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40)화 (240/306)


#240. 네게 주고 싶었던 것
2023.03.28.


철썩─

파도가 굽이치는 가운데 이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 데바라고 했었지. 놈은 우리를 보고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어. 심지어 은하 너는 녀석을 향해 돌진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야.”

“…….”

“즉 녀석이 이번에 제주도에서 이런 일을 벌인 건 다른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커. 그게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거기까지 말한 이준은 한쪽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야 없잖아. 안 그래?”

그때 뒤에서 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님…….”

힐끗 뒤를 돌아보자 상처를 부여잡고 힘겹게 서 있는 가란과 용병들, 그리고 불안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그들 뒤로는 바다 생명체로 만들어진 거대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직 섬이 완전히 쪼개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서쪽으로 금방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백이준은…….’

은하의 눈이 망설임으로 흐려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이준이 은하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오랫동안 이걸 유지하는 건 지금의 내게도 조금 버겁거든. 버티더라도 최대 10분이야. 아직 두 섬이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준은 가란을 향해 어서 서쪽으로 건너가라는 듯이 눈짓했다. 은하와 이준의 눈치를 살피던 가란은 머뭇머뭇 다른 용병들과 일반인들을 이끌었다.

“미끄러우니 발밑 조심하십시오, 다들!”

“사, 살 수 있어!”

“여보, 얼른!”

살아남았다는 희망에 안도한 일반인들은 지시에 따라 하나둘씩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자, 너도 어서.”

이준은 은하를 재촉했다.

은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왜 내가 아니라 백이준이 이곳에 남아야 하는 거지?

내가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기 때문에? 도와준다는 그의 부탁을 못 이긴 척 받아들였기 때문에? 방금 전, 데바를 쫓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모든 게 내 탓이 아닌가.

“……나도 같이 여기 남을게.”

머릿속의 혼란을 간신히 잠재운 은하가 겨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준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렇게 된다면 내 선택의 의미가 사라지니까.”

은하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이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는 정도의 그저 그런 미소가 아닌, 은하가 기억하던 30년 전의 그 눈부셨던 미소였다.

“헌터가 된 이후 가장 기쁜 순간을 꼽으라면 난 지금을 꼽을 거야.”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돌연 이마에 닿은 차가운 감촉 때문이었다. 멈칫 굳어 버린 은하는 수 초가 지난 후에서야 이준이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백이, 준……?”

그리고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미안, 은하야.”

이러지 않으면 넌 끝까지 이곳에 남고자 할 테니까.

새까만 은하의 홍채 주변이 선홍색으로 은은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은하의 표정이 멍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매혹이었다.

이준이 은하에게 페로몬 능력을 쓴 것이다.

그녀에게만큼은 절대 이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수백 번도 넘게 다짐했었다. 이준은 실수로라도 은하에게 매혹을 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후회는 없어.’

초점이 풀린 은하의 동공에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이준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 담긴 존재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우습게도 기뻤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까딱 잘못하면 은하가 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매혹이 풀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은하는 손을 쓸 수도 없이 바다에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이준은 자신의 목뒤를 매만지더니 셔츠 아래에 숨겨져 있던 군번줄을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은하의 목에 걸었다.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는 상상이야 이전에도 수도 없이 많이 했었다.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상당히 달랐지만, 이준은 그래도 만족했다.

“좀 더 좋은 걸 주고 싶었는데.”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라든가. 은하 너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려나. 이준은 엷게 웃었다.

매혹에 걸린 은하는 눈조차 깜빡하지 않고 멍하니 이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이준의 황금색 군번줄이 반짝였다.

그 순간 수면 위로 달이 떠오르듯 서서히, 그러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만약에 언젠가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우리, 서로의 군번줄은 서로가 맡아 주기로 하자.’

‘군번줄을?’

‘그래. 어느 한쪽이 잘못되더라도 나머지 살아남은 한쪽이 기억해 주는 거야. 우리는 꽤 열심히 살았고 나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핏자국이 선연한 군복을 입은 당시의 은하는 이준을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약속이야, 백이준.’

이번에는 눈앞에 까만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의 군번줄을 목에 건 은하를 가득 눈에 담았다.

이준은 손을 뻗어 은하의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그녀에게 닿는 건 처음이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아쉽다는 듯, 소중하다는 듯 귀 뒤로 쓸어 넘겨 보았다.

후회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녀가 말했던 ‘꽤 나쁘지 않은 마지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워어어─!

미노타우로스의 울음소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은하의 모습을 눈꺼풀 뒤편에 눌러붙이기라도 하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이준은, 이윽고 심호흡하듯 짧고 간결하게 명령했다.

“뛰어.”

그리고.

