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3)화 (233/306)


#233. 소나기
2023.03.21.


은하의 오피스텔 근처 카페.

제주도 관련 일 때문인지 거리가 어수선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카페에도 사장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를 제외하면 은하와 이준뿐이었다.

“제주도가 그렇게 될 거란 거, 은하 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지?”

그의 두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빛을 보아하니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한 건 은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은하는 잔을 휘젓던 손을 멈칫했지만 그뿐이었다. 대답이 없는 은하를 향해 이준은 쐐기를 박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동두천에서 있었던 일과 연관이 있는 거고.”

이준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그를 상대로 끝까지 모든 것을 숨기는 건 무리였다.

은하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쌍아궁 조디악인 루나를 만났던 일, 그리고 루나가 돌연 눈앞에서 소멸하기 직전 제주도에 대해 경고해 주었던 일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은 묘하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턱을 쓸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조디악은 네게 우호적이었던 거지?”

“그건…….”

은하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은하가 고양이, 그러니까 전(前) 조디악이었던 쌍아궁 루시와 계약을 했다는 것까지 설명해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백이준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루시는 계약 당시 은하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언급하는 일을 금지했다.

만일 그것을 어길 시 분명하지 않은 존재인 루시에게 어떤 페널티가 돌아오게 될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이상, 섣불리 입을 열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은하를 살피던 이준은 그것에 대해 더 캐묻지 않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네가 생각하기에 그 조디악의 말은 믿을 만한 건가?”

“……그래.”

짧은 은하의 긍정. 이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번 제주도 일은 그 ‘데바’라는 조디악 우두머리의 짓일 가능성이 크겠네. 은하 너는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고.”

가볍게 에스프레소를 들이켠 이준이 잔을 내려 두었다.

“곤란하겠네. 지금 상황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같은 유명한 헌터가 움직이는 걸, 협회나 정부 쪽에서는 겁을 낼 테니까 말이야.”

따지고 보면,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던 은하보다 더욱 오랜 시간 현대의 헌터계에 머물러 있었던 이준이었다.

각국의 협회가 얼마나 겁쟁이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즉 대충만 살펴보아도 지금 은하가 어떤 상황일지는 뻔히 예상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내가 도울게. 위쪽 눈을 속이고 제주도까지 움직여야 하잖아.”

“방법이 있어?”

“GIA.”

단조롭게 답한 이준은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검은 재킷을 어깨에 두르고 일어났다.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거야. 우선 나가자.”

카운터에서 지폐를 지불한 이준은 먼저 카페를 빠져나갔다. 뒤늦게 따라나선 은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는 듯 보이는 이준을 저지했다.

“잠시 기다려, 백이준. 내 말 못 들었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네 도움은 필요 없…… 아니,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자 우뚝 걸음을 세운 이준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또 저 얼굴이었다. 마치 비수에 맞기라도 한 듯 괴로운 얼굴.

은하는 그런 이준을 살피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조금 더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네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어.”

“…….”

“난 단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르니까 되도록 소수로 움직이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한 거지.”

은하는 30년 전 분대장으로 활동할 때도 분대나 소대 단위보다는 개인 혹은 소수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했다. 특히 조사나 관찰에 관련한 임무라면 더욱 그랬다.

단순히 속도 면에서도 남들보다 빨랐을뿐더러, 은하는 화염 능력을 사용하는 헌터였다. 지켜야 할 인원이 있을 때는 아무래도 그만큼 출력을 제한하는 등의 제어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화염이란 동료까지 포함하여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위험한 능력이었으니까.

“너까지 같이 움직인다면 쏠리는 시선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이번 제주도 일은 아직 불확실한 정보가 너무 많기도 하고.”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은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준이 답답한 기색으로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쓸어 넘겼다.

“그래서? 혼자 어떻게 할 건데?”

이준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은하를 똑바로 보고 섰다.

“지금 당장 준비한다면 늦어도 내일 저녁에는 제주도로 출발할 수 있을 거야. GIA 중에 사물을 은닉하는 고유 능력을 가진 멤버가 하나 있지. 녀석이라면 자그마한 전용기 한 대쯤이야 완벽히 숨기고도 남아. 그래도 필요 없어?”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은하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다른 눈들을 피해 제주도로 이동하는 일은 무척 쉬워질 것이다.

“……그럼 이동하는 것까지만 부탁할게. 그 이후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데?”

이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은하를 몬스터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시절의 이준처럼, 온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싸늘함이었다.

“확실히 난 너보다 전투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 난 너처럼 공격적인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정찰이나 조사라면 너보다는 내가 나을 텐데.”

내 말이 틀려? 이준이 가만히 은하를 응시했다. 은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단순히 정찰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전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다는 소리인가?”

“백이준, 내 말은─.”

“내가 모를 것 같아? 또 혼자 수습하려는 거잖아, 차은하.”

“…….”

“어떻게든 혼자서 최대한의 피해를 막아 내고, 모두를 내버려 둔 채 또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릴 생각인 거잖아.”

설령 네가 죽더라도. 그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준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 과정에 내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매달리는 듯한 이준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안 돼.”

그러자 이준은 “하.” 하고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은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왜?”

은하의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이준이 시선을 떨어트리며 낮게 읊조렸다.

“30년 전, 언노운 게이트에 갇히고 현대로 돌아왔을 때 늑대 녀석에게는 도움을 받았잖아.”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은하가 반박을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무언가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그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신시우 때와 지금은 달라, 백이준.”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데?”

달빛을 머금은 옅은 금발 아래 은회색 눈동자가 흐트러진 듯 탁해져 있었다. 붉게 물든 눈가에, 머리카락처럼 색소가 옅은 속눈썹이 조금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발, 은하야.”

이준이 은하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은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너를 잃는 게 가장 두려워.”

그제야 이준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은하는, 그런 그를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한 채 그만 굳어 버렸다.

“……백이준?”

은하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움찔 떨렸다.

이준이 은하의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은하는 적잖이 당황한 듯 커진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후에야 이준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뭐 하는 거냐, 백이준.’

지금 은하가 어떤 상황인 줄 알고 있다. 동두천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이번 제주도 사건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더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위험한 곳에 은하를 혼자 보내지 않고 싶을 뿐이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다.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안심하고 싶었을 뿐이다.

“……미안.”

은하에게서 멀어진 이준은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으며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방금 그건 잊어 줘. 잠시 어떻게 됐었나 봐.”

이준이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은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낯설었다. 이런 이준의 모습이.

표정을 바로잡은 이준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어차피 계속 이렇게 실랑이를 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일단 집에 데려다줄게. 가자.”

이준은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 위를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은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우뚝.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곧 소나기가 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뻗어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빗물에 의해 옅어졌다.

그러나 은하와 이준은 비를 피할 장소를 찾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등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날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고.”

위쪽 단추를 꼭 잠그지 않아 벌어진 셔츠 깃이 빗물에 의해 젖어 들어갔다. 그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색 군번줄이 보였다.

쏴아아아─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30년 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낡은 군용 수송 차량에서 처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

죽을 뻔한 이준을 구해 준 뒤, 그가 자신의 비상식량을 탈탈 털어 은하의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일.

이후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페어로 활동하게 됐던 일.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했던 일.

처음으로 휴가를 받고 어머니의 묘비를 함께 찾아갔던 날,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은하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 주었던 일.

그리고 2001년 3월 26일에 출현한 강원도 양양 남대천 C급 게이트……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던 언노운 게이트에서 그를 대신해서 갇혔던 일까지도, 모조리 생생하게 떠올랐다.

은하는 이준의 목 아래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군번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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