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8)화
(238/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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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조디악의 주인
2023.03.26.
제주도 상공, 한 보도국의 헬기.
“시청자 여러분! 사, 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쥔 채 생중계를 이어 나가던 기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를 촬영하고 있던 감독도 카메라를 움직여 헬기 아래의 광경을 렌즈에 담았다.
쿠구구구─
제주도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라산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데요! 뿌연 흙먼지에 뒤덮인 탓에 현재 이곳에서는 자세한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김종식 특파원에 따르면, 현재 서제주에서도 진도 7 이상의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여파 탓에 제주 해안 지방에 대해 해일 주의보가 내렸…….”
한창 보도를 이어 가던 기자가 돌연 다른 쪽으로 “응?” 하고 시선을 돌렸다.
“감독님, 저기! 저쪽 좀 찍어 주시겠습니까?”
기자의 요구에 그를 담고 있던 카메라가 다시금 헬기 아래, 한라산 쪽으로 돌아갔다.
“저기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게 뭘까요? 확대 가능합니까?”
“거리가 먼 데다 흙먼지가 너무 심해서 제대로 찍히지 않습니다만…….”
카메라 감독은 저 괴상한 황금빛 물체를 렌즈에 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던 기자의 얼굴이 돌연 다른 빛으로 변했다.
“자, 잠깐만요.”
그가 카메라 감독의 어깨를 급히 두드렸다.
“감독님, 멀리! 멀리 담아 주십시오!”
“멀리요?”
“예! 여기, 한라산 전체가 보이도록 크게 말입니다!”
감독은 의아한 눈빛을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한라산 전체를 크게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렌즈를 들여다보던 카메라 감독의 눈도 기자의 그것처럼 크게 뜨였다.
무서운 속도로 깎이던 한라산. 하늘마저 뿌옇게 가리고 있던 흙먼지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며, 가려져 있던 한라산의 모습이 다시금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다시 마이크를 쥔 기자는 얼이 빠져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저거…… 성 아닙니까?”
제주도 상공 헬기에서 찍고 있는 해당 내용은 실시간으로 전국에 보도되고 있었다.
늑대 길드의 길드장실에서 태블릿 PC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시우는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스터?”
맞은편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늑대의 길드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우는 겉옷도 챙기지 않고 그를 휙 지나쳤다.
“마스터, 잠시만요!”
얼마나 다급했던지, 길드원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려던 시우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거 놔.”
으르렁거리듯 짧은 경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손이 마치 드라이아이스에 접촉한 듯 급속도로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길드원은 움찔 몸을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스터, 일정이……!”
“놓으라고 했어.”
더 이상 반복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듯 차갑게 날이 선 목소리.
지금 시우의 시야에는 눈앞에 선 길드원의 얼굴 따위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방금 전 태블릿 PC로 보았던 무너져 내린 한라산의 광경, 그리고 오피스텔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은하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선배라면 늘 그렇듯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에스트로까지 함께였다.
자신도 일정이 끝나면 곧바로 제주도로 넘어갈 테니까. 그러니 분명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생중계되고 있는 한라산의 광경을 보는 순간 그따위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배를 믿겠다던 같잖지도 않은 결심도 이미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지금 저기 한가운데에 선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으니까.
“일정은 전부 취소다.”
탁! 거칠게 길드원의 손을 내친 시우는 벌컥 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간다.”
단지 그 명령만을 남긴 채, 시우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쥐었던 문고리는 급속도로 냉각되어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 * *
“백이준, 괜찮아?”
은하의 목소리에 이준은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분명 머리 위로 바위 벽이 잔뜩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바위에 온몸이 찌그러지고도 남았을 텐데 웬일인지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준은 멍하니 주변을 살폈다. 그들을 뒤덮어 버릴 기세로 달려들던 바위가 잘게 산산조각이 난 채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양산을 손에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
그 순간 이준은, 그들을 뒤덮던 바위를 은하가 모조리 다 부숴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증거로 은하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은 폐허에 가까운 수준으로 무너지고 부서져 있었고, 그들이 서 있는 이 부근만 온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주변을 살피던 이준의 눈빛이 묘해졌다.
‘산사태로 무너졌다고 하기에는 산 표면이 이상할 만큼 매끈하다.’
마치 무너진 것이 아니라 조각가가 도구로 내리꽂아 깎기라도 한 듯한 모습.
상공에서 보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었다. 거대한 성(城)의 모습이었으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들로서는 아직 그 사실을 또렷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은하야, 이건─.”
이준이 살짝 입술을 달싹이던 때였다.
두두두…….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의 기색이 바뀌었다. 은하와 이준은 턱을 들어 위쪽을 확인했다.
