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4)화 (244/306)


#244. 무거운 소식
2023.04.01.


해 보겠다고……? 헌터를?

과연 그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평소처럼 그저 장난을 치는 걸까. 은하는 에단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아르헨티나의 탑이 봉쇄되었어. 봉쇄자는 시스템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은하는 에단에게 겨눈 양산에 꾹 힘을 주며 물었다.

“네 짓이지?”

“맞아.”

“목적은?”

“그곳에 내가 찾던 게 있었으니까.”

“찾던 것?”

“응. 보병궁 녀석이 봉인해 두었던 내 힘.”

그리 답한 에단은 씩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날 의심하고 있구나. 가족으로 생각한다면서.”

“의심이 아니라 확인이야.”

“흠.”

에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내가 네 아군이라는 걸 말이야.”

양산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은 에단은 검지로 콕, 양산 표면을 가볍게 찔렀다.

“쌍아궁을 만나게 해 줄게.”

“……뭐?”

은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조디악 쌍아궁 중 루나는 이미 소멸했다. 그렇다면 에단이 만나게 해 준다는 쌍아궁은 나머지 한 명인 루시, 즉 고양이를 말하는 것일 테다.

“네게 ‘가호’를 전해 준 그 조디악 말이야. 지금 옆에 없지?”

“…….”

“딱 보면 알거든. 지금 네게 깃든 ‘가호’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 능력이 이전보다 많이 약해졌다는 건 너도 자각하고 있을 거고.”

확실히 은하도 느끼는 바가 있기는 했다.

고양이와 계약하면서, 은하는 흑염을 포함한 몇 가지의 권능을 얻었다. 이를테면 어두운 곳에서 전투를 유리하게 만드는 패시브 스킬인 ‘밤을 읽는 자’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킬에 종종 오류가 발생하고는 했다. 에단의 말대로라면, 고양이가 은하에게 건넨 ‘가호’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했다.

“데바를 상대할 생각이잖아. ‘가호’ 없이는 무리야. 내 것을 나눠 줄 수도 있지만, 기존의 ‘가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덮어씌우는 건 불가능해. 인간의 몸으로는 견디지 못할걸.”

에단이 새로운 ‘가호’를 은하에게 건네기 위해서는 쌍아궁, 고양이와의 계약이 완전히 종료되어야 했다.

다만 고양이와 은하 둘 중 한 명이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 이상, 계약을 동결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종료 자체는 불가능했다.

가만히 에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건데?”

비단 ‘가호’나 데바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양이를 되찾는 건 은하의 목적 중 하나였다.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

두꺼운 구름이 해를 가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방 안에 어둠이 드리웠다. 그 가운데 에단의 붉은 눈이 선연하게 빛났다.

“자, 은하. 이제 네가 선택할 차례야.”

입가에 미소를 더한 에단은 턱을 살짝 올려 은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믿고 따라올 건지, 아니면 그걸로 내 심장을 찌를지 말이야.”

양산 끄트머리는 에단의 왼쪽 심장을 향해 있었다.

은하가 조금만 힘을 주면 날카로운 양산은 그대로 그의 가슴을 관통할 것이다. 그러나 에단은 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은하의 행동을 관찰했다.

현재 은하는 고양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일 에단이 고양이를 되찾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문제는…….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어.’

다만 은하는 에단이 조디악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아군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만일 에단이 은하를 죽일 생각이었더라면 지금까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한 적어도 이런 거짓말로 저를 속여서 그가 얻는 이점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스르륵…….

은하가 천천히 아래로 양산을 내리자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믿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돼?”

살짝 열린 창문 새로 바람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로 커튼이 둥글게 부푸는 가운데 은하가 입을 열었다.

“널 따라갈게.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꿰뚫듯 은하를 향해 있던 붉은 두 눈이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휘었다.

“얼마든지.”

* * *

은하는 시우가 있는 늑대 길드 본부를 찾았다.

