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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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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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별을 먹는 별 (3)
2023.03.31.
아스트는 천칭궁으로 심판에 관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가 ‘수감자’로 지정한 존재를 사슬에 묶어 지하 미궁에 가두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둔 수감자의 수가 많을수록, 혹은 그 개체가 강할수록 아스트는 그 힘의 일부를 제 것으로 부릴 수 있었다.
데바는 에단이 쇠약해진 틈을 타 아스트에게 그의 힘을 넘긴 것이었다.
그로부터 영겁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지하 미궁에서 에단은 복수의 날만을 고대하며 틈틈이 힘을 키웠다.
물론 생명체라고는 거의 없는 그곳에서 에단이 제대로 된 잠을 먹는 일은 없었다. 7일마다 찾아오는 ‘집행자’ 미노타우로스가 유일한 먹이다운 먹이였다.
다만 온몸이 사슬로 묶여 있는 탓에 놈을 완벽하게 제압하거나 재울 수 없었던 에단은 약간씩의 흡수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힘겹게 조금이나마 잠을 먹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곯아떨어져 버리면 그대로 힘이 누수되어 말짱 도루묵이었지만 말이다.
“으, 으아…… 사, 사람이!”
“뭐야, 넌.”
“사, 사, 살려 주세요!”
아주 가끔씩 아스트가 가둔 인간, 새로운 수감자가 찾아오는 날만이 그나마의 행운이었다.
에단을 묶고 있는 사슬은 조디악이 아닌 자는 풀 수 없는 방식이었으니 비록 그들에게 해제를 부탁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인 그들은 미궁에서도 간간이 잠을 청했고 그것이 곧 에단의 포식으로 이어졌다.
다만 안타깝게도 지하 미궁은 인간이 버티기에 그리 녹록한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에 갇힌 대부분의 인간은 미궁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죽거나 미쳐 버리곤 했으니 말이다. 간혹 조금 오래 버티는 자가 나타났다 싶으면, 7일째 되는 날 집행자 미노타우로스에게 죽어 버렸다.
하나같이 쓸모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에단은 미노타우로스에게 속수무책으로 묵사발이 나 버린 인간의 시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로부터 또 시간은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쇠약해진 에단은 집행자를 상대하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아니, 사실은 그냥 귀찮아졌다.
힘을 비축하는 일은커녕 식사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기운이 없고 의욕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에단은 그냥 잠만 자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잠을 자면 몽마에 의해 힘이 누수된다는 건 알지만 어차피 쌓아 둔 힘도 먼지 한 톨만 한 정도였다.
수면 시간이 늘어나 힘이 전부 누수되면 소멸할지도 모르지만, 이쯤 되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영영 나갈 수 없다면 복수는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지독한 굶주림과 지루함을 영원히 견딜 바에는 그냥 편안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 했다.
죽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살 의미도 없는, 그런 무기력한 나날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에단의 잠을 깨운 건 웬 구두 소리였다.
“……뭐야.”
스르륵 고개를 든 에단은 눈앞의 여자를 삐딱하게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 여자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그것이 은하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구경거리가 생긴 에단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저 드레스는 어디선가 본 듯한 디자인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분명 쌍아궁의 언니 쪽이 저런 종류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이전에 이곳에 떨어졌던 여타 인간들처럼, 그녀 역시 7일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 뻔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변 몬스터를 죽여 그 살코기를 갈무리해 온 그녀는, 지겹도록 울려 대는 에단의 배 소리에 성큼성큼 다가와 익힌 고기를 내밀었다.
“……뭐야.”
“먹어.”
“이걸 내게 줘도 알려 줄 건 없어.”
“알아. 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녀는 던지듯이 툭, 고기를 내밀었다.
가늠할 수도 없이 긴 시간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던 탓일까. 코끝에 훅 다가온 고기 냄새에 절로 목젖이 꿀렁였다. 비록 그것이 몬스터의 고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에단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웠다.
고기는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비렸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맛본 고기는 무척이나 따듯했고, 부드러웠다.
이후에도 그녀는 에단에게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단이 그녀에게 미궁을 탈출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 몫으로 챙겨 온 고기까지 에단에게 건네거나, 상처가 곪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에게 직접 고기를 찢어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이상한 여자였다.
에단은 이 이상한 여자의 이름이 궁금했다.
“에단.”
작게 입을 열자 새까만 동공이 이쪽을 향했다. 에단은 저도 모르는 사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 에단.”
그러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은하.”