다수의 헬리콥터가 상공을 날고 있었다. 표면에 방송국 마크가 있는 헬기가 세 대, 그리고 나머지는 협회의 마크가 크게 보였다. 지원이 온 것이다.
“은하야, 위……!”
“안 돼!”
은하가 이준의 말꼬리를 자르고 짧게 외쳤다.
안 된다니, 무엇이? 이준이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었다.
「‘터전’이 준비되었다.」
갑작스럽게 귓가로 스며드는 거대하고도 웅장한 목소리에 이준이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마치 머릿속을 후벼 파듯이 뇌리 깊숙이 전달되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목소리인가. 극심하게 요동치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준이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금 빛에 에워싸인 한 남자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콰과광─!
상공에 있던 헬기가 돌연 폭발하더니 날벌레처럼 힘없이 추락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이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저 남자가?’
로브를 두른 채 공중을 유유히 부유하는 남자는 얼굴이 그늘에 가려져 있었는데, 아래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거대한 뿔 두 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마치 별을 이고 있기라도 하듯, 머리 위에 떠 있는 황금 빛의 찬란한 문양이 눈길을 앗았다.
‘몬스터인가?’
그러나 어디에도 시스템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건 몬스터가 아니다. 아마도 말로만 듣던 ‘그 존재’.
조디악이 분명하다고 온 피부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조디악은 탑을 나올 수 없다. 분명 그럴 텐데.
「가거라, 나의 아이들아.」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공중에 뜬 남자 주변에서 파지직 소리를 내며 거대한 검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하나, 둘…… 총 세 개의 인영이 남자 뒤에 더해졌다. 눈부신 황금 빛에 휩싸여 그들의 인상착의가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셋이었다.
「구원의 날을 준비하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 개의 빛줄기는 마치 유성처럼 유려하고 밝은 꼬리를 그리며 어디론가 샅샅이 흩어졌다.
이준이 마치 홀린 듯이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가운데, 곁에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데바인가.”
은하는 턱을 높게 들고 저 남자, ‘데바’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던 데다 남자는 후드를 쓰고 있었던 탓에, 그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려와.”
은하가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양산을 움켜쥐었다. 이준은 이끌리듯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불끈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오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
“차은……!”
이준이 그녀를 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탓! 탓! 탓!
공중으로 도약한 은하는 무너진 바위를 발판 삼아 튕기듯 데바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닿기에는, 데바는 너무도 높은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높다고 해서, 멀다고 해서 닿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기필코 그를 쓰러트리고 말 것이라는 결심이, 은하에게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
미끌─
도움닫기를 위해 아래의 바위를 걷어차던 은하가 돌연 몸을 휘청였다. 분명 그곳에 있었던 바위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었다.
“차은하!”
중심을 잃은 은하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 버리는 찰나, 저 아래에서 이준이 소리쳤다.
번쩍 정신을 차린 은하는 아래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손바닥 중앙으로 순식간에 모여든 검은 불꽃은 땅을 향해 일직선을 그리며 엄청난 기세로 뻗어 나갔고,
콰앙─!
추락하던 은하의 몸이 반사 작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밀려났다. 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발판을 찾아 다시금 위쪽으로 도약했다. 그런데.
‘사라지고 있어?’
은하의 눈빛이 변했다. 데바로 추정되는, 공중에 있던 남자의 모습이 점차 흐리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주하겠다는 건가?”
은하는 이를 으득 갈며 도약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나 그에게 닿기에는 아직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문득 데바의 시선이 제게 닿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구원의 날, 성이 완성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도래할 구원을 준비하라. 또한 기억하라, 아이야.」
로브 아래로 은근하게 비치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는 분명 은하를 향해 있었다.
은하의 검은 구두가 다음 도약을 위해 근처 바위에 닿는 순간,
「나의 이름은 데바.」
그가 스르륵 양손을 들었다.
하늘을 짊어지듯, 흡수하듯, 아우르듯.
「─필연적 종속에 경배를.」
쿠구구구구……!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요동에 시야가 위아래로 크게 뒤집히듯 흔들린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거센 지진에, 끊임없이 위로 도약하던 은하가 적당한 곳에서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뒤돌아보았다.
산을 뒤덮고 있던 거목이 엿가락 부러지듯 꺾여 내리고, 산속에 숨어 있던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 날아오르며 하늘을 검게 뒤덮는 것이 보였다.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을 때, 찬연하고 신묘하게 반짝이던 황금 빛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곳에 남은 건 이제 산의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 공간과 정신을 잃고 쓰러진 용병들, 그리고 은하와 이준뿐이었다.
“데바……!”
은하가 분한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쫓을 방법 또한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것은 더 이상 산사태가 아니었다.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 전체가…… 아니, 제주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