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6)화 (235/306)


#236. GIA
2023.03.24.


늦은 새벽, 은하는 약속한 장소에서 이준과 만나 전용기에 올라탔다.

“제주도까지는 금방 도착할 거야. 그동안 잠시라도 눈 좀 붙이고 있어.”

“너는?”

“기장실에 있을 거야. 배가 고프면 이거 먹고. 너 사과 좋아하잖아.”

은하에게 마실 것과 간단한 요깃거리, 그리고 담요를 가져다준 이준은 전용기 내부의 통로를 열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조금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은하의 예상과는 달리 이준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가 가져다준 담요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와중, 의자 뒤쪽 통로가 열리면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머, 당신은…….”

실처럼 가느다란 은발에 검은 마스크를 턱에 걸친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코인 형태의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안드레아의 그것과 똑같은 펜던트. 기억대로라면 저것이 GIA의 증표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녹스’라고 합니다. GIA에서는 ‘유다’라고 불리고 있고요.”

자신을 녹스라고 소개한 여인은 은하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외모로 보아 분명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안드레아나 데이빗처럼 한국어가 굉장히 능숙했다.

“줄곧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저를 만나 보고 싶었다고요?”

“네,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은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흑염의 프린세스가 헤드 헌터 1위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차은하’라는 헌터는 이전에도 GIA에서 꽤 유명 인사였다. 보스의 첫사랑으로 말이다. 물론 은하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전용기는 은닉 상태로 접어든 게 맞나요?”

은하는 가장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어봤다. 전용기 내부에 앉아 있는 그녀로서는 현재 이 전용기가 완벽하게 감춰진 것인지 아닌지 가늠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하의 물음에 녹스는 빙긋 웃으며 테이블 위 사과를 집어 들었다.

“단번에는 불가능하지만 벌써 90% 이상은 진행되었어요. 앞으로 1분 정도면 완벽하게 숨겨질 겁니다.”

사아아…….

녹스의 손아귀에 있던 사과가 투명하게 바뀌었다. 마치 마술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작은 물체는 금방 숨길 수 있는데 비행기처럼 거대한 물체라든지 생명체는 조금 까다로워서요. 시간도 그만큼 걸리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한 번 은닉이 진행되면 제가 해제할 때까지 결코 들킬 리 없을 테니까. 세계의 어떤 정부 감시망도 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동안 GIA가 헌터 비밀 연합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녹스의 능력 덕분이 컸다.

“고맙습니다.”

은하는 녹스의 손아귀에서 다시 나타난 새빨간 사과를 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녹스는 사과를 아삭 베어 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저는 단지 보스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

테이블 위 놓인 각종 요깃거리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보스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면모라는 건.”

“보스와 전용기를 탄 건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렇게 음식이나 담요 같은 걸 챙기는 걸 본 적은 없거든요. 10년 넘게 보스를 봐 왔는데 굉장히 낯설어요, 지금.”

녹스는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키득댔다. 은하는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백이준은 언제부터 GIA를 만든 건가요?”

“글쎄요. 정확한 날짜는 저도 잘. 제가 들어온 건 13년 전인데, 그 전부터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죠.”

“그럼 녹스는 어쩌다 GIA에 들어오게 됐나요?”

은하의 물음에 사과를 베어 물던 녹스가 멈칫했다. 그녀는 먹다 만 사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더니 좌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난 에리트레아 출신이에요.”

“에리트레아?”

“잘 모르실 수도 있을 거예요.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거든요. 난 거기서 자그마치 9년 동안 군에서 복무했어요. 말이 복무였지 강제 노역에 가까웠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는 듯 녹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군의 상부는 내 능력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사용했고 내게 거부권은 없었어요. 잦은 마력 남용과 영양실조 때문에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할 때는 사흘 내내 짐승의 배설물만 먹어야 했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죠. 그리 덧붙인 녹스는 무의식적으로 목덜미의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곳에서 날 구해 주었던 게 바로 보스입니다. 그날 보스는 내게 말했죠.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따라오라고. 그게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네요.”

펜던트를 손에 꼭 쥔 녹스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서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에요. 필립보, 베드로, 마티아…… 그리고 안드레아도 모두 각자의 지옥에서 보스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이거든요.”

녹스가 말하는 이준은 은하가 알고 있는 이준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적어도 은하가 알던 30년 전의 이준과는 꽤 거리가 멀었다.

‘내가 S급이 된 것도, GIA를 설립한 것도, 지금까지 이 빌어먹을 헌터계에서 버틴 것도 모두 널 위해서였어.’

또다시 이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하게 재생되었다. 은하는 이준이 가져다준 담요를 손끝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보스가 가는 길이라면 죽을 때까지 따라갈 생각이에요. 설령 그 길이 그릇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우리 보스를 잘 부탁해요.”

잘 부탁한다니. 은하가 슬쩍 시선을 들자 녹스가 빙그레 웃었다.

