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1)화 (231/306)


#231. 무엇보다 소중한
2023.03.19.


동두천에 도착한 이준은 균열 근처를 조사하고 있던 이들에게 은하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그중 은하를 목격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은하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녀라면 충분히 주변의 눈을 피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였던 만큼,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분명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걸음을 멈춰 선 이준은 주변을 훑으며 생각했다.

‘우선 조금 더 깊은 숲으로, 검은 균열 부근 쪽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

그러나 그것조차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협회에서 지정한 공식 조사단원이 아닌 이상 S급 헌터라고 해도 근처 수색에 제한이 컸기 때문이다.

검은 균열까지 도달하려면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워낙 움직임이 날렵한 은하에게는 쉬운 일이었겠지만, 이준은 그녀만큼 뛰어난 민첩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에게는 조사단원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은하를 가장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

이준은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새들이 푸드덕 날갯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새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가만히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청설모 따위의 작은 동물이 파스스 낙엽을 밟는 소리, 산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즉 이 숲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는 소리였다.

이준은 그녀를 찾기 위해 그 눈과 귀를 기꺼이 지배하고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준은 양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스르륵 벗었다. 그리고 서서히 무릎을 굽혀 장갑을 벗은 손을 살며시 흙 위에 가져갔다.
맨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크고 작은 생명의 태동.

이준의 주변으로 강렬한 선홍빛 기운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손바닥을 중심으로 흙 표면이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그를 중심으로 아주 미약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순간이었다.

스스스슥…….

이윽고 모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개미나 딱정벌레 따위의 작은 곤충들이 꾸물꾸물 기어 올라왔다. 그뿐만 아니다. 하늘을 날고 있던 까만 새들도, 나무를 타고 있던 다람쥐들도 하나둘씩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의 더듬이가, 털이, 마치 안테나처럼 솟더니 일제히 이준에게로 향했다.

“찾아라.”

이준의 짧은 명령을 시작으로 그곳에 모여 있던 작은 생명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준은 다시 장갑을 꼈다.

동물들에게 명령한 것만으로 모자라다 느낀 이준은 조사단원의 눈을 피해 정신없이 숲을 헤집기 시작했다.

멀끔하게 빼입었던 슈트가 여기저기에 긁히고 까만 구두가 흙이 튀어 더럽혀졌지만 괘념치 않았다.

찌익…….

재킷이 나뭇가지에 걸려 쭈욱 찢어졌다. 작게 혀를 찬 이준은 재킷을 훌렁 벗어 던져 버렸다.

땀을 흘린 탓에 하얀 셔츠가 이준의 상체 실루엣을 따라 착 달라붙어 있었다.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넥타이마저 거칠게 빼내어 휙 던져 버린 그는 다시금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초조하게 움직이던 두 발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 번이면 충분하다.’

30년 전 그 애를 잃었을 때에는 내가 나약해서.

그리고 3년 전 그 애를 다시 잃었을 때는 내가 어리석어서였다.

더 이상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만큼은 꼭.

그러나 그런 이준의 결심과는 달리 페로몬에 홀린 채 이준의 명령을 따르는 크고 작은 동물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을 전해 오지 않았다.

이준 역시도 은하는커녕 그녀의 그림자마저 발견하지 못했다.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과격하게 숨을 몰아쉬던 이준은 날렵한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은하는 이 숲에 오지 않았던 걸까? 이준을 경계한 제휘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어쩌면 이 숲에서, 혹은 숲으로 오는 길에 다른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됐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준의 얼굴도 점차 초조해져만 갔다.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 이준은 색소 옅은 금발을 거칠게 털어 내렸다.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줄어들 때마다 몸에 딱 달라붙은 흰 셔츠도 함께 크게 오르내렸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건데, 차은하……!’

덜컥 겁이 났다.

진짜 그 애가 다시 사라진 건 아닌지. 또다시 그 애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번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닌지.

스멀스멀 따라오던 불안감은 숲의 그늘이 진해질수록 이준을 더욱 지독하게 옭아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은하 주변에 눈과 귀를 붙여 두는 것이었는데. 그 애가 질색하더라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닐 것을.

그러나 이준은 그러지 않았다. 은하가 저를 싫어하게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하다고.

오로지, 오로지 난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된 건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네게서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설령 네가 나를 질색하게 되더라도.

생각해 보면 이 후회도 당연한 것이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쫓는 내내 그는 단 한 순간도 후회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늘 쓰라렸고 괴로웠다. S급 헌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젠장……!’

깊은 숲속, 걸음을 멈추고 덩그러니 서 있던 이준이 주먹으로 근처 나무를 쾅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3궁, 쌍아궁(雙兒宮)이 봉쇄됩니다.]

푸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탑이 봉쇄됐다고?’

이준은 눈매를 찡그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헤드 헌터의 회담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즉 그 짧은 사이 공략대를 구성하여 탑에 진입했을 헤드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을 테다.