늘 무표정이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인 미소였기 때문일까, 에단은 미소가 걸린 그녀의 입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은하야.”
이후 두 사람은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 에단은 이 지루한 곳에서 이토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녀가 미궁에 갇힌 지 7일째 되던 날, 에단은 은하가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라는 물건을 통해 ‘사진’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라, 이거 너네. 너 언제 여기 들어갔어?”
“들어간 게 아니라 사진을 찍은 거야.”
“옆에는 누구야?”
“옆에는…….”
말끝을 흐린 은하는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액정을 쓸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패밀리.”
패밀리? 에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은하는 그것이 ‘가족’이라는 뜻이라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단은 데바를 떠올렸다.
‘난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에단에게 가족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만일 가족이라는 것이 있었더라면 지금 눈앞의 그녀처럼 저럴 수 있을까. 저런 식의 미소를 지어 가면서 소중한 듯, 애틋한 듯 매만질 수 있을까. 에단은 그게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너는 살아 있는 편이 재미있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변덕이었을까. 에단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쿠우우우웅─!
미궁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행자’가 나타나기 직전의 신호였다.
에단은 은하에게 도망갈 만한 장소를 알려 주었다. 비록 탈출구는 아니었지만 그곳에 몸을 숨긴다면 목숨은 연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또다시 에단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은하는 도망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에 휘말릴 뻔한 에단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
콰직─!
미노타우로스의 창에 의해 은하의 왼쪽 어깨가 뚫려 버렸다.
“너, 왜, 도대, 체…….”
에단은 그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한낱 인간이 저를 감싸고자 몸을 던진 상황 자체도 우스웠지만,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식량을 먹지 않고 제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그랬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그녀와 관련한 일은 모조리 말이다.
쿨럭,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어깨에 꽂힌 창끝을 세게 거머쥐었다.
“말했잖아.”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세게 뽑아냈다.
촤아악! 창이 뽑히며 사방으로 붉은 피가 흐드러지듯 튀었다. 그 앞에서, 은하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하게 웃었다.
“나, 헌터라고.”
그 미소 앞에서, 에단은 비로소 입을 닫았다.
그 이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에단이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못에 박혀 있던 손발이 자유로워져 있었다.
“나 이제 죽어.”
에단의 말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은하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그 못은 출혈을 막아 주는 역할이었거든. 그게 없으면 출혈을 멈출 방법이 없어.”
“내 상처는 네가 치료해 준 거라며. 네 건 못 하는 거야?”
“응. 못 해.”
“왜?”
“그게 벌이거든.”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제 미궁 생활도 꽤 지긋지긋했으니까. 못을 이렇게 쉽게 빼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진즉에 이렇게라도 할 걸 그랬다.
태초의 별 주제에 과다 출혈로 죽는다는 건 꽤 볼품없는 마지막이었지만, 이 지루하고도 정적인 삶을 끝내는 일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끊임없이 잠만 자다가 온 힘이 누수되어 소멸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이편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아스트 녀석의 능력은 지하 미궁에 가둬 둔 ‘수감자’의 힘을 흡수하는 거였지.’
에단을 이곳에 가둬 둔 이후 그의 힘을 제 것인 것처럼 연기하고 다녔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겠지. 본래는 비실비실한 놈이니까. 에단이 미궁에서 소멸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껍데기만 남을 녀석을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에단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살고 싶지 않아?”
은하가 물었다.
“바깥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너한테는 없어?”
그 물음에 에단이 얼핏 굳었다.
하고 싶은 일이 왜 없을까.
제 뒤통수를 치고 이딴 곳에 처넣어 버린 데바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나가서 비린 고기가 아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입에 넣고 싶었다.
은하가 말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목에 금빛 사슬이 채워져 있는 이상 에단은 미궁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그 사슬은 한 번 채워지면 결코 풀리지 않았다. 오로지 조디악만이 풀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하가 사슬을 풀었다.
에단은 그 순간 깨달았다.
저 드레스. 그리고 양산. 그녀 주변에 맴도는 미약한 별의 기운과, 사슬을 해제할 수 있는 자격까지.
‘그렇군.’
그녀는 조디악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에단은 그녀에게 ‘가호’를 전한 조디악에게 호기심이 동했지만 그 순간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이 지나 에단은 비로소 미궁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까.
은하는 원래 있던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에단은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낼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 네뷸러의 주인을 없애버리는 방법이었다.
“돌려보내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나도 데려가.”
