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8)화
(228/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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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언니가 해 주고 싶은 말
2023.03.16.
루나는 더 이상 은하를 공격하지 않았다.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정원. 샛노란 꽃이 사랑스럽게 핀 꽃밭 곁. 은하와 루나는 그렇게 멀지도, 그렇다고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나란히 서 있었다.
“─그렇게 된 거야.”
은하는 루나에게 고양이, 루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디서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계약을 하게 되었으며, 둘은 어떤 식으로 지냈는지까지 가능한 한 세세하게.
루나는 단 한 번도 은하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그저 묵묵하게 경청했다.
“그랬구나.”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루나는 소리 없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아이는, 고양이가 되었던 거구나.”
루나는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널 언니라고 불렀고.”
은하의 시선이 힐끔 루나에게 닿았다. 루나의 