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5)화
(237/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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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내가 원하는 세상
2023.03.23.
“……그래.”
은하는 다른 쪽으로 살짝 시선을 피하며 짧게 답했다.
그런 은하의 반응에 시우의 표정이 사뭇 묘해졌다. 역시 오늘따라 은하가 이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시우도 은하의 성격을 알았다. 무엇 때문이냐고 캐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시우는 결국 뒤돌아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일정이 끝나면 저도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현관문 너머로 시우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달칵─
복잡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온 은하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방을 응시했다. 머릿속에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하루 종일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넌 내 전부거든.’
‘영원히라고는 말 안 할게. 은하 네 곁을 지키는 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냥 꺼질게. 그때까지만 좀 봐주라.’
“……후.”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은하는 처음으로 그를 만나기가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표정으로, 또 말투로 그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지 않아도 다른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준의 일까지 겹쳐 버리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시우에게는 평소보다 더 싸늘하게 대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하는데.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쉰 은하는 슬리퍼를 신은 발을 천천히 움직여 침대에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인벤토리에서 꺼내 둔 고등어 쿠션이 놓여 있었다.
은하는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누워서 쿠션에 코를 파묻었다. 고양이가 아닌 은하에게는 그저 건초 냄새처럼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신기하게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 따위 하지 말자.
고양이를 되찾는 일, 그리고 데바를 쫓는 일만 생각하는 거야, 차은하.
쿠션을 쥔 두 팔에 꼭 힘을 준 은하는 내일을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 * *
GIA 긴급회의가 끝이 난 후, 안드레아는 따로 이준을 찾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주도에 간다니. 그것도 오늘 새벽에 당장. 자세하게 설명해 줘, 요한.”
“내가 결정한 일이야. 설명이 왜 필요하지?”
“GIA는 세상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만든 조직이야. 분명 그랬잖아. 그 힘을 개인적인 일에 쓰고자 하는 거라면 멤버 간의 논의는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이런 식의 통보는 곤란해.”
“곤란하면?”
이준이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어차피 이번 일에 필요한 건 전용기 한 대, 그리고 은닉 능력을 가진 ‘녹스’가 전부다. 그거면 충분해. 그러니 너나 다른 멤버들과 논의는 필요치 않아. 내 말이 틀렸어?”
이준의 말에 안드레아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한, 그곳에 가면 안 돼.”
“왜? 뭔가를 보기라도 했나 보지?”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안드레아는 불안한 듯 무릎 위의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내가 본 어떤 미래에서도 이런 일은…… 한라산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어.”
아마도 이건 ‘정해진 미래’가 아닐 것이다. 즉 특정적인 돌발 행동에 의해 갑작스럽게 일어난,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설명하지 못할 불길함이 온 피부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제주도로 향하는 거지? 넌 그거 때문에 동행하려는 거고. 그녀라면 괜찮을 테니까─.”
“괜찮을 거라고?”
이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공기 중에 살얼음이라도 낀 듯 피부가 따가워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눈매로 그가 꿰뚫듯 안드레아를 직시했다.
“그건 그 애의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잖아. 은하가 영웅이 되어서 희생하고 세계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그 빌어먹을 예언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거잖아. 아닌가?”
이준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살피던 안드레아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한,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돼.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잖아. 넌 GIA의 대표야.”
“착각하고 있는 건 네 쪽인 것 같은데, 안드레아. 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예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이준의 말이 맞았다.
안드레아는 미래를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불필요한 희생, 무차별적인 사망은 되도록 막아야 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가진 고유 능력이 그걸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현안으로 본 내용을 개인, 혹은 국가나 기관에 전달하여 사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현안이라 해서 모든 것을 예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성공했다.
이번 트릭스터 일도 그랬다.
트릭스터의 죽음은 ‘불필요한 희생’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막을 수 있는 재앙 따위 없으니까.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죽음으로 그칠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흑염의 프린세스는 달라.’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 어둠을 걷고 재앙의 종지부를 찍을 역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안드레아가 생각하는 영웅은 그녀 말고는 없었다. 다른 미래 따위 보지 못했으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또한 어떤 과정으로 그녀가 영웅으로서 희생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 없다는 것.
그러나 그 점에서 안드레아는 늘 이준과 부딪쳤다. 지금처럼.
“지난번 트릭스터의 일로, 네가 현안을 통해서 본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 설령 그 미래가 죽음이더라도 말이야.”
이준은 그렇게 말했다.
즉 그는 은하의, 흑염의 프린세스의 희생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안드레아에게 있어 이 세상이 평화로워질 수 있는 수단을 막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안드레아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늘 옳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트릭스터의 일과 흑염의 프린세스의 일은 달라, 요한.”
“도대체!”
쾅! 이준이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준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꾹 감았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건데?”
방금 전 그것과는 달리, 애써 억누른 낮은 목소리로 이준이 물었다.