뉴스를 통해 그가 제주도에서 수색을 마치고 본부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였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늑대 길드답게 건물 크기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거대한 큐브 형태로 지어진 그것은 한쪽 단면이 통째로 유리로 되어 있는데,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는지 내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위압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 이목을 끄는 건축 양식으로 현재는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고 들은 바 있었다.

번쩍번쩍하고 웅장한 외관처럼, 보안 검사 역시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로비까지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이상 내부로 진입하려면 특별한 신분증이 있어야만 했다. 망치 길드 본부 방문 시 골든 카드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은하의 경우,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현재 늑대 길드에 근무하고 있는 인물 중 백랑과 흑염의 프린세스의 관계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으니.

은하의 얼굴과 차림이 무엇보다 확실한 신분증이었다.

‘길드장실은 38층이라고 했지.’

늑대 길드의 간부급 이상만 탈 수 있다는 특별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LED에 떠오른 층수가 점차 올라가는 동안, 은하에게 표정 변화는 없었다. 다만 은하는 자신이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고 주먹에서 스르륵 힘을 뺐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작게 심호흡했다.

아연의 말에 따르면 백랑은 정부와 합세하여 제주도에 수색조를 파견했고 이준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라면 수색이 일시적으로든 완전히든 종료되었다는 뜻이었다.

늑대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길드였고 시우는 그곳의 주인이다. 그만큼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여 수색 작업에 착수했을 테니, 늑대라면 이준을 되찾아 오거나 하다못해 행방의 단서라도 찾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은, 늑대조차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왔다면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기대 반 초조 반으로 38층에 도착한 은하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 남쪽 면에서는 햇살이 파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외부가 훤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된 복도 바닥은 워낙 잘 닦여 있어서,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그대로 반사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38층에는 길드장실 외에 다른 방은 없는지 복도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었다. 쉽게 길을 찾은 은하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길드장실로 향했다.

“……예? 지금 차 헌터님 댁으로 가시겠다고요?”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휘였다.

“그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

이어서 들려온 것은 시우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함께 길드장실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괴도에게 부탁하고 돌아오신 것이 아닙니까? 아직 그쪽에서 연락은…….”

“없어. 그리고 어차피 기다려 봤자 연락이 오지도 않을 거고.”

“네? 어째서입니까?”

“괴도니까.”

시우의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잠시 대화가 끊기는 듯싶었다.

보아하니 시우와 제휘는 지금 은하의 오피스텔로 향하려는 상황인 듯했다. 그럴 필요 없이 은하가 여기까지 왔으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그대로 길드장실을 향해 걸어가려던 은하는 다음으로 들려오는 대화 내용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대표님, 그럼 그건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두고 가야지.”

“하지만…… 차 헌터님께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보인다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묘한 얼굴로 길드장실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리는 순간,

“비록 왼쪽 팔뿐이지만 전해 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차 헌터님의 유일한 옛 동료잖습니까.”

은하가 멈칫 굳었다.

‘뭐라…… 고?’

자신이 방금 무엇을 들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다. 마에스트로가 선배의 유일한 옛 동료이기 때문에.”

시우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선배는 지금도 충분히 큰 짐을 지고 있어.”

은하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하지만 대표님.”

“박제휘.”

시우가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제휘를 불렀다. 제휘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문 너머로 바스락대며 겉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워낙 작은 소리였지만 은하의 청력에 이 정도 거리면 그런 미미한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잠깐.”

문득 옷을 챙기는 소리가 멎더니 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있었나?”

“예? 아니오, 오늘은 아무도─.”

뚜벅뚜벅, 그의 걸음 소리가 문과 가까워졌다.

벌컥 문을 젖힌 시우는 푸른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고 복도를 확인했다.

“…….”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그것은 기분 탓이었던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시우는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향했다.

[35 ▼]

엘리베이터는 35층을 지나고 있었다. LED에 표시된 층수를 확인한 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

한 발짝 늦게 길드장실을 나온 제휘가 시우를 뒤따라왔다.

“……꼬였군.”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린 시우는 손으로 눈을 덮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희미하게 남은 이 향기. 개의 화신인 만큼 남다른 후각을 가진 시우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선배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체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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