그렇다면 은하가 대한민국의 탑을 닫았을 때처럼, 어딘가의 S급 헌터가 단독 혹은 소수로 탑에 진입하여 봉쇄했다는 소리일까?

아니,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시스템창이 알린, 또다시 물음표로 표기된 알 수 없는 봉쇄자를 보면 말이다.

이준은 뒷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자신이 돌아가자마자 이 사태를 살필 수 있게끔 캐서린에게 전반적인 조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

액정 다이얼을 꾹 누르던 손가락을 움찔한 이준이 다급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까악, 까악─

까만 새 두 마리가 이준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울음소리를 냈다.

흐트러졌던 탁한 눈빛에 일순 초점이 돌아왔다. 이준은 아직 보내지 못한 메시지를 뒤로하고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었다.

그리고 검은 새를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타닥, 타닥…….

거센 스파크를 튀기던 검은 균열이 점차 얌전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숲속의 텅 빈 공터에는 불에 탄 듯한 흉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는 한 인영. 방금 전 검은 균열로부터 빠져나온 은하였다.

폭주하는 균열에서 탈출한 여파로 은하의 몸에는 군데군데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드레스가 찢어지거나 양산이 망가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으니.

단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알아 버린 탓에 아직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정돈되지 않았다. 멍하니 양산의 상태를 확인하던 은하는 문득 다른 손에 쥔 물체를 시야에 담았다.

검은 균열을 빠져나오기 직전, 은하가 가지고 나온 것. 그건 바로 정원 흙바닥을 구르던 루나의 인형이었다.

루나가 완전히 소멸한 직후, 그곳에 있던 인형은 마치 주인을 따라가듯 하나둘씩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오직 하나, 가장 낡고 초라한 이 인형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 형태의 다른 인형과는 달리 이 인형은 조그마한 아기 고양이 외형을 하고 있었다.

달랐던 것은 비단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이 인형은 구체관절인형처럼 사실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 솜을 넣어 실로 기운 봉제 인형이었다.

많이 낡아 단추로 매단 눈은 한쪽이 떨어져 있었고, 까만 고양이 털은 듬성듬성했다. 군데군데 손때가 묻은 것이 평소 얼마나 이 인형을 끼고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낡은 봉제 인형’이 ‘낡은 고양이 인형’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이후 루시는 이곳에 깃들게 됩니다.//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눈앞에서 소멸해 버린 루나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루시, 를…… 내, 동생…… 을…….’

그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가슴속에 치밀어 올랐다. 은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분노였다.

루나는 은하와 일면식도 없었던 데다 조디악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죽음에 어째서 이토록 분노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기억을 엿본 탓일지도 몰랐다.

복잡한 눈빛으로 인형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은하는 곧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분이…… 움직이실 거야. 제주, 도…… 라고 하셨…… 어.’

제주도.

분명 루나는 제주도를 언급했다.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루시는 제주도에서 무언가 일어날 것을 미리 경고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무엇이 됐더라도 막아야만 해.’

은하는 머릿속에 두 글자의 이름을 단단히 각인했다.

조디악이 ‘그분’이라 칭하는 자.

그들의 주인이자,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

“──데바.”

소리 내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인형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세게 힘이 들어갔다.

우성 인자라든지, 선별이라든지, 낙원이라든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알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재앙과 비극이 그로부터 시작된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답은 정해져 있다.

아랫입술을 소리 없이 깨문 은하는 검은 균열의 흔적만이 남은 빈 공터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은하는 숲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아는 얼굴과 조우하게 되었다.

“차은하!”

익숙한 목소리에 은하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날카롭게 솟아 있던 눈매가 일순 놀란 듯 둥글게 변했다.

눈앞에서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를 시야에 담는 순간 은하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백이준? 여긴 어떻게─.”

은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 코앞까지 다가온 이준이 와락 은하를 끌어안아 버린 탓이었다.

“다행이다.”

그의 특유의 체취가 훅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데일 듯이 뜨거운 숨이 어깨에 닿았다.

“정말, 다행이야…….”

은하의 어깨를 감싼 양팔에 가득 힘을 주며, 이준은 매달리듯 은하를 끌어안았다.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던 것도 잠시, 은하는 냉정을 찾고 이준을 살짝 밀어냈다.

“난 괜찮아, 백이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준은 의외로 아주 작은 힘에도 움찔 반응하며 쉽게 밀쳐졌다.

“일이 있어. 서울로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무슨 일인데?”

그리 묻는 이준의 은회색 눈동자가 잠시 은하가 쥐고 있는 낡은 고양이 인형에 닿았다.

은하는 꼭 쥐고 있던 인형을 그의 시야로부터 슬쩍 숨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준을 스쳐 지나갔다.

이준은 그런 은하를 다급히 쫓았다.

