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2)화
(232/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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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재앙의 태동
2023.03.20.
이후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30년 전 군용 수송 차량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이준은 늘 은하 곁에서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말수가 적은 은하를 상대로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준이 유일하다며 동료들이 신기해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처음이었다. 그런 식의 긴 침묵은.
그 와중에도 이준은 오피스텔 앞까지 은하를 데려다주었다.
‘일단 오늘은 쉬어. 내일 다시 찾아올게.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그 말을 남기고서 그는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은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힐끗 살펴보니 집이 깨끗했다. 아마도 제휘가 청소하고 간 것이겠지.
원래라면 그에게 문자 한 통이라도 보냈을 은하였지만.
‘아.’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검은 균열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거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밤 12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지금 시간에 새 휴대전화를 구매하는 것도 힘들 테니 별수 없었다.
은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생수 통을 쥔 채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기를 수 분, 좀처럼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고양이 인형, 루나의 저택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물건을 만지작댔다.
[아이템 상세 ▶ ‘낡은 고양이 인형’ │ 일반 아이템 │ 희귀도 : 잡동사니 │ 사이좋은 쌍둥이 자매가 가장 처음으로 만든 인형. 너무 낡아 먼지 냄새가 난다. 특별한 쓰임새는 없어 보인다.]
[인벤토리에 추가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 Y / N]
은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인형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추가.”
인형 주변이 새하얀 빛으로 감싸이더니 곧이어 손안에서 사라졌다.
환한 빛 무리가 사라진 그곳에, 불현듯 이준의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 일이 네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어차피 네가 살려 준 목숨인걸.’
‘나에게 넌 그냥 너야. 알아?’
“……하아.”
은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와는 30년 전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뛰어들었던 전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짊어지고 싸운 사이였다.
은하는 그만큼이나 가까운 곳에서 이준을 봐 왔다. 그러니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이준은 차은하를 동경했다.
그 동경의 마음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말이다.
물론 그가 자신을 아낀다는 건 은하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목숨조차 불사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은 예상외였다.
아까는 겨를이 없어 주목하지 못했지만, 이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내가 S급이 된 것도, GIA를 설립한 것도, 지금까지 이 빌어먹을 헌터계에서 버틴 것도 모두 널 위해서였어.’
국적을 불문한 전 세계의 헌터로 구성된 비밀 연합, GIA를 설립한 것이 바로 본인이라고 말이다.
확실히 이준이 가진 힘과 권력이라면 은하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다만 조력의 목적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나 적을 부수는 일이 아닌, 단순히 은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과연 그의 도움을 순순히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번 일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얼마나 위험할지 은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데바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적인 정보가 없을뿐더러,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지수인 상황.
은하는 그저 필요에 의해서, 가치에 따라서 이준을 이용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은하에게 있어 이준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일 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딩동─
현관문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은하는 인터폰 모니터에 떠오른 얼굴을 확인했다.
「헌터님, 집에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가쁜 숨을 내몰아 쉬는 박제휘 매니저였다.
두고 간 물건이라도 있는 걸까? 자정을 넘긴 시간에 그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은하는 다급한 그의 안색을 보고 우선 문을 열어 주었다. 어쩌면 탑 봉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일지도 몰랐다.
“죄송해요,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연락을 못 받았어요. 무슨 일이죠?”
그런데 현관을 열고 들어온 제휘는 은하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헌터님, 혹시 제주도 소식 들으셨습니까?”
제주도 소식? 그 순간 루나의 경고가 귓가를 스치며 좋지 않은 예감이 밀어닥쳤다.
은하는 쿵쿵대는 심장을 잠재우며 차분히 물었다.
“제주도가 왜요?”
“그것이…….”
말끝을 흐린 제휘는 구체적인 대답 대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TV 리모콘을 들어 전원을 켰다. 삑, 소리와 함께 TV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따로 채널을 돌리지 않아도 바로 그곳에 은하가 원하는 답이 있었다.
「금일 오후 11시경, 한라산 중턱에서 흰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연기는 점차 짙어지고, 건조한 날씨에 강풍을 탄 불길은 산봉우리 전체를 뒤덮고 순식간에 번져 나갑니다. 발화 추정지 부근에 별다른 시설물이나 인적은 없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저 화재 소식 같았다. 그러나 단순한 규모는 아니었다. 마치 활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화면을 통해 보이는 자료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불과 5분 만인 11시 10분쯤, 강도 9 이상의 역대급 지진이 일어나고 제주 동쪽 지역 섬 외곽부터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헌터님?”
리모콘을 손에 쥔 채 TV 앞에 서 있던 제휘가 힐끔 은하를 돌아보았다.
동공을 크게 확장한 채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은하가 돌연 몸을 휘청거렸다.
“헌터님! 괜찮으십니까?”
리모콘을 던지다시피 한 제휘가 황급히 은하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자 은하의 손, 발, 그리고 어깨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협회와 게이트 관리국에서는 원인을 조사 중이며, 정부와 비상 대응단은 필요한 용역과 지원을 전달 중으로 피해 최소화를 위해──.」
“……바.”
은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휘가 “네?” 하고 되묻는 것과 동시에, 은하는 TV를 향해 사납게 고개를 들었다.
화면을 통해 비춰지는 제주도의 모습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데바.”
은하는 어금니를 세게 부딪치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데, 바요?”