“죽지 말고 살아남아.”

은하야. 내가 네게 할 명령은, 부탁은 그것뿐이니까.

이준의 명령을 들은 은하는 마치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스르륵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먼저 떠난 가란 일행을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철썩─

그녀의 뒤로 새하얀 파도가 부서졌다. 이준은 비로소 은하가 완전히 점이 되어 저 너머로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그곳에서 시선을 천천히 거두었다.

거의 무너져 내린 산은 이제 가까이서 보아도 성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이준은 산처럼 거대한 성채를 올려다보았다.

쿵. 쿵. 쿵.

거대한 도끼를 든 미노타우로스가 이준을 발견한 듯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살짝 소매를 걷은 이준은 은하가 사라진 방향에서 등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다지 뜨겁지는 않겠군.”

* * *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다.

“거의 다 왔습니다! 땅이 보여요!”

누군가의 외침에 은하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순간, 은하는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거대한 고래의 등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멍한 기색으로 목 언저리를 매만지자 딱딱한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황금색 군번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백이준.’

은하가 홱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리를 놓아 주고 있던 수많은 해양 생물들은 제 역할이 끝났다는 듯 서서히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도 저편으로 한라산이 무너지는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은하는 그제야 한라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성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워어어어─!

이만큼의 거리에서도 뼈마디까지 저릿할 만큼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미노타우로스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 포효가 귀에 닿는 순간, 은하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차 헌터님?”

용병의 부축을 받으며 앞을 걸어가던 가란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얌전히 그들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던 은하가 돌연 검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역주행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 헌터님! 어딜 가십니…… 윽!”

다급하게 은하를 붙잡으려던 가란은 부상의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든 가란은 은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차 헌터님! 차은하 헌터님!”

그러나 은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탓! 탓! 탓!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해양 생물의 등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이준이 있는 한라산 방향으로 정신없이 향했다.

은하의 매혹이 풀렸고, 이준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다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즉 현재 상황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준이 스스로 매혹을 해제하고 있다는 것, 혹은…….

‘더는 스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은하는 반쯤 이성을 잃은 채 다리를 역주행했다.

원래의 은하였다면 이런 무모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준은 은하를 살리기 위한 선택을 내렸다. 그의 선택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무사히 서쪽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은하의 역할이었고, 그건 은하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소장님에 이어 이준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온전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이을 수가 없었다.

“백이……!”

첨벙!

은하는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다에 풍덩 빠져 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허우적대며, 성으로 변모한 한라산을 향해 끊임없이 헤엄쳤다.

“백이준! 안 돼, 백이준!”

손발을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바닷물이 튀고 저 멀리서 가란과 용병들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은하의 귓가에 울리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목소리뿐이었다.

‘난 나보다 차은하, 네가 더 소중하니까.’

그가 만일 잘못된다면 그건 제 탓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도 저를 돕겠다는 이준을 못 이기는 척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지킬 것이라는 결심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희생해서까지 목표를 달성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저는 아무런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 데바는 눈앞에서 사라졌고 제주도는 두 개로 갈라졌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준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속이고 상처를 주더라도 혼자 왔었어야 했는데.

그랬는데, 나는…….

“켈록!”

코와 입 속으로 짠 바닷물이 흘러들어 왔다. 눈이 따갑고 귀가 먹먹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물속에서 미역처럼 온몸을 휘어 감는 탓에 제대로 헤엄칠 수도 없었다.

숨을 제대로 쉬는 일조차 힘들고 눈앞이 아득했다.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씩 바닷속으로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은하의 체력과 마력 역시 많이 소모가 된 상태였던 데다, 매혹의 여파로 아직 몸에 온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까닭이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며 제 몸에서 나온 기포가 꼬르륵, 하고 귓가에 울렸다.

‘이전의 시대와는 다르니까요. 우리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하죠.’

‘어차피 우리로는 지구상의 모든 인원을 구할 수 없어요.’

내가 무모했던 걸까. 틀렸던 걸까.

──그들의 말이 모두 옳았던 걸까.

‘아니.’

바다 아래로 가라앉던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아니야.’

설령 틀린 선택이었다고 할지언정 저는 아직 살아 있다. 아직 바로잡을 시간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준이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니 이곳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잘못’이었다.

소장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다.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보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읏.’

몸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저곳에서 일렁이는 수면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은하는 안간힘을 다해 물살을 가르고 수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덥석─

그 순간 수면을 비집고 나타난 무언가가 은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은하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이건…….’

단단하고 따듯한, 누군가의 손이었다.

촤아악─

물줄기가 흩어지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온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던 은하는 곧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가운데 마지막으로 본 것은.

“…….”

피처럼 새빨간 두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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