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6)화
(246/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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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우리가 가진 힘
2023.04.03.
“선배는?”
시우의 물음에 에단은 엄지를 들어 휙 하니 은하의 방 쪽을 가리켰다.
“어제부터 방에서 안 나와.”
“……알았어.”
시우는 신발을 벗고 오피스텔 내부로 들어섰다. 팔짱을 낀 채 시선으로 그를 좇던 에단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은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에단을 돌아보았다.
무신경한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은하가 걱정되는 건 에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시우는 그냥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다가 짧게 대꾸해 주기로 했다.
“선배의 동료가 제주도에서 사고를 당했다.”
“죽은 거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그러자 에단은 “흠, 그래?” 하며 무미건조한 대꾸를 흘렸다. 놀란다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초리였다.
동료가 사고를 당했다는 건 즉 큰 부상을 입었다거나 죽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에단의 경우, 그게 충격받을 만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 동료라는 놈은 왜 그렇게 됐는데?”
“그건 내가 대답할 부분이 아닌 것 같군. 궁금하면 네가 직접 선배에게 듣도록 해.”
그리 말한 시우는 더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에단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지 끝까지 묘한 시선으로 시우를 쫓았다.
똑똑.
시우가 은하의 방문을 두드리고 꽤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시우를 본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쩐 일이야?”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한 그였지만 설마 바로 다음 날에 찾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혹시 수색 작업에 차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말은 하지 않아도 은하의 두 눈에는 그러한 기대감이 얼핏 서려 있는 것 같아서, 시우는 입술을 떼어 내기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선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은하의 기대를 애써 모른 척한 시우가 목적을 명시하자, 아주 짧은 순간 은하의 눈빛에 미약한 실망이 스쳤다.
그러나 그런 적이 없다는 듯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준비할 테니 잠시 기다려.”
이후 시우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늑대 길드의 본부였다.
‘늑대 본부에는 왜…….’
협회로 갈 줄로만 알았던 은하는 눈앞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며 의문을 품었다.
시우는 본부의 입구가 아닌 다른 특별한 통로를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늑대 길드원 중에서도 일부만이 지날 수 있는 그 통로는 로비가 아닌 지하로 이어졌다.
지하는 무려 7층까지 뚫려 있었는데 대부분 물류 창고나 실험실, 아이템 보관소, 유사시를 대비한 대피 공간 따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최하층인 지하 7층만큼은 다른 층과는 확연히 달랐다. 왜냐하면 그곳은 오로지 시우만을 위해, 아니 정확하게는 ‘늑대의 작은 주인’을 위해 만들어졌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지?”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은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꽤 오래된.
“훈련장입니다.”
……훈련장이라고? 이곳이 말인가?
은하는 스르륵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둑하고 침침한 그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튄 붉은 혈흔과 보랏빛 혈흔이었다. 인간의 것과 몬스터의 것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바닥을 나뒹구는 낡은 사슬과 본래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빈 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자 망가진 전기 충격기나 밧줄로 묶인 의자 따위가 보였다.
훈련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고문 장소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꽤 오래전에 폐쇄되었지만 아직 내부는 건재하죠. 저도 오랜만에 옵니다.”
“여길 자주 왔었어?”
“소년 시절에는 살다시피 했었죠.”
“…….”
은하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시우를 쳐다보았다. 정작 본인은 태연한 얼굴로 그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차르륵─
바닥을 뒹굴던 사슬이 끄트머리에 달린 수갑과 부딪혀 차가운 쇳소리를 냈다. 수갑의 둘레는 지금의 시우에게는 맞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것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네 살쯤부터였을 겁니다.”
수갑을 매만지는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지만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 이곳에서 차기 길드장이 될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저기 건너편의 유리창이 보이십니까? 그 너머는 제어실이자 관리실입니다. 저곳에서 기계를 조작하면 이곳에 모의 게이트가 열리고, 설정한 값에 맞춘 몬스터가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죠.”
“……홀로그램?”
“네. 굉장한 기술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가상 몬스터를 상대로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었지만,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어린아이가 상대하기에는 꽤 벅찬 적이었죠.”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차기 늑대 길드장이 되기 위한 훈련은 그밖에도 수도 없이 많았다.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훈련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통각을 인위적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성분을 알 수 없는 약물을 지속적으로 투입했고, 마력을 강제로 극대화하기 위해 당시 시우의 수준에 맞지 않는 고레벨의 홀로그램 몬스터를 하루에도 수십 마리는 해치워야 했다.
몸이 아프다고, 힘들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옥 같았습니다.”
과거의 어둠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초연한 말투였다. 그래서 더욱 그 감정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에서 시우는 강해지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 누구도 헌터가 돼야 하는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다. 헌터가 되고 나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시우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며, 어째서 남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저 시키는 대로 훈련을 받아 왔다. 당시 시우가 가진 것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뿐이었다.
그는 늑대의 아들이었으니까.
“늑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헌터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만일 각성자나 몬스터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아주 다른 차원의 다른 나로 태어났더라면,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가만히 시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 역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가 태연한 척 표정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 진짜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는 바뀌어 버린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지금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 선배를 보면서 제게도 목표가 생겼고.”
“목표?”
“네. 헌터라는 것이 없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방법도 없고, 세상을 원래대로 바꿀 수도 없지만─.”
사슬을 바닥에 내려 둔 시우가 은하와 시선을 맞추었다.
“세상을 또 한 번 변화시킬 힘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습니까.”
“……!”
은하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고맙습니다, 선배. 이제야 인사를 드리네요.”
그는 더 이상 이 끔찍한 훈련소에 갇혀 훌쩍이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차은하라는 뚜렷한 이정표가 있었다. 그녀를 따라간다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마도 마에스트로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그녀가 머뭇거리고 걸음을 멈출 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은하는 시우의 생각만큼 ‘완벽한 헌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함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멈출 수 있으니까. 시우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만 그 당시 오래도록 제자리에 멈추어 있던 시우를 이끌어 주었던 것은 은하였다.
물론 자신에게는 감히 그녀를 이끌 수 있을 만한 힘이 아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아가는 길을 묵묵히 열어 주는 정도라면.
“무너지지 말고 선배의 길을 가 주십시오.”
시우는 은하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고 빙그레 웃었다.
“내가 돕겠습니다.”
* * *
소파에 드러누워 천장을 무심히 올려다보던 에단은 현관 쪽에서 들려온 도어락 소리에 스르륵 상체를 일으켰다.
은하가 돌아온 것이다.
에단은 현관까지 한달음에 향했다. 신발을 벗고 있던 은하가 에단의 등장에 살짝 턱을 들었다.
에단은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건 에단에게 처음 있는 일이라, 좀처럼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묘하게 굳어 버린 에단 앞에서, 웬일인지 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그러자 에단의 붉은 눈이 조금 확장되었다.
“……꽤 나쁘지 않은 외출이었나 봐.”
“그래.”
은하는 신발을 완전히 벗고 거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에단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에단, 쌍아궁이 있을 만한 장소를 알고 있다고 했지?”
별을 품은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줘.”
그 눈동자 속에는 더는 망설임이나 동요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나와야지. 이것이야말로 에단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은하를 응시하던 에단의 입매가 스르륵 곡선을 그렸다.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