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1)화 (241/306)


#241. 별을 먹는 별 (1)
2023.03.29.


제주도 사변이 일어나고 이틀이 지났다. 한라산이 무너지고 그곳에 정체불명의 성이 생겨났다는 건 지상파 방송을 통해 전국, 아니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정부의 대응이 빠르고 효율적이었기에 규모에 비하여 다행히도 사상자는 적었다. 다만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당시 한라산에 있었던 가란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그곳에서 인간 모습을 한 남자가 상공을 부유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그가 이상한 예언 같은 것을 남겼다고 전했다.

「구원의 날, 성이 완성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 도래할 구원을 준비하라…… 라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현재까지는 무엇도 명확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 ‘성’이라는 건 한라산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그 백색 성을 말하는 거겠죠.」

TV를 응시하고 있던 아연은 힐끔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이틀 내내 정신을 잃은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은하가 작은 신음을 흘린 것이었다.

아연의 기준으로는 꽤 오랜만에 본 은하가 제주도에서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이틀 전의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시우는 벼락같이 은하의 오피스텔을 방문했고, 아연에게 연락해 그녀를 돌봐 달라 부탁했다.

은하의 오피스텔로 온 아연은 정신을 잃은 은하뿐만 아니라 웬 분홍색 머리 남자까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선배가 일어날 때까지 곁을 보살펴 줘.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선배가 깨어나면 바로 내게 연락을 줬으면 해.’

‘싫어. 왜 명령질?’

‘부탁한다, 괴도.’

그날 시우는 아연에게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솔직히 그때는 좀 놀랐다. 그렇게 잘난 양반이 제게 그런 저자세를 취할 줄은 몰랐기도 했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은하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은하를 돌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연이라고 시우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S급 헌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대 규모 길드인 늑대의 주인, 더군다나 헤드 헌터이기까지 했으니까. 이러한 비상사태에서 그를 찾는 자는 수두룩할 테다.

‘……왜 이래? 님이 부탁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었음.’

‘고맙다. 돈은 추후에 지불하지.’

‘필요 없어. 언니 일이니까.’

아연에게 은하를 맡긴 시우는 분홍색 머리 남자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은하가 깨어난 것이다.

“괜찮아요, 언니? 이거 몇 개게요? 잘 보여요?”

손가락 네 개를 세우고 앞에서 휙휙 휘두르는 아연. 은하는 마른 입술을 움직여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여기는.”

“언니 집이에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아, 옷은 내가 갈아입혔으니까 걱정 마요.”

은하는 아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몇 번이나 반복하여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돌아오며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아연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기를 수 초, 은하는 곧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백이준……! 백이준은?”

은하의 다급한 물음에 아연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은하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정부도 그렇고, 백랑까지 나서서 수색조를 파견해서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한라산 상태가 좀 그렇다 보니 제대로 된 수색이 빡센 모양인가 봐요.”

“…….”

아연의 말에 황금색 군번줄을 쥐고 있던 은하의 손이 아래로 힘없이 추락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던 아연은 곧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 우선! 언니 배고프지 않아요? 이틀 내내 누워 있었잖아요. 아까 매니저 아저씨가 죽 사 왔다고 하던데, 내가 가져올게요!”

이후 먹을 것을 가져온 아연은 은하에게 그녀가 정신을 잃은 이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했다.

아연의 말에 따르면 하늘이든 바다든 제주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으며,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정해진 일정에 행하는 탑 공략 외에 뚜렷한 활동이 없었던 헤드 헌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나, 각국 정상들이 모인 국제회의가 밥 먹듯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세계 각지에 나타난 11개의 탑 중 2개의 탑이 빛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상한 빛은 등대 불빛처럼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 빛이 한라산, 아니 그 하얀 성을 향하고 있대요. 한국에 있는 탑처럼 이미 봉쇄된 탑들은 다행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하기는 하는데……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죠.”

아연은 침대에 걸터앉은 은하에게 그리 설명했다.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11개의 탑이 모두 빛나기 시작할 때 재앙이 시작되리라는 의견이 가장 지배적이라나.”

“…….”

은하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그녀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아니, 듣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공허한 은하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아연은 시우에게 은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언니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미국에 있든 중국에 있든 한걸음에 달려올 기세였잖아.’

그렇게 되면 언니도 귀찮아질 테고.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우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라고, 아연은 판단했다.

‘애초에 약속한 건 언니를 돌보는 일이었지, 연락 주기로 한 건 별개거든.’

지금은 무엇보다 은하의 안정이 우선이라 판단한 아연은 거의 그대로인 죽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깨어난 건 일단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있을게요. 우선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쉬는 게 좋을 듯.”

“…….”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니, 난 일단 내일쯤 다시 올게요. 나 없다고 외로워하지 말고요.”

장난스럽게 툭 농담을 던져 보았지만 은하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여전히 없었다. 아연은 머쓱한 얼굴로 그릇과 수저를 트레이 위에 올렸다.

“언니.”

