서 걸어가던 은하가 휙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은하의 표정이 일순 돌변하더니 그녀의 어깨 위로 팟! 하고 흑염 구체가 떠올랐다.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간 그것은 에단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그의 뒤쪽에서 폭발했다.

“몬스터야.”

은하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쪽에 몬스터의 기척이 있다는 것 정도야 에단도 느끼고 있었다.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이다.

에단은 게이트에 휘말린 비각성자도, 어쭙잖은 랭크의 헌터도 아니었다. 저 정도 몬스터 따위, 코앞까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무시해도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은하는 그 몬스터가 에단을 표적으로 삼기도 전에 먼저 움직여 놈을 처리했다.

“반격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죽은 것 같긴 하지만, 확인하는 게 좋겠어.”

은하는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누군가가 저를 지켰던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공격을 온몸으로 맞고도 멀쩡히 살아 있다면 이곳의 보스 몬스터 정도 되는 녀석이겠지.”

에단은 은하에게서 휙 시선을 거두며, 평소처럼 농담기가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잠깐.”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으며 몬스터의 사체를 확인한 은하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이건…….”

검은 가죽에 날카로운 송곳니. 커다란 체구에 섬뜩한 핏빛 눈동자까지.

은하는 이 몬스터를 본 기억이 있었다.

‘붉은 눈의 흑호.’

은하가 처음 갇혔던 언노운 게이트에서 질릴 만큼 사냥했던 바로 그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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