잠시 망설이던 기색의 은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가 정말 날 내보내 준다면, 널 데려갈게.”
은하의 약속을 받은 에단은 아스트를 찾아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에단을 만난 아스트는 찢어질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동요했다.
“다, 당신이 어떻게…….”
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이유 따위 없었다. 에단은 아스트를 단숨에 처리했다.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7궁, 천칭궁(天秤宮)이 봉쇄됩니다.]
털썩─
“…….”
바닥에 쓰러진 아스트의 시체를 응시하던 에단의 눈이 문득 묘한 빛을 띠었다.
미궁에서 오랜 세월 동안 힘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힘이 솟았다.
어째서지? 에단은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 상관없나.’
이후 아스트의 네뷸러가 봉쇄되면서 은하는 시스템의 원칙에 따라 본래 그녀가 속한 ‘채널’인 지구로 돌아가게 되었고, 에단은 그런 은하를 따라갔다.
지구라는 곳은 에단이 봐 왔던 그 어떤 차원보다 아름답고 푸르른 곳이었다.
더는 네뷸러에 있고 싶지 않아 변덕으로 동행을 제안한 것이었지만, 막상 와 보니 에단은 지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은하와 함께 한 집에서 지내는 생활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방출하며 뽐내는 일 외에, 처음으로 그에게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게 생긴 것이었다.
또한 에단은 은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면 잠을 자더라도 몽마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랬다.
몽마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수면 상태에서 자신의 힘이 누수될 걱정이 없었다. 즉 굳이 타인의 잠을 먹지 않더라도 힘을 비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선택적 불면증에 시달리던 에단은 은하 옆에서는 틈만 나면 잠이 들었다. 은하가 또 자느냐고 혀를 찰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에단은 은하와 앞으로도 쭉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지구에서,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미 데바가 다음 계획의 실행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뒤였다. 세계 곳곳에 있는 저 11개의 탑이 그 증거였다.
탑의 개수를 보아하니, 오래전 에단이 죽인 여러 조디악을 대체할 만한 별들을 어디에선가 주워 온 듯싶었다.
다만 열두 자리를 모두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에단은 죽은 것이 아닌 추방된 존재였으니 말이다.
‘열두 개의 별은 낙원을 창조하겠다는 놈의 계획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야.’
그것은 시스템이 데바에게 요구한 일종의 퀘스트였다.
시스템을 만든 것은 데바 본인이었지만, 그는 시스템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시스템은 곧 질서를 뜻했으니까.
질서란 차원을 생성하고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 질서가 무너진 공간은 세계라고 부를 수 없다.
즉 데바가 시스템을 무시하게 되는 순간 네뷸러는 낙원이 아니라 ‘혼돈’이 될 것이다.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리란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낙원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인 데바는 시스템을 함부로 제어하거나 삭제, 수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우스운 일이지. 자신이 만들어 낸 질서에 자신이 묶인 꼴이나 다름없으니.’
어쨌든 천체를 수놓는 황도 십이궁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낙원은 완성되지 않는다.
즉 에단이 살아 있는 한, 또 데바의 뜻에 따르지 않는 한, 데바의 계획에는 ‘구멍’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꽤 재미있는 복수가 가능할 것 같았다.
째깍째깍─
은하의 침실, 다 먹고 남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이로 질겅질겅 씹던 에단이 툭 하고 그것을 입에서 빼내었다.
은하는 여전히 그에게 양산을 겨눈 채였다.
“헌터라고 했던가.”
에단이 중얼거렸다.
지하 미궁에 갇혀 있었을 당시, 은하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헌터? 그게 뭔데?’
‘내 직업이 뭐냐고 물었잖아. 난 몬스터…… 괴물을 사냥하는 일을 해.’
‘괴물을 죽이는 사람은 다 헌터라고 불러? 나도 사냥을 좋아하는데, 그럼 나도 헌터려나.’
‘달라. 괴물을 죽이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야.’
손바닥 위에 피워 낸 흑염을 거둔 은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괴물을 죽여서 사람을 구하는 일. 그게 헌터라고 했지?”
에단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은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직 에단에게 겨누었던 양산을 거두지 않았던 탓에, 에단의 가슴팍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깊은 상처가 났다.
“……!”
움찔 놀란 은하가 반사적으로 양산을 슬쩍 거두려던 찰나, 에단이 그것을 덥석 부여잡았다.
하얀 손목을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단은 피처럼 새빨간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나도 한번 해 보려고,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