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9)화 (229/306)


#229. 쌍둥이 별
2023.03.17.


“언니, 내가 오늘 밖을 돌아다니다가 이걸 발견했는데─.”

루시는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내가 새를 쫓아내고 주워 온 거야.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자, 받아. 나 잘했지?”

루시의 이야기는 늘 ‘언니’로 시작하고 ‘언니’로 끝이 났다.

“언니, 끝말잇기 할까?”

“일 언제 끝나? 소꿉놀이는 어때?”

“언니, 오늘은 놀아 줄 거야?”

“언니─.”

언니, 언니…….

루시는 언제나 루나를 쫓아다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루시의 특기는 언니를 흉내 내는 것이었고 단점은 그 외의 모든 것들이었다. 따라서 루나는 늘 동생인 루시의 몫까지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그것이 결코 버겁게 느껴졌던 건 아니었지만, 그런 저의 고생도 몰라주고 시도 때도 없이 놀아 달라고 졸라 대는 동생을 보고 이따금씩 울컥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 애는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루시는 인형술에 능숙한 제 언니를 늘 부러워했다. 언니가 만든 예쁘고 아기자기한 인형은 루시의 보물이었고 또한 목표였다.

“나도 언니처럼 인형을 잘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루시는 언니가 만든 인형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루나는 그런 루시를 힐끗 바라보고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나 잘하지 못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잘할 수 있는 일……?”

“넌 나처럼 인형을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루시 네게도 분명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란 소리야.”

얼핏 들으면 따스한 위로 같았지만 사실 흘러가듯 했던 말이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아서.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더 성가셔질 테니까.

차라리 평소처럼 적당히 활기차게 주변을 빨빨 뛰어다니는 편이 마음 편했다.

“정말 그럴까?”

루시는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루나는 “응.” 하고 대답할 뿐 더 이상의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당시 루나는 동생을 위로하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하고도 바쁜 일이 많았으니까.

‘하나의 자리에 둘이 함께 앉을 수는 없다. 그만큼 힘이 분산되고 효율이 나빠질 테니. 쌍아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분께 증명해 보여야만 해.

루나는 저를 따라다니는 루시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언니, 내가 뭘 가져왔는지 맞춰 봐!”

루시는 자신이 만든 인형 옷을 가지고 왔다.

“이건…….”

루나는 루시가 만들어 온 드레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길고 하늘하늘한 흑단, 허리에 달린 검은 리본, 촘촘한 레이스와 가슴 부근의 흑장미 코사지까지. 루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닮은 것이었다.

인형을 만드는 것은 익숙한 루나였지만 의상을 만드는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루시가 가져온 인형 옷은 루나가 만든 엉성한 드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멋진 드레스였다.

“언니 말이 맞았어. 나한테도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루시는 뛸 듯이 기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인형 옷을 만드는 일 자체는 그다지 굉장하다 할 만한 능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형 옷이니까.

‘인형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

이 정도로는 그분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루나는 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신이 난 동생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대신 루나는 루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잘했네.”

이후 루시는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루나의 인형에 입혔다. 루나의 인형들은 하나둘씩 아무 무늬도 장식도 없는 흰 원피스 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루시는 드레스에 그치지 않고 장신구까지 만들어 냈다. 펜던트, 구두, 머리 장식에, 심지어는 양산까지.

굳이 저런 것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루시가 저렇게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 원하는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이것 봐, 난 얘가 맘에 들어. 언니랑 엄청 닮았잖아. 공주님 같아.”

그 인형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흑장미 코사지가 달린 까만 드레스까지 모든 것이 루시를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진짜 예쁘다. 그치, 언니?”

루시는 인형을 집어 들고 배시시 웃었다.

“왠지 엄청 세 보여. 이전에 네뷸러를 찾아온 사람이 뭐였더라, 흑염룡? 그런 이야기를 했었잖아.”

“그랬던가?”

“응! 저쪽에서 유행이라며. 얘도 왠지 그런 걸 막 소환하면서 싸울 것 같아. 아무튼 엄청 센 거지!”

반짝반짝 작은 별…….

가장 아끼는 인형 1호를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루시는 번뜩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얘 이름은 어떻게 하지?”

“이름?”

“응.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어.”

……굳이?

루나는 흥미 없는 얼굴로 인형을 힐끗 쳐다보더니 금방 다시 시선을 거두며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흑염의 프린세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흑염룡이니 공주님이니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해 대니까, 그냥 적당하게 갖다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거 진짜 좋다!”

설마 루시가 덥석 물어 버릴 줄이야.

잔뜩 신이 난 루시는 루나의 품에 찰싹 달라붙어 마구잡이로 뺨을 비볐다.

“역시 언니는 최고야.”

언니, 정말 좋아.

언니, 언니…….

루나는 제 품에 포옥 안긴 루시를 조금 떫은 눈으로 응시했다. 품에 날아든 동생 때문에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으므로.

‘아직 완성해야 할 인형이 산더미인데.’

뭐가 그렇게 신이 나고 기쁜 걸까.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루나는 루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루시의 눈빛에 담긴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애정이었다.

* * *

조디악.

황도 십이궁(黃道十二宮)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저마다의 낙원, 네뷸러를 가지고 있었다.

조디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네뷸러라는 독자적인 공간을 창조했고 관리했으며 지배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각 차원에서 우성 인자를 선별하여 저마다의 네뷸러로 데리고 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차원에서는 조디악을 신처럼 따랐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그들을 재앙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런 조디악을 이끄는 존재.