제휘는 그 곁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은하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꽉 쥐어진 그녀의 주먹에서는, 손톱이 손바닥 살을 뚫은 탓에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 * *
그리고 다음 날.
뉴스와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피해 지역은 한라산, 그리고 제주도 동쪽 끄트머리였다. 주요 도심을 피해 갔다고는 하지만 간밤에 확인된 사상자의 수만 해도 수백을 훌쩍 넘는다고.
정부와 협회에 의해 제주도민들은 긴급 피난하고 있었고 해당 모습은 각 방송국을 통해 밤새 실시간으로 송출되었다.
「각성자가 나타나며 세상이 뒤바뀐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는데요. 그동안 한 지역, 혹은 국가가 괴멸한 적은 적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게이트의 폭주를 제때 막지 못해 자국은 물론 국경을 마주한 인근 국가에까지 피해가 번진 사례도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어떤 역사서를 찾아보아도 이렇듯 게이트의 출현이나 폭주 없이 한 지역이 괴멸해 버린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S대 지질학과의 박세흔 교수에 따르면, 이것은 오랜 기간 휴화산으로 분류되어 있던 한라산이 폭발하며 일어난 참사로 게이트와는 연관이 없─.」
현재 국가와 협회는 이것을 시스템이나 게이트로 인한 것이 아닌 단순한 천재지변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을뿐더러 두 번째는 재난이라고 공표하는 편이 조금이나마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소파에 앉아 TV 생중계 뉴스를 보며 밤을 지새운 은하는 리모콘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루나와의 일이 있었던 그날부터 정작 하루도 되지 않아 일이 터져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처 대응하지 못했지만, 저 정도 규모라면 대응했었다 한들 은하 혼자서는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도에 가서 데바를 만나야 한다. 만일 그곳에 놈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놈의 흔적이라도 찾아봐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제주도로 이동하느냐인데.’
정부와 협회가 저것을 진짜 자연재해라고 치부해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공표하고 제주도와 인근 해역에 무기한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당분간 구조 작업이 한창 이어질 테니 헤드 헌터 1위인 은하가 거기에 지원한다면 어떨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은하는 집 전화기를 이용해 제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휘는 은하의 의견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째서죠?”
「정부와 협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민심이랍니다. 제주도에서 재해가 일어났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표할 용기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만일 이걸로 끝이 아니라면요?”
「예?」
“지금 이 순간에도 한라산에서 산사태가 이어지고 있어요. 동쪽 끄트머리뿐만 아니라 서쪽까지…… 아니, 도심에까지 피해가 닿는다면요?”
그렇게 된다면 수백은커녕 수만의 사상자가 나오는 것쯤 일도 아닐 것이다.
“제가 직접 가서 원인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음…….」
제휘는 곤란한 듯 신음했다.
「하지만 헌터님, 지금 상황에서 헤드 헌터 1위인 흑염의 프린세스가 출동하게 된다면 그건 제주도에 게이트나 몬스터에 관련한 무언가가 있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게 된답니다. 협회도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헌터님을 포함한 유명 헌터들의 파견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단계죠.」
“지금 그게 문제인가요?”
「저도 물론 협회를 감싸는 건 아닙니다.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다 보면 협회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거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그럼 그때─.」
“그때는 늦을지도 모르잖아요. 제주도의 나머지 지역마저 가라앉게 된다면 그때는 멀쩡하게 조사하는 것도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제주도에 가야 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정부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랍니다. 기상청, 해양수산부에서도 따로 조사 중이고, 협회에서도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요원을 파견하고 있어요. 굳이 헌터님께서 나서시지 않으셔도…….」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다른 헌터들이 있다고 해서, 내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예?」
“매니저님 말대로 전 더 이상 예전과는 달라요. 흑염의 프린세스는 헤드 헌터 1위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내게 따르는 책임을 그 누구에게도 전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은하는 수화기를 꾹 거머쥔 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매니저님. 제가 그럴 수 있도록.”
「…….」
제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간간이 난감한 기색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결국 그는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협회에 가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아무쪼록 큰 기대는 마시고요.」
“아뇨, 매니저님 말씀대로 협회가 민심을 우려하고 있다면 제 관여를 쉽게 허가하지는 않겠죠.”
「그럼…….」
“전용기를 준비해 주세요. 늑대나 실버문의 전용기라면 발각될 테니 다른 것으로요. 배도 괜찮아요. 되도록 내일 중에, 늦어도 모레 아침까지 부탁드립니다.”
이후 전화를 끊은 은하는 손톱을 잘근 물어뜯었다. 제휘가 유능한 매니저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은 부탁일 테다.
정부나 협회의 눈에 발각되지 않으려면 방송국, 조사 단체, 혹은 관련 기관의 마크가 달린 가짜 전용기나 선박을 구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빠듯할 지경에 오늘내일 중으로 구해 오라는 부탁은 하늘에 별을 따 오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은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다른 방법도 찾아 둬야 해.’
제휘는 높은 확률로 전용기를 구해 오지 못할 테니, 은하 쪽에서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제주도까지 헤엄을 쳐서 갈 수 없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이동 수단은 필요했다. 정부와 협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가장 빠르게 이동할 만한 수단이.
이를테면 미국의 탑에서 한국까지 왔을 때처럼.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제휘가 다시 걸어 온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수화기를 들자,
「나야.」
조금 잠긴 듯한 낮은 미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