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30)화 (230/306)


#230. 쌍아궁(雙兒宮) 루나
2023.03.18.


“루시, 오랜만에 소꿉놀이할까?”

“응? 소꿉놀이?”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있던 루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이었으니까. 늘 바쁘다며 일을 우선시했던 언니가 먼저 소꿉놀이를 제안한 것은.

“웬일이야? 오늘은 별로 안 바빠?”

루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동그란 눈으로 마치 탐색하듯 루나를 훑었다. 루나는 동생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답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네가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아니, 안 바빠. 할래, 할래!”

루시는 하던 일도 멈추고 쪼르르 달려왔다. 그 행위에 아무런 의심도, 경계도 없었다. 그저 기쁨과 설렘뿐이었다.

정원으로 나간 자매는 둥근 테이블에 작고 앙증맞은 인형들을 앉히고,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루나가 주변의 풀을 뜯어 샐러드를 만드는 동안, 동생 루시는 정원의 흙을 퍼 와 조물조물 만져서 갈색 빵을 빚었다.

언니와 함께하는 놀이는 무엇이든 즐거웠다. 비단 그것이 소꿉놀이가 아닐지라도.

“이건 내 거, 이건 언니 거.”

하얀 접시 위에 흙으로 빚은 빵을 예쁘게 올린 뒤 만족스럽게 웃던 루시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 빵이 조금 더 큰가?’

그릇 위에 놓인 가짜 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시가 힐끔 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풀 샐러드를 완성한 루나는 홍차를 따르고 있어서 이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루시는 언니가 알아차리기 전에 얼른 두 빵의 위치를 바꾸고는 헤헤 웃었다. 자신의 빵보다는 언니 몫의 빵을 더 크고 잘 만들어진 것으로 하고 싶었으니까.

“자, 아~ 하세요.”

루시는 언니의 인형들의 입에 샐러드를 먹이는 시늉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목소리 억양을 바꿔 ‘와, 맛있어요!’ 하고 마치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복화술을 하기도 했다.

루나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루시는 그런 언니가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래의 언니는 소꿉놀이를 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마지못해 이쪽으로 다가와 함께 놀아 주고는 했는데, 오늘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괸 채 이쪽을 그저 뚫어져라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언니, 왜?”

“……어?”

“자꾸 쳐다보길래. 언니도 얘랑 놀래?”

루시는 인형의 팔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같이 놀자!’ 하며 복화술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니, 나는…….”

어째서인지 루나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런 루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루시는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언니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제 손에 동생의 시선이 닿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나는 황급히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굳어 있던 표정을 바로잡았다.

“……우선 간식부터 먹고 놀자. 배고프지?”

달그락─

루나는 따듯한 차가 담긴 잔을 루시에게 내밀었다.

루시는 얌전히 잔을 건네받았지만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빛이 묘했다.

“왜 그래?”

잔을 손에 든 채 얼핏 굳어 버린 루시를 향해, 루나가 물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루시는 알았다. 언니는 저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는 것을. 헬렐레하고 다니는 본인과는 달리 원래부터 미소가 서툰 사람이라는 것을.

“네가 좋아하는 차야. 소꿉놀이 전에는 항상 마시는 거잖아. 싫어?”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저은 루시는 다시 또르륵 아래로 시선을 떨구어 물끄러미 잔을 응시했다.

루나의 등줄기에 소리 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눈치로 보아 루시는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다.

‘내가 독을 타는 걸 본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루시가 소꿉놀이 삼매경인 것을 분명 확인했으니 말이다.

“고마워, 언니.”

“……어?”

“향 진짜 좋다. 역시 언니는 뭐든 잘해.”

루시는 손가락으로 잔 표면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나, 언니 동생이라서 다행이야.”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싱겁게 답한 루시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루나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마침내 잔이 입술에 닿기 바로 직전, 루시가 배시시 웃었다.

“다시 태어나도 언니 동생이었으면 좋겠다.”

……뭐?

그 순간 뚝,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돌연 시간이, 사고가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억이 파도가 되어 루나를 집어삼켰다. 루나는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그 파도에 휘말렸다.

기울임‘언니, 끝말잇기 할까?’

‘일 언제 끝나? 소꿉놀이는 어때?’

‘역시 언니가 최고야.’

언니, 언니…….

귓가에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내 동생, 루시의 목소리.

‘그 아이에게는 자격이 없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고 믿고 싶구나.’

