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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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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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별을 먹는 별 (2)
2023.03.30.
“결론만 말할까?”
에단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끝으로 닦으며 말했다.
“난 이제 어느 쪽도 아니야. 조디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와 같은 사람도 아니지.”
그렇다면 너는 과연 나를 무어라고 정의할까.
에단은 궁금했다. 그녀가 자신을 적으로 간주할지, 아군으로 여길지 말이다.
에단이 보아 왔던 은하는 무심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사실은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에단이 전(前) 조디악이라고 할지언정 그마저도 품고자 할지도 몰랐다.
반면 그녀는 헌터라는 직업에 대한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쩌면 지난 관계나 정 따위를 무시하고 에단을 처치하고자 할지도 몰랐다.
‘넌 어떻게 할 거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가와는 달리 에단의 붉은 두 눈은 관찰하듯 은하의 표정 변화를 날카롭게 살폈다.
그런데 은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가 예상한 어떠한 것도 아니었다.
“나랑 똑같네.”
“……뭐?”
“나도 어느 쪽도 아닌 건 마찬가지라서.”
에단은 은하를 빤히 응시하다가 알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네가 쌍아궁과 계약했기 때문이겠지.”
그러자 은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가 전 조디악이라면 쌍아궁에 대해서, 이 드레스와 양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에단은 은하가 침대 곁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우아한 양산’을 손에 쥐었다. 날카로운 양산 끄트머리가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받아 화살촉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짐작은 하고 있었거든.”
“드레스와 양산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넌 나를 묶고 있던 사슬을 해제했잖아. 그건 일반 인간들은 풀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특별한 사슬이었거든.”
빙긋 웃은 에단은 양산을 은하에게 슥 내밀었다. 은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양산을 건네받았다.
“내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리네.”
“너도 알고 있잖아.”
에단의 붉은 눈이 빤히 은하를 향했다.
“원래의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까?”
에단의 물음에 은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은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언노운 게이트에 머무른 탓에 시스템이 그녀를 읽어 내지 못하는, 일종의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양이와의 계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은하는 몬스터로 오해받았던 적도 있고, 최근에는 조디악의 끄나풀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때로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 상관없어.”
짧게 답한 은하가 에단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난 이제 선택했으니까. 내가 어느 쪽에 설지.”
자신이 누구와 계약을 했든, 일반적인 인간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쌍둥이 자매의 비극.
이준의 상실.
세상의 변화.
그 모든 것이 조디악, 데바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난 데바를 죽일 거야.”
은하는 나지막이, 그러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너도 선택해, 에단. 지금 여기서.”
휙.
은하는 마치 장검을 겨누듯 양산 끄트머리를 에단에게 겨누었다.
“아군이 될 것인지, 적이 될 것인지.”
“…….”
에단의 붉은 시선이 제게 겨누어진 양산 끄트머리에 향했다. 피식, 하고 작게 웃은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푹.
은하의 양산 끄트머리가 그대로 그의 가슴에 닿았다. 가슴팍이 찔린 걸까, 에단의 상의 위로 살짝 핏자국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은하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양산을 거두지는 않았다.
“안심해, 은하. 나와 너의 목적이 같은 한, 우리가 적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목적?”
“그래. 데바를 죽이는 것.”
빙긋 웃은 에단이 손을 뻗어 은하의 검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게 내 목적이거든.”
* * *
아주 오래전.
조디악이나 황도 십이궁이라는 명칭이 채 생겨나기도 전,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별이 눈을 떴다.
그들은 언제부터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였고 언제까지 그래야만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주변은 오로지 캄캄한 어둠뿐이었지만 두 별의 탄생으로 주변은 점차 밝아졌다. 이윽고 두 별은 자신들을 제외하고도 저 먼 곳에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자신들에게는 그들을 압도할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별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른 생명체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다.
그들은 ‘통로’를 만들어 그들이 있는 곳과 별개의 차원을 연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통로가 탑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부터였다.
공허했던 그 공간은 점차 ‘세계’로서 형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두 별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창조 공간을 네뷸러라고 칭했다.
별에게 선별된 생명체는 그들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차원을 넘어와 네뷸러의 주민이 되었고, 그중 눈에 띄는 몇몇의 존재는 태초의 별에게 ‘가호’를 전해 받아 ‘조디악’이 되었다.
이후에도 침략이 거듭되며 네뷸러는 착실히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이라는 질서가 생기고, 두 별에게도 이름이라는 것이 생겼다.
─데바, 그리고 에단.
그것이 태초의 별의 이름이었다.
데바와 에단은 서로를 형제라 칭하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뜻을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두 별의 뜻이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공허하고도 황폐한 공간 가운데, 거대한 성이 쓸쓸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뾰족한 첨탑 지붕에 누워 단잠을 청하던 에단이 스르륵 눈을 떴다.
“이번에 거해궁(巨蟹宮) 자리가 비게 되었다.”
형제의, 데바의 목소리였다.
“할 말이 있을 텐데, 에단.”
“글쎄. 딱히 없는데.”
“둘러대지 마라. 네가 별을 잡아먹고 있다는 걸 모를 줄 알고. 이게 도대체 몇 번째지.”
“글쎄. 다섯 번째였던가.”
“대체할 인원을 구하려면 다음 계획까지 쭉 공석으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게 얼마나 타격이 큰지 에단, 네놈은 알고 있을 텐데.”
“그깟 조디악, 또 다른 차원에서 적당한 놈으로 구하면 되잖아. 여태까지 그랬던 대로 말이야.”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한 가벼운 말투. 에단은 여상스러운 미소를 띠며 데바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네게 중요한 건 네뷸러도, 조디악도 아니지 않나?”