“잠깐만, 은하야. 네뷸러가 봉쇄되었다는 시스템창이 떴는데 혹시 네가…… 아니, 그것보다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 줘.”

이준이 앞을 가로막고 서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은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게 숨기려고 한다기보다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던 탓이 컸다.

더군다나 은하가 아는 이준이라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도와 전선에 뛰어들 것이 분명했다.

물론 두 사람은 헌터계에서도 최정상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은하의 기준대로라면 두 사람 모두에게 힘에 따른 책임이 있고 상대적 약자들을 수호할 의무가 있었다.

다만 은하의 경우에는 거기에 더하여 헤드 헌터 1위라는 무게가, 그리고 고양이를 되찾겠다는 목표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아니었다.

그의 힘이 필요한 곳은 너무도 명확했다. 적어도 그것이 자신의 옆자리는 아니라고, 은하는 생각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은하도 사람이었다. 충격적인 일을 접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온 탓에 혼란스럽고, 버거웠다.

원래라면 무심한 얼굴로 괜찮다며 신경 쓸 것 없다고 한마디라도 더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겨우 남은 정신은 오로지 한곳에만 쏠려 있었다. 제주도, 그리고 데바.

“심각한 일이야? 말해 줘. 나도 도울 테니까.”

그러나 은하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이준은 계속해서 은하의 얼굴빛을 살폈다.

은하는 왼손에 든 인형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쨌든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서울로 가서 제주도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필요할 것 같다면 바로 공항으로 향하는 일이었다.

다시 이준에게로 시선을 옮긴 은하는 단호히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필요 없는 일이야.”

높낮이 없는 어조로 툭 뱉듯 내던진 한마디. 은하는 그렇게 이준을 휙 하고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뭐?”

뻣뻣하게 굳어 버린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 순간, 은하는 한 박자 늦게 걸음을 멈칫했다.

그리고 서서히 뒤돌았다.

“필요…… 없다고.”

이준은 마치 비수에 난도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차 싶었는지 은하가 살짝 굳었다. 이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방금 생각보다 강한 어조로 말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다만 자신을 돕겠다고 달려드는 이준을 어떻게 말려야 하는지, 은하는 도저히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일은 너와 연관이 없다는 소리였어.”

앞서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어투로 은하가 덧붙였다. 그러나 이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왜 연관이 없어?”

아랫입술을 깨문 이준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너진 표정을 간신히 바로잡은 그가 평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내게도 연관이 있는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두 사람은 오랜 동료 관계였다. 네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만일 은하가 이준의 입장이었더라도, 은하는 기꺼이 그를 도왔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한 명 한 명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기는 했다. 제주도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을 은하도 알았다.

‘하지만…….’

만일 이준이 지금 제주도로 가게 된다면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은하가 그곳에 가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이준이 그곳에서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이유도 단 하나가 될 것이다. ‘은하가 그곳에 갔기 때문에’.

다른 목적이나 까닭이 있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 때문에 이준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곳이 위험하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다.

“네가 S급 헌터고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아. 네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세상에는 많겠지. 그곳을 돌봐. 나는 괜찮으니까.”

은하는 더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이준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안 괜찮아.”

이준이 은하의 팔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은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뒤돌았다. 아프다거나 거부감이 든다기보다는 조금 놀란 탓이었다.

이준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은하의 팔목을 잡은 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가 S급이 된 것도, GIA를 설립한 것도, 지금까지 이 빌어먹을 헌터계에서 버틴 것도 모두 널 위해서였어.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 없다면 이용이라도 해.”

“이용이라니?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널 그곳에 내몰기라도 하라는 소리야?”

“그 일이 네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뭐?”

은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준은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목숨조차 아깝지 않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은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아직도 날 분대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어째서?”

“네 목숨이잖아. 내 목숨이 아니라.”

“어차피 네가 살려 준 목숨인걸.”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준에게 순순히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이유. 그라면 무모한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지키고자 달려들 것 같으니까. 그것은 은하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니까.

“백이준.”

은하가 조금 화가 난 어조로 그를 부르는 순간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이준의 것이었다.

Rrrr…….

숲속 한가운데서 유유히 울리기 시작한 전자음 탓에 조금은 격양되어 있던 두 사람이 침묵했다.

이준은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는지 벨소리를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려면, 너부터 먼저 그렇게 행동했으면 하는데.”

“무슨 소리야?”

“타인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네 목숨부터 지켜. 정작 너는 너를 지키지 않잖아.”

“그건 내가─.”

“그래, 넌 헌터지. 그것도 다른 헌터들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있는. 그래서 그만큼의 책임도 따르는 헌터. 그렇지만 차은하.”

계속해서 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은하가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이윽고 벨소리가 뚝 멈추는 것과 동시에 이준은 붙잡고 있던 은하의 팔목을 놓았다.

“나에게 넌 그냥 너야. 알아?”

“…….”

은하는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792283372671.pn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