“그 애가 헤드 헌터 1위기 때문에? 영웅이 되어서 모두를 대신해 혼자 희생할 운명이기 때문에? 그딴 건 누가 정했지?”
이준은 부서질 듯 세게 주먹을 말아 쥔 채 이어 말했다.
“난 네가 본 그 애의 미래를 납득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바꿔 버릴 셈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난 이해가 안 돼.”
“누구의 이해도 필요 없어.”
“요한, 들어 봐. 그녀가 네게 얼마나 특별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널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점은…… 솔직히 말하자면 유감스럽게 생각해. 넌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잖아. 그런 너의 행동과 생각이 GIA를 만든 거야.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라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
피식 웃음을 흘린 이준이 눈매를 차갑게 바꾸며 중얼거렸다.
“넌 날 몰라, 안드레아.”
30년 전, 이준은 늘 동료들의 발목만 잡았다. 페로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이나 맹수는커녕 작은 곤충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낙오자.
그것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준에게 은하는…….
‘백이준, 넌 내가 아는 각성자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야.’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낙심한 이준에게 은하가 조용히 다가왔다. 자격지심에 휩싸여 있던 이준은 은하의 칭찬에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나약하고 한심한 데다, 매번 동료들의 시체를 밟아 살아남기까지는 기생충 같은 자식. 그런 주제에 임무가 끝나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의 모습은 토악질이 나올 만큼 최악이었다.
누구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은하에게는, 그녀에게만큼은.
‘……넌 날 잘 몰라, 은하야.’
‘아니, 알아.’
은하는 쭈그리고 앉은 이준 앞에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미국 국적이 있는 넌 굳이 여기 올 필요가 없었잖아. 그런데도 한국에 남아 징병당하는 길을 택한 거고.’
‘그건…….’
‘지금 여기 모인 수많은 각성자 중에 스스로 이곳을 찾아온 건, 내가 알기로 백이준 너뿐이야. 회피보다는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거잖아. 아니야?’
‘……나는, 바뀌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뭐 하나.
정작 바뀌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은 훈련소를 졸업한 이후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혼자 힘으로 잡은 적이 없었다. 이준은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에 결국 고개를 떨궜다.
‘백이준, 날 봐.’
하지만 그런 이준을, 은하는 다시 집요하게 끌어 올렸다. 손으로 양 뺨을 감싼 채 억지로라도 두 눈을 맞춘 은하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너를 모르고 있는 건 너 자신이야. 나는 알거든. 넌 어떤 상황이든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란 걸. 그 증거로 넌 다른 동료들이 다 도망치는 동안 끝까지 내 등을 지켜 줬잖아.’
‘아니, 나는…….’
‘넌 용감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건 네 파트너인 내가 장담해.’
파트, 너……? 이준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은하는 입술로 빙그레 호선을 그리더니 탓,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서 앞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이, 내딛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자, 곧바로 다음 임무야.’
높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은하가 이준을 뒤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내 등, 잘 부탁해.’
정신을 차렸을 때 이준은 어느새 일어서서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속도로 걸어야 하는지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 애가 있는 곳을 향하고, 그 애의 보폭에 맞춰서 걷다 보면 그곳이 곧 목적지였으니까.
그렇듯 은하는 늘 이준을 이끌어 주었다. 강하고 단단한 그 애와 함께 있노라면 무너질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니 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 지금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도 은하 덕분이었다.
나를 지탱해 준 것도, 나에게 가치를 부여해 준 것도,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전부, 전부 다 너였다.
“GIA가 세상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만든 조직이라고 했지.”
아득하고도 선명한 기억을 가슴에 고이 접어 넣은 이준은 안드레아 앞에서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난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안드레아, 너와 뜻이 맞았지. 하지만 조금 정정하는 게 좋겠어.”
이준은 재킷을 어깨에 두르듯 살짝 걸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건, 은하의 세상이야.”
그렇게 해 주고 싶으니까.
그 애의 가족을, 꿈을, 일상을 앗아 버린 이 세상을, 내게서 그 애를 빼앗아 버린 이 잔혹하고도 끔찍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게 이준이 GIA를 설립한 이유였다.
세상의 평화? 재앙의 종지부?
‘그 애를 잃는다면 그깟 게 무슨 상관인데.’
이기적이라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 어떤 비난에도 꺾이지 않을 정도의 각오와 결심이, 그에게는 있었으니까.
“너도 재앙을 끝낼 영웅이 필요한 거잖아. 그거라면 걱정 마.”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그 영웅, 내가 돼 줄 테니까.”
달칵─
문이 닫혔다.
이준은 끝내 다녀오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안드레아가 떠날 것이라 짐작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 안드레아가 아니라 이준 쪽일지도 몰랐다.
굳게 닫혀 버린 문을 응시하던 안드레아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렇게 그는 쫓아가지도,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오래도록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건물 옥상 쪽에서 전용기의 모터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음이 유리창을 뚫고 들려왔다. 소음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 안드레아의 가슴이 마구 뛰어 댔다.
기어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