방을 나가기 직전 아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언니는 잘못한 거 없어요. 알겠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달칵, 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방 안, 은하는 자신의 목 언저리로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황금색 군번줄. 그곳에 새겨진 이름 세 글자를 눈에 담는 순간,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연이 돌아온 걸까. 어쩌면 제휘일지도 모른다.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은하는,

“안녕, 은하.”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눈을 찌를 만큼 길고 곱슬곱슬한 분홍색 머리카락, 특이한 동공 형태에 조금 졸린 기색의 붉은 눈동자는 어딘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에단.”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그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던 남자가 서 있었다.

바다에 빠졌을 당시, 마지막으로 붉은 눈을 보았던 기억은 왜곡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까 그 애는 돌아갔나 보네.”

작게 하품을 한 에단은 은하의 곁에 놓인 미니 테이블에 검은 비닐 봉투를 툭 던지듯 내려 두었다.

“먹어. 아이스크림이야.”

“…….”

은하는 까만 눈으로 비닐 봉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시선을 들어 에단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은하는 아이스크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에단은 생각했다.

“안 먹어? 맛있는데.”

“그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아아, 잃어버렸던 것 좀 찾으러.”

“……그게 다야?”

“응.”

대수롭지 않은 듯 짧게 답한 에단은 봉투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그러더니 유유자적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에단 너도 제주도에 있었던 거지?”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겠지. 아쉽게도 난 다른 곳에 있었거든.”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곳에 있다가 제주도로 오게 됐는데?”

은하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가면서 새하얀 침대 시트 위에 옅은 주름이 졌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던 것 아닌가?”

“…….”

아이스크림을 먹던 에단이 힐긋 붉은 눈을 은하에게로 돌렸다. 은하는 에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에단은 곧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그래, 있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한 발짝 늦은 모양이더군.”

거기까지 말한 에단은 조금밖에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볼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아, 다른 맛으로 살 걸 그랬나. 이 맛은 별로네. 은하 네 것도 내가 먹어도 돼? 딸기 맛인데.”

에단은 오랜만에 보아도 은하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조금 졸린 듯 나른한 목소리에 가볍고 너스레를 떠는 듯한 말투.
은하는 신난 기색으로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뜯기 시작한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디악을 만났어.”

멈칫.

은하의 말에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뜯던 에단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아주 작은 반응이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감지한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루나라고 하는 여자아이였지. 널 알고 있는 눈치더라.”

“흐응, 그렇구나.”

관심 없다는 얼굴로 흘러가듯 대꾸한 에단은 “오? 딸기 맛이 훨씬 괜찮네.” 하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그러나 은하는 그의 페이스에 휘둘리지 않았다.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루나에게 데바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어. 그리고 난 제주도에서, 난 데바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목격했지. 놓쳐 버리고 말았지만.”

데바라는 이름에 에단의 입가가 매섭게 굳는 듯했다. 은하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은하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침대 시트 위의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대답해 줘, 에단.”

“뭘?”

그의 붉은 눈이 다시 은하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은하는 작게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조디악인 거지?”

“이전에도 비슷한 걸 물어보지 않았나? 그때 난 분명 아니라고 답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

“지금의 난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자 에단의 눈이 얼핏 가늘어졌다.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내게 묻는 이유가 뭘까?”

아이스크림을 든 손을 살짝 아래로 내린 에단이 가느다랗게 웃으며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시험하고 싶은 거야?”

나를?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붉은 눈이 조금 위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믿고 싶으니까.”

은하의 짧은 대답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넌 날 구해 줬잖아. 벌써 여러 번이나.”

처음 만났던 지하 미궁에서. 그리고 이번 제주도에서. 나머지 한 번은…… 예가임과의 전투 때.

시우는 에단에게 받았다며 망가진 머리끈을 은하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지금도 은하의 서랍장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디악. 그리고 데바. 그건 어쩌면 이 모든 재앙을 이끌고 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에단 역시 조디악이라면 은하는 그와 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와 적이길 바라지 않아, 에단.”

“그건 내가 너를 구했기 때문에?”

“그래. 그리고 난 너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가족?”

에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은하는 그를 응시하는 눈을 잠시도 깜빡하지 않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말해 줘. 네가 조디악인지, 그렇지 않은지 말이야.”

은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붉은 눈이 다시금 초승달처럼 휘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에 은하는 작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렇다면…… 너와 난 더 이상 지금과 같을 수 없겠지.”

째깍째깍─

차갑게 얼어붙은 정적 속 시계 초침 소리가 유유히 흘러갔다.

은하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침대 곁에는 ‘우아한 양산’이 놓여 있었다.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거리에 말이다.

“글쎄.”

이윽고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조디악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굳이 말하자면 조디악이었던 존재겠지.”

조디악이었던…… 존재? 은하의 눈빛이 묘해졌다.

작게 웃음을 흘린 에단이 혀를 길게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느릿하게 핥았다. 요염하게 휘는 붉은 혀에 진득하게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휘감겼다.

“놈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무심코 시선을 든 순간, 은하는 보고야 말았다.

“별을 먹는 별, 이라고.”

──그의 붉은 혀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 그 위에 그려져 있는 무서우리만치 선명한, 까만 ‘X’ 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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