태초의 별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별 중 하나.

그것이 조디악의 주인, 데바였다.

데바의 네뷸러는 다른 조디악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백색, 흑색, 혹은 회색. 그러한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공간.

마치 오래전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방의 지면이 내려앉아 있고, 정 가운데 폐허에 가까운 성 한 채가 쓸쓸하면서도 장엄하게 부유하고 있다.

데바는 고요한 황혼이 깃든 폐허의 성에서 쌍아궁, 루나를 맞이했다.

“왔구나, 내 아이야.”

금이 간 스테인드글라스를 등지고 선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목까지 떨어지는 긴 백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로브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드를 뚫고 나온 거대한 두 개의 뿔이 눈에 띄었다.

특히 남자의 머리 위에 있는 황금빛의 문양은 멀리서 보면 마법진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자세히 보면 천체를 작게 축소해 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찬란하고 위압적인 별의 주인, 데바. 그 언젠가 어느 한 차원의 인류는 그를 이렇게 칭하기도 했다.

─평천대성(平天大聖).

하늘을 평정하는 큰 성인이라고.

“데바께서 무엇 때문에 너를 불렀을까?”

데바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 아이섀도를 펴 바른 듯 붉게 물든 눈두덩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몸 곳곳에 주렁주렁 매단 화려한 남자.

제8궁, 천갈궁(天蠍宮)의 주인 예가임이었다.

매사에 진지하지 못하고 데바를 제외한 나머지 조디악을 무시하는 태도는, 수십 년 만에 조우해도 여전했다.

루나는 예가임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데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뷸러 완성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인류를 선별하는 작업을 마치고 차원을 이동하기 전에, 조디악은 네뷸러를 리셋(Reset)하고 재생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쌍둥이자리, 쌍아궁은 늘 다른 조디악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럴 줄 알았지.”

예가임이 코웃음을 쳤다.

“이전 차원에서 알아봤어. 듣자 하니 쌍아궁의 네뷸러에는 인간들이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던데. 네 동생은 인간을 지배하는 일보다 그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는 데에 관심이 있어 보이더라.”

루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 예가임이 삐딱한 자세를 취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네뷸러는 놀이터가 아니야.”

“…….”

루나가 차갑게 시선을 들어 예가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예가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의 미소를 더한 채, 상체를 숙여 루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너희 같은 녀석들이 조디악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 양 새끼랑 다를 게 없─.”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콰지직!

루나의 어깨를 건드렸던 예가임의 손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아니, 그저 으스러진 것이 아니었다. 손목 아래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에 손이 갈려 나간 것처럼…….

예가임은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그는 알았다. 이건 루나의 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허무(虛無)로 바꾸는, 위대한 힘.

파괴와 창조의 주인.

“……요, 용서를, 데바시여.”

예가임은 루나가 그리하고 있듯, 데바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데바는 그를 꾸짖지 않았다. 이후 예가임의 손은 다시 원래의 형태를 찾았다. 파괴와 반대되는 힘, 창조였다.

“들어라, 아이야.”

후드 아래 가려진 데바의 눈동자가 정확히 루나를 향했다.

“다음 차원에서는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 녀석’이 추방당한 이후, 우리는 이제 열한 명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 이상으로 완벽을 기해야만 한다는 뜻이지. 데바가 덧붙였다. 그 앞에서 루나는 조용히 몸을 낮추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것도 잘 알고 있겠구나.”

데바는 상체를 숙여 루나에게로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던 루나의 턱을 살포시 집어 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능을 못 하는 반편이 별이 아니라, 유일하고 유능한 별의 주인이란 걸.”

데바의 말에 루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급히 데바의 로브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데바시여.”

“그 아이는 내게 속할 자격이 없다.”

루나의 말꼬리를 자른 데바는 곧이어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고 믿고 싶구나.”

“그렇지만…… 그렇지만 루시도 최근에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양산과 장신구도……!”

스스스─

루나의 주변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 나타났다. 루나와 거의 똑같은 생김새를 한 그것은, 그녀의 충실한 종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이전과는 달리 완성도 높은 드레스와 양산까지 든 인형. 루나는 데바를 향해 야심 차게 그것을 선보였지만,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아.”

파직─

루나의 인형에 돌연 굵은 빗금이 번지기 시작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데바에게 턱이 잡힌 루나는 인형에게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파직, 파지직…… 털썩.

완전히 망가져 버린 인형은 루나의 곁에 시체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마치 바람에 마모되기라도 하듯, 인형은 손발 끝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큭.”

머지않은 곳에서 예가임이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드레스 자락을 세게 움켜쥐었고 치마 위로 구깃구깃한 주름이 졌다.

내가 만들고 동생이 옷을 입힌 인형.

우리와 똑 닮은 생김새를 한 인형이, 눈앞에서 완전히 망가져 가는 것을 바보처럼 보고만 있었다.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이 사라지기 직전까지도 살려 달라는 듯, 해치지 말라는 듯, 인형의 눈동자는 루나에게만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데바가 루시를 처리하는 것 또한 이처럼 간단명료할 것이다.

즉 데바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루나에게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명하라는 것이다.

동생의 가치를. 또한 자격을.

“……네, 데바시여.”

괴로운 듯 눈매를 찌푸리던 루나는 결국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방법이 없었다.

16790350918135.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