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4)화
(234/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4)화
(234/306)
#234. 괜찮아, 너니까
2023.03.22.
이준의 눈이 커졌다. 놀란 듯 굳어 버린 그와, 그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은하.
굵은 빗줄기가 그들의 얼굴을, 어깨를,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서, 이준이 서서히 은하에게 다가왔다.
“아니, 조금 달라.”
이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빗소리에 파묻혀 버릴 만큼 작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은하의 귓가에만큼은 또렷하게 닿았다.
“넌 내 전부거든.”
깔끔하게 넘기고 있던 그의 앞머리가 비에 젖으며 아래로 처졌다. 젖은 머리카락이 뚝뚝 물방울을 떨구는 것이 보일 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내 전부를 잃을까 봐, 두 번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잃어버릴까 봐, 그래서 겁이 나는 거야.”
입고 있던 재킷을 벗은 이준은 그것을 우산 삼아 은하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재킷이 만들어 낸 작은 그늘에 은하의 시야가 뒤덮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비에 젖어 달라붙은 이준의 흰 셔츠뿐이었다.
은하가 조금 시선을 들자, 상체를 숙여 재킷 그늘로 고개를 들이민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가까웠다. 그의 뜨거운 숨이 콧날에 고스란히 닿는 것을 느낀 순간 은하는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그런 거리에서, 젖은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난 나보다 차은하, 네가 더 소중하니까.”
그가 가진 특유의 체취는 소나기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가 은하를 상대로 능력을 사용했을 리가 없는데도, 은하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나무와 흙이 젖어 들며 비 냄새가 짙어지는 와중에도, 이준에게는 오직 은하의 향기만이 와 닿아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자신은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차가운 빗줄기에 머리는 식어 가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준은 뭐든 간에 더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재킷이 만든 작은 그늘에는 오롯이 이준과 은하,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입술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끄럽게 귓가를 두들기던 빗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에 젖어 식어 버린 입술 위로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살짝 걸쳐진 순간이었다.
“…….”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은하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이준은 멈칫했다.
“……거절할 거지?”
이준의 물음에 은하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준은 어쩐지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스르륵.
이준은 은하에게서 쉽사리도 멀어졌다.
어두웠던 시야가 한 번에 밝아지며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혔다. 가로등을 등진 채 이쪽을 바라보는 이준은 평소처럼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자신의 목 부근을 매만졌다. 옷 아래에 숨겨져 있던 딱딱한 것, 황금색 군번줄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것을 만지작대며 은하는 말했다.
“……동경과 연애 감정은 착각하기 쉽다더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 감정의 깊이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그 당시 우리는 서로를 의존했고, 난 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니까 네가 그런 식으로 날 소중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 나 역시도 그렇고.”
“내가 지금 내 감정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러기 쉬운 환경이었다는 말이야.”
그러자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이준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감정을 착각할 만한 나이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은하의 말이 마냥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아플 만큼의 비수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미 그녀 없이도 그녀를 좋아할 수 있었으니까.
30년간 그래 왔던 것처럼, 얼마든지 더.
“은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앞머리를 무심히 쓸어 넘긴 이준은 괜찮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난 네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거든. 네 대답을 원하는 것도, 네게 어떻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난 네 곁에 있는 날 원하는 거니까.”
“백이준, 나는…….”
“알아. 영원히라고는 말 안 할게. 은하 네 곁을 지키는 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냥 꺼질게.”
그러니까……. 말끝을 흐린 이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때까지만 좀 봐주라.”
젖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또르르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그의 얼굴선을 타고 턱 끝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미안.”
은하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그뿐이었다. 무엇에 대해 미안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결여되어 있었다.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서?
네 마음을 착각이라고 치부해 버려서?
내게는 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어쩌면 그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준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기에.
“괜찮아, 너니까.”
잠시간 몰아쳤던 소나기는 정신을 차려 보니 멎어 있었다.
다만 구름 뒤에 달을 꽁꽁 숨기고 있는 하늘은 여전히 흐리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꺼져 버린 가로등. 밤하늘을 등지고 선 이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하는 어쩐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자. 집까지 바래다줄게.”
이준의 딱딱한 구두 소리가 밤길 위를 걸었다.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뎌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까만 하늘 아래 엇박자로 이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이준은 어느새인가 은하의 보폭에 맞추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구름에 숨었던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무렵, 두 사람의 보폭은 어느덧 비슷해져 있었다.
* * *
다음 날,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시우는 곧장 은하의 오피스텔을 찾아왔다.
동두천에 대한 일을 묻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제주도 일로 은하가 전용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제휘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은하는 이준에게 그랬듯이 시우에게도 고양이에 대한 정보를 제외한, 루나와 데바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서 자신은 제주도에 직접 가 보려고 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식탁에 마주 앉아 은하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시우가 힐끔 시선을 들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은하가 말문을 닫아 버린 탓이었다.
“……선배? 무슨 생각 하십니까?”
시우가 은하의 안색을 살폈다.
오늘따라 은하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아까도 긴 이야기를 전하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아예 반쯤 넋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동두천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어 보니 과연 머릿속이 복잡할 만도 했으니까.
