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5)화 (245/306)


#245. 상실과 동요
2023.04.02.


집으로 돌아오자 에단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그가 다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확인해 보았을 은하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탁!

거실을 지나 제 방으로 들어온 은하는 방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나 침대로 걸어가거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문에 등을 딱 붙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늑대 본부로부터 정신없이 뛰어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흑염의 프린세스를 알아본 인근 주민들이 아는 척을 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어왔는지 바람이 귀에 잔뜩 감겨 아직도 귓가가 먹먹했다.

‘비록 왼쪽 팔뿐이지만 전해 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차 헌터님의 유일한 옛 동료잖습니까.’

“…….”

은하의 새까만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백이준이 죽었다.

그 사실은 마치 기계처럼 간단명료하게 은하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만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료를 눈앞에서 잃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1세대 헌터인 은하에게 동료의 죽음이란 그 정도로 새삼스럽지도 않은, 그저 일상과 같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또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은하는 동료의 죽음 앞에서 흔들렸던 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태연했던 적도 없었다.

목숨을 건 격렬한 전투를 거듭하여 신체와 능력이 향상해도 결코 상실에는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어떤 슬픔과 분노를 겪어도, 그 위로 따듯한 추억을 덧입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잃는 것은 늘 공허했으며, 은하는 습관처럼 늘 제 탓을 했고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럴 때마다 은하를 위로해 주었던 건, 남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이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부우웅…….

열린 창문 사이로,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둔중한 배기음이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진다.

툭툭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소리에, 군용 수송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과거의 기억이 아슴푸레 깨어났다.

‘나중에 우리 집 강아지 미용해 볼래? 비숑 프리제라는 견종인데, 이름은 윌리엄이야. 되게 순해.’

은하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참, 내 이름은 백이준이야.’

혹여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손을 오므려 단단히 그것을 부여잡은 은하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무릎에 조용히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젖은 빗소리는 점차 강해지며 고요한 방 안을 하염없이 두들겼다.

* * *

삐리릭─

도어락을 닫고 현관으로 들어선 에단은 신발장에 놓인 은하의 구두를 발견했다. 잠시 아이스크림을 사러 다녀온 사이 그녀가 집에 돌아온 듯했다.

그런데 그녀답지 않게 마구잡이로 벗어 던진 듯한 구두의 모양새가 이상했다.

“은하?”

복도를 거쳐 거실로 들어서자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은하가 보였다.

에단은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를 식탁 위에 적당히 올려 두며 말했다.

“볼일은 끝났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응.”

은하에게서 짧은 대답이 돌아오자 에단의 붉은 눈이 힐끔 그곳을 향했다. 이 방향에서 은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분위기가 외출 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에단의 눈매가 조금 가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은하는 아직도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별일이 있지 않은 이상 집에서는 편안한 복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들어왔나 봐.”

“아니, 좀 됐어.”

짧게 답한 은하는 소파 곁에 세워 두었던 양산을 손에 쥐었다. 그러더니 에단을 휙 지나쳐 신발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디 가?”

에단은 은하의 등을 보며 물었다. 은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상체를 숙여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에단의 말을 듣지 못한 걸까. 그는 신발장까지 걸어가 은하 바로 앞에 서서 다시 물었다.

“어디 가냐고. 아직 볼일 덜 끝난 거야?”

그러자 구두를 다 신은 은하가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에단은 그제야 은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확실하게 다른 점이 한 군데 있다면─.

“제주도.”

새까맣던 그녀의 두 눈동자가 미약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에단은 이 기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가호’. 아직 그녀에게 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별의 흔적이었다.

“……지금 제주도로 가겠다고?”

에단이 확인차 묻자 은하는 이미 정한 일이라는 듯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

“그곳에 데바가 있을 테니까.”

“어차피 지금 제주도로 가더라도 놈을 만날 순 없을 건데. 만일 만난다고 하더라도 개죽음을 당하겠지. 지금의 너에겐 무리야.”

“상관없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하는 현관문 문고리를 잡았다.

“내가 죽더라도 놈을 죽이면 그만이니까.”

“잠깐 기다─.”

은하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려고 했고, 에단은 홧김에 그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악─

그녀를 감싸고 있는 별의 기운이 한결 강해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했던 홍채의 황금빛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억눌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놔.”

은하의 경고에 에단의 입매가 얼핏 굳었다.

목소리의 억양과 지금 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은하는 진심이었다.

굳었던 에단의 입매에 비스듬한 미소가 서렸다.

“못 놓겠는데. 쌍아궁을 찾겠다는 건 벌써 뒷전이야? 말했잖아. 네게 깃든 ‘가호’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상태로 데바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에단은 은하를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덧붙였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답지 않아, 은하.”

“…….”

순간적으로 은하의 홍채에 머물던 미약한 황금빛이 잦아들었다.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려고 하는 짓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죽음을 겪었던 은하는 각성한 뒤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죽였고, 녀석들의 피로 흥건히 손을 적셨다. 마치 홀린 듯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준은 엄마와는 달랐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소장님과도 달랐다. 그분은 제게 가르침을 준 스승과도 같은 분이셨으니.

다만 이준은…… 그 애는…….

‘유일한 존재였어.’

이준은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일한 동료였다.

“은하, 날 봐.”