그러자 후드 그늘 아래 자리한 데바의 입가가 단단하게 굳었다.
“……더는 너의 망나니짓을 용인할 수 없겠구나.”
“신기한데.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다니 말이야.”
지붕에 드러누워 있던 에단은 휘릭 가볍게 상체를 일으켰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데바. 나와의 약속을 잊었어?”
약속. 그것은 처음 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정한 것이었다.
데바의 목적은 기존 차원을 파괴하여 새로운 낙원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단의 목적은 달랐다.
에단의 엄청난 힘은 잠, 즉 수면에서 왔다. 타인의 잠을 먹을수록, 그리고 그 양과 질이 우수할수록 에단은 천장이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같은 조디악마저 두려워할 수준으로 말이다.
다만 에단의 능력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타인의 꿈이나 수면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의 것은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잠드는 순간 몽마(夢魔)에 덮쳐져 끔찍한 꿈을 꾸게 되고, 그 순간 힘이 빠져나갔다.
그래서 스스로의 잠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타인의 잠을 지배하고 흡수하는 쪽을 택했다. 그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급처가 바로 네뷸러였다. 에단에게 네뷸러란, 그곳에 있는 생명체에게서 잠을 흡수하는 일종의 ‘양식장’이었던 것이다.
데바는 네뷸러를 공급처로 삼겠다는 에단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 전제하에 두 태초의 별은 함께 계획을 실행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데바는 우성인자라고 판단되는 아주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생명체는 모조리 죽이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단에게 썩 기쁜 일이 아니었다.
“너 때문에 내가 요즘 아주 비실비실하거든. 웬만한 양분으로는 배가 안 찰 정도야.”
에단은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배를 감쌌다.
“그래서 네 별을 좀 먹었는데, 나도 사실 좀 놀랐어. 힘을 조금 흡수했을 뿐인데 바로 소멸해 버리지 뭐야.”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던 에단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붉은 눈을 들어 데바를 바라보았다.
“왜? 설마 내게 굶어 죽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약속을 어긴 건 네 쪽이니까.”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다. 네뷸러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 기다려라, 에단. 나는 약속을 잊지 않았으니.”
“글쎄.”
에단이 뚜벅뚜벅 데바에게 다가가더니 삐딱하게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피처럼 새빨간 홍채, 그 가운데 가로 형태의 해괴한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에단.”
거리가 가까워지자 후드 속에 숨어 있던 데바의 눈동자가 보였다.
별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는 은색 눈동자. 홍채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이 미약한 분노를 머금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에단은 데바의 어깨를 치고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첨탑 끝에 위태롭게 서서 뒤로 돌았다.
“낙원을 만들든 모래성을 짓든 네 맘대로 해. 난 네 소꿉놀이에 더는 어울려 줄 생각이 없어.”
“에단, 멈춰라.”
에단이 첨탑을 뛰어내리기 직전, 데바가 그를 저지했다.
“난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에단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그딴 건 없어.”
휘이잉─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데바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에단만큼 굳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넌 내게 속해 있다.”
데바가 살짝 고개를 들자 그의 기괴한 눈동자가 다시금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드러났다.
“너와 나는 유일한 형제이자 이해자다. 네가 아니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는 마치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단, 너와 나는 같다. 같아야만 해.”
“네가 너와 같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에단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소름 돋네.”
그렇게 그가 첨탑 아래로 발을 내미는 찰나였다.
우뚝─
에단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한 감각이었다.
이곳은 데바가 지배하고 있던 공간. 원래라면 같은 태초의 별인 에단에게 그의 지배가 통할 리 없었지만, 오랫동안 힘을 비축하지 못했던 당시의 에단은 그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무슨 짓─.”
에단이 데바를 휙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라.”
차르륵!
어디선가 나타난 금빛 사슬이 에단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옭아맸다.
‘아스트……?’
두 눈을 무섭게 뜬 에단이 사슬이 나타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몇몇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디악, 천칭궁(天秤宮) 아스트와 보병궁(寶甁宮) 라스퀼이었다. 그들을 눈에 담는 순간 에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그런 거였군.
오늘 데바가 이곳으로 저를 부른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가족 운운하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스트는 지하 미궁에 에단을 가두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고, 라스퀼은 에단의 남은 힘을 봉인하여 자신의 ‘푸른 성배’에 가두었다.
“너는 네뷸러를 벗어나 아스트의 지하 미궁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다.
다쳐도 다치지 못하고, 죽어도 죽지 못하며, 먹어도 배가 부르지 못할 것이니.
너는 끝이 없는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며 현재에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저주와도 같은 데바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
그들이 선 성의 첨탑이 무너지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네게 내리는 형벌이다.”
각 차원을 넘나들며 완벽한 차원을 창조해 내는 일은 데바에게도 쉽지 않았다. 데바는 그 과정에서 다른 별들, 즉 조디악의 힘을 필요로 했다.
데바는 제 뜻을 함께하고 조력해 주는 조디악들을 ‘가족’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들을 ‘나의 아이’라 불렀으며 같은 태초의 별인 에단은 ‘형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데바는 같은 태초의 별인 에단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조디악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 에단이 보기에 데바가 하는 일은 그저 그럴듯한 흉내만 내는 소꿉놀이에 불과했다.
다만 어째서 그가 이런 재미없는 소꿉놀이에 집착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 물어 본 적도 없다.
에단은 지하 미궁에 갇히기 직전, 붉은 눈을 치켜뜨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 짓을 한다고 해도 난 네 소꿉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 따위 없어.”
아득한 지하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에단은 붉은 눈을 새빨갛게 번뜩였다.
“너는 끝까지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거다, 데바.”
쿠구구궁─
그것을 끝으로 에단은 아스트의 지하 미궁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