제주도 일에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의, 말도 안 되는 규모였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까지 얘기했지?”
시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은하는 표정을 바로잡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용기 준비 이야기요. 박 매니저에게 들었습니다. 제 쪽에서도 구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는 힘들 듯해서요.”
“아……. 그래.”
짧게 대답한 은하는 힐끗 시우를 쳐다보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내가 제주도에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무슨 뜻입니까?”
“지금 저 상황에 혼자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 거니까. 섣부르다거나 옳지 못하다거나 그런 생각, 너는 안 하는가 싶어서.”
은하의 말에 시우는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요?”
그리고 식탁 위에 턱을 괴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들, 선배가 뜻을 굽히지는 않을 텐데.”
“…….”
정확했다.
은하는 시우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 그 생각에 따라 행동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묻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제 생각이요?”
“그래.”
푸른 눈으로 관찰하듯 그녀를 응시하던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 제주도의 상황만 봤을 때, 아무리 정찰이라고는 해도 그쪽에 뛰어드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그런다고 가지 않을 선배가 아니잖아요. 선배에게도 생각이 있는 거겠죠. 늘 그랬듯이요.”
시우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전 선배를 믿으니까.”
“……믿는다고.”
“네. 물론 그냥 보내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정이 끝나면 저도 그쪽으로 넘어갈 거고요.”
사실 제주도에는 늑대에서 파견한 조사단원이 깔려 있기 때문에, 시우가 원한다면 은하에 대한 보고를 듣는 일은 쉬웠다. 하지만 그 사실까지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전용기를 오늘 중에 구하는 일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그냥 협회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건 어떨까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요.”
“……뭐?”
마치 무언가 잘못 들은 것처럼 은하가 눈매를 좁혔다.
협회를 무시하고 움직이자는 것은 흑염의 프린세스가 제주도로 향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대놓고 알리자는 이야기였다.
늑대 길드 마스터인 시우가 하는 이야기니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럴 수 있는 위치와 권력이 그에게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일이 커지게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은하는 협회의 생각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국민들에게 필요 이상의 불안을 심어 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생각이 같았다.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도움을 받기로 한 곳이 있어서.”
결국 은하는 이준의 동행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시우의 권한으로도 몰래 이동할 방법이 없다면, 정말로 없는 것이니까.
“도움…… 이라면 누구에게?”
“너도 아는 사람이야. 백이준.”
“…….”
그 순간 시우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그가 무슨 수로 도움을 준답니까?”
“방법이 있어서 그래.”
GIA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던 은하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물론 시우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다.
탁, 탁……. 식탁 유리를 검지로 몇 번 두드리던 시우가 결심과 함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제주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너까지 오면 위쪽 눈을 피하기도 힘들 테고. 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잖아.”
“하지만…….”
“조용히 다녀오고 싶어서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혼자 갈 생각은 아니니까.”
은하의 말에 시우는 생각에 잠겼다.
마에스트로가 선배와 함께 간다는 것이 영 달갑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일정을 취소할까?’
불쑥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3대 길드와 협정을 맺기 위한 중요한 일정이었다. 시우가 빠지게 된다면 이후 그들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일정을 취소한 적이 있던 시우에게, 이번만큼은 꼭 참석하라고 신신당부하던 늑대 간부들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자 또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보다는 백이준이 함께 가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기는 했다. 애초에 이번 제주도행은 어디까지나 정찰이 목적일 테고, 그렇다면 제 자연 계열 능력보다는 마에스트로의 페로몬 능력이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게다가…….
‘나는 저 애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데리고 오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은하를 대신해서 방패막이가 되어도 상관없어.’
이준은 네버랜드에서 돌연 그런 말을 했다.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한다.’
그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었는지, 시우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투와 눈빛에서 그가 얼마나 은하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래, 역시 무리해서 일정을 조율하는 것보다는 일단 이준에게 그녀를 맡기고, 일정이 끝나자마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
“…….”
시우와 은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힐끔 시계를 확인한 은하는 의자를 드르륵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준의 계획대로라면 다가올 새벽 중에 GIA의 전용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할 테니, 눈을 잠시 붙이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할 얘기, 아직 남았어? 내일 출발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시우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겉옷을 챙긴 시우는 신발장으로 향했다. 상체를 숙여 신발을 신으려던 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돌연 주머니를 뒤적였다.
“여기요.”
그가 내민 것은 새 휴대전화였다. 은하가 동두천에서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새로 사 온 모양이었다.
“내일 출발이니 따로 휴대전화를 살 시간이 없으실 것 같아서요.”
시우는 은하의 손에 직접 휴대전화를 쥐여 주었다.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손바닥 위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곧 그것을 꼭 손에 쥐었다.
“매번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매번 사 드릴 테니까. 잃어버리지 말라는 건 돌아올 때까지만 잘 간수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신발장에 쭈그리고 앉아 신발 끈을 묶던 그는 이내 스르륵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연락이라도 닿아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가 은하를 가득 담았다. 기분 탓인지 거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이준의 그것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