그 위로 그분의 목소리가 겹쳐져서 정신이 혼미했다. 마치 머릿속에 검고 탁한 안개가 잔뜩 낀 듯한 기분.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소용돌이치며 일그러진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이윽고 루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쨍그랑─!

“……언, 니?”

루나는 루시가 들고 있던 찻잔을 있는 힘껏 내리쳐 버린 뒤였다.

그날 이후로도 자매의 사이는 변하지 않았다.

루시는 늘 그랬듯 “언니, 언니.” 하며 루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그날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캐묻지 않았다.

그 찻잔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지금은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조차도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렇지만 루나는 알고 있었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고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데바는 분명 루나에게 ‘명령’했고, 불이행 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았으니까. ‘그자’가 어떤 식으로 추방당했고 어떤 형벌을 받게 되었는지.

‘어떻게든 해야 해.’

루나는 초조한 기색으로 까드득 손톱을 깨물었다.

이제 계획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차원에서 새로운 채널을 생성하기까지 시간이 없다는 소리였다.

딱 한 가지, 생각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루시를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으면서도 데바의 명령도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선택지는 그것 하나뿐이야.’

루나는 저 멀리, 자신과 똑같은 드레스에 똑같은 양산을 든 채 인형들에게 둘러싸인 루시를 보며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다음 날.

“루시, 갈 곳이 있어.”

루나는 루시를 데리고 네뷸러의 끝자락, 현실과 환상의 경계라고도 부르는 ‘별무덤’으로 향했다.

구슬픈 바람이 흐느끼듯 불어오는 공허한 공간. 벼랑 아래로 보이는 것은 어둠에 짙게 물들어 그 끝이 어디인지도 결코 내다볼 수 없는 까마득한 허무(虛無).

그곳은 네뷸러에서 길을 잃은 인간이나 쓸모없어진 인형, 그 외 잡다한 것들을 모조리 내던지는 쓰레기통 같은 곳이었다.

성운의 주인, 별의 가호가 깃든 조디악은 갈 수 없는 부정한 곳이지만, ‘기능을 못 하는 반편이 별’ 루시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루시는 발아래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끝을 흐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루시였다. 일전의 일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루시도 확실히 알아챈 것일지도 모른다. 천진하고 순수하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는 아이는 아니니까.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던 루나는 시선을 들어 하나뿐인 동생, 루시를 응시했다.

루시 역시 같았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별무덤’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루나와 눈을 맞추었다.

루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분의 눈과 귀가 언제나 따라다니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순간 루나가 루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미안해, 루시.”

파앗─!
루나가 루시의 등을 밀치는 순간, 그 아이의 눈이 커졌다.

휘오오오…….

구슬프고도 허무한 바람이 둘 사이를 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닮은 빛깔을 한 두 소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엉켜 붙듯 허공에 흩날린다.

커다랗게 확장된 동생의 동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이윽고 바람이 멎었을 때, 루시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다만 그 애의 비명이 벼랑 아래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루나는 밀려오는 죄책감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고여 있던 슬픔이 눈꺼풀에 괴롭게 밀려나며 결국 뺨을 적신다.

루나는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루나는 온 힘을 다해 루시를 밀쳐 내지 못했다. 그럴 마음만 먹었더라면 루시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루시는 그러지 않았다.

“루시…….”

더는 동생이 없는 그곳에서, 루나는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미안해, 루시. 정말 미안해.

언젠가, 언젠가는 언니가 꼭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나를…….

용서하지 마.

* * *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그건…….’

마치 주마등처럼 은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기억. 그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닮은 이목구비의 두 소녀…… 루나와 루시의 기억이 틀림없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온 탓에 잠시간은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탁이야.”

눈앞에서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루나를 시야에 담은 순간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온몸이 거의 반투명해져 버린 루나는 은하에게 전할 말이 남았는지 힘없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분이…… 움직이실 거야. 제주, 도…… 라고 하셨…… 어.”

─제주도?

은하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루나, 정신 차려. 제주도가 어떻게 된다는 거야?”

다급히 캐물어 보아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전에 루시, 를…… 내, 동생…… 을…….”

루나는 결국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치 진짜 별이 되기라도 한 듯, 반짝이는 가루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휘이이이─

텅 비어 버린 정원.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바람이 불어온다.

소녀가 아끼던 사랑스러운 노란 꽃들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흩날리며, 푸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3궁, 쌍아궁(雙兒宮)이 봉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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