“보스를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알 수 있거든요. 보스에게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녹스의 시선이 은하의 무릎 위 담요, 그리고 테이블 위 가득 놓인 요깃거리를 향해 차례로 움직였다.

이준에게 과일 알레르기가 있다는 건 GIA 멤버 중에서도 녹스와 안드레아를 포함한 일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즉 이렇게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과일들은 본인을 위한 게 아닐 것이다.

“사과가 정말 달아요. 먹어 봐요.”

녹스는 가장 빛깔이 고운 사과를 하나 집어 은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무심코 그것을 건네받은 은하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새빨갛게 물든 사과는 그녀의 말대로 굉장히 달았다.

* * *

제주도에 도착한 은하 일행은 공항의 활주로 대신 섬의 서쪽과 북쪽의 제주시를 잇는 애조로(涯朝路) 위에 전용기를 착륙시켰다.

“사전 조사에 따르면 정부나 협회 요원들은 애월항과 강정 해군 기지에 본진을 두고 있으니 우리는 이쯤에 자리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녹스는 그리 말하며 먼저 전용기에서 내렸다.

도로 위에는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정차된 차량이 간간이 보였다. 이미 대피령이 떨어진 뒤라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전용기에서 내리게 되면 자동으로 은닉 상태에서 벗어나니 지금 다시 한번 스킬을 걸겠습니다.”

“아니, 녹스. 일단은 기다려.”

스킬을 사용하려는 녹스를 저지한 건, 마지막으로 전용기에서 내린 이준이었다.

“아직까지는 주변에 인기척이 없으니 우선 은닉 스킬은 아껴 둬. 정말 네 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르니 그때까지는 마력을 낭비해선 안 돼.”

“예, 보스.”

“녹스 너는 여기 전용기에서 기다려. 한라산에는 둘만 가겠다. 만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다면 애조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애월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라산 진입로까지만 함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은하와 이준, 그리고 녹스는 남쪽으로 향했다.

“제주도는 동쪽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침몰하고 있어. 반대 방향인 서쪽 지역이 안전하겠지만 정부가 공항과 시내를 포기하고 서쪽 끄트머리에 본진과 대피소를 몰아 뒀으니, 사람들의 눈을 완벽히 피하기 위해서는 이쯤에 착륙하는 게 최선이었어.”

“잘 알고 있네.”

“그 정도 사전 조사는 기본이니까.”

또한 서쪽으로는 애월, 남쪽으로는 한라산과 연결된 애조로는 정찰에도 대피에도 마땅한 요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설명을 덧붙이며 걷던 와중이었다. 하늘을 날던 새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마치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이준 근처를 맴돌기 시작했다.

턱을 들어 새를 한 번 쳐다본 이준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리고 왼쪽을 향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서 걸음을 멈춘 은하 역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라, 이곳에 당신이 왜…….”

붉은 한복을 입고 등에 커다란 두루마리를 메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그가 은하를 보고 아는 척을 하자 이준이 힐끗 은하에게 시선을 보냈다.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은하는 그와 구면이었다.

“산군도 이곳에 와 있었던 건가요?”

……산군? 이준의 눈매가 좁아졌다.

눈앞의 남자는 산군의 일원으로, 헤드 헌터 ‘심안’ 은유엘의 심복인 가란이었다.

“심안이 제주도에 온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는데.”

이준의 말에 가란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마에스트로를 알아본 가란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입을 열었다.

“수령님께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헤드 헌터로 선별되신 후 세간에 얼굴이 밝혀지면서, 이런 일에는 더 이상 참여하실 수 없게 되셨으니까요.”

“이런 일이라면─.”

은하가 중얼거리자 가란 대신 이준이 답했다.

“비밀 업무군. 정부와 협회에서 따로 비밀리에 요원을 파견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너희들이었어.”

‘너희들’? 그 단어에 은하가 힐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가란 뒤에 숨어 있던 몇몇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이런 거물 헌터를 여기서 둘씩이나 보게 될 줄이야.”

그 수는 총 여덟이었다. 가란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곱은 은하는 물론 이준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국내외의 유명한 헌터의 얼굴이나 이명 정도는 훤히 꿰고 있는 이준조차 모르는 헌터들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이름도 나지 않은 무명 헌터라거나…….

‘용병인가.’

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병. 다른 말로는 헌터계의 무법자라고도 불리는 이들이었다.

각성을 하고서도 협회에서 랭크 조회나 면허 등록을 하지 않은 자들로, 일반 헌터 길드가 아닌 정보상이나 용병 단체에 소속되어 돈이 되는 일만 수주한다고 들었다.

세간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용병 단체는 ‘산군’이 있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용병 단체 혹은 개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건 헌터계에서 오래 활동해 온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정부와 협회는 이들에게 의뢰를 요청한 건가.’

국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면서도 제주도 사건의 원인을 알아보기는 해야 할 테니 용병의 손을 빌리기로 한 듯했다.

‘까다로워지겠군.’

예상치 못한 용병 단체와의 조우에 이준이 성가시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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