에단은 은하의 팔목을 스르륵 놓고 은하를 응시했다. 그러나 은하는 양산을 세게 거머쥘 뿐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에단은 지금 은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에단은 이준을 잘 몰랐기도 하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제주도에 도착해서 이준이 그곳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미안.”

오랜 침묵 끝에 비로소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어떻게 됐었나 봐.”

그리 말하는 은하의 눈은 평소와 같은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이라도 한잔 들이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은하는 구두를 벗고 다시 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에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은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딩동─

은하가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낸 찰나 현관문 벨이 울렸다.

벽면 모니터에 은하가 잘 알고 있는 두 얼굴이 떠올랐다. 시우와 제휘였다.

“…….”

잠시 주춤하던 은하는 생수통을 다시 집어넣은 뒤 냉장고 문을 탁 닫았다.

조금 뒤, 시우와 제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힐끔 은하의 상태를 살핀 제휘는 금방 본사로 돌아갔고, 오피스텔에 남은 시우는 은하에게 단둘만 대화하자며 양해를 구했다.

은하는 에단을 방으로 돌려보낸 뒤, 시우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앉아.”

침대에 적당히 걸터앉은 은하는 미니 테이블 곁의 의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나 시우는 우두커니 제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분하게도 말이지. 은하가 자조적인 미소를 희미하게 입가에 띠었다.

시우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몇 초의 침묵 후 그가 은하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마에스트로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색을 이어 가고 있고, 인원을 추가해서 파견할 예정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시우는 제주도에서 이준의 왼쪽 팔을 발견했다는 얘기는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늑대 본부에 방문했었고, 제휘와의 대화를 엿들었을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은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사실 시우는 지금 필사적이었다. 은하가 상실감에 젖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응, 고마워.”

그런데 시우의 걱정과는 달리 은하는 상당히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시우가 당황할 정도였다.

“선배, 그─.”

위로라도 전하려던 시우는 그대로 입을 닫아 버렸다.

생각보다 은하의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저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은하가 저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 제 쪽에서 서투른 위로를 던지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이다.

시우는 되지도 않는 위로는 거두기로 하고 줄곧 손에 쥐고 있던 비닐 봉투를 슥 들어 보였다.

“오는 길에 떡볶이랑 붕어빵을 좀 사 왔습니다. 입맛이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드세요.”

먼저 방을 빠져나간 시우는 자신이 사 온 분식들을 식탁 위에 나열했다.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에 은하도 뒤늦게 그를 따라 다시 거실로 나갔다.

“에단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식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원래의 은하였다면 에단의 방문을 두드려 식사를 권유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래?” 하고 대꾸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국 여성이라면 대부분 떡볶이를 좋아할 것이라며, 그렇게 극구 추천하던 길드원들의 말과는 달리 은하는 몇 번 젓가락을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하여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마친 뒤.

쨍그랑─!

설거지를 하겠다던 은하는 웬일인지 접시를 깨뜨렸다.

다른 쪽에서 식기를 정돈하고 있던 시우가 흠칫 놀라 은하에게 쏜살같이 다가갔다.

“선배, 괜찮습니까?”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평온한 어조로 대꾸한 은하는 허리를 숙여 바닥의 깨진 그릇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릇 파편에 닿기 직전, 시우가 자신의 손을 대신 뻗어 그 경로를 홱 하니 가로막았다.

“다칩니다, 선배.”

시우는 은하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조금 멍한 기색을 하고 있던 은하의 눈에 그릇에 살짝 베인 시우의 손이 들어왔다.

“아.”

은하가 조금 당황한 듯한 신음을 흘렸다.

“신시우, 네 손이…….”

“괜찮습니다. 여긴 제가 정리할 테니 선배는 좀 쉬세요.”

“아니, 난 괜찮─.”

“부탁입니다.”

“…….”

은하는 무어라 변론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곧 입을 다물고 소파로 걸어갔다.

은하가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사이 그릇 청소를 마친 시우는, 조용히 은하 곁에 섰다.

“선배─.”

“……!”

그러자 흠칫 놀란 은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시우가 바로 옆에 서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놀란 것은 시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갑작스럽게 말을 걸었기는 하지만, 평소의 은하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놀라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신경 쓰지 마.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

시우는 딴생각을 했다고 주변의 기척을 의식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역시 선배는…….’

아닌 척하고 있어도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준이 은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건 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어떠한 종류이든 ‘유일했던 존재’의 상실에는 큰 정신적 타격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래전 유일한 이해자였던 일석 할아범을 잃었을 때 자신이 그러했듯이,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어도 속내는 그렇지 못할 것이 당연했다.

그때 시우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상실에 익숙해져 갔다.

은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제주도 사변에 관한 진지하고 세밀한 대화를 바라기도 힘들었다.

‘협회에 연락을 해 둬야겠군.’

지금쯤 실버문 매니지먼트에는 흑염의 프린세스와 접촉하기 위한 협회와 각종 연합의 연락이 쇄도하고 있겠지. 일이 터진 후에야 그녀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시우는 묵묵히 겉옷을 챙겼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선배. 다시 연락드리죠.”

다시 창밖에 시선을 빼앗긴 은하는 시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 시우는 조용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 * *

다음 날.

못내 은하가 신경 쓰였던 시우는 기존 일정을 오후로 미루고 그녀의 오피스텔을 다시 찾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은하가 아닌 에단이었다.

“또 왔네.”

신발장이 있는 벽면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댄 에단이 심드렁한 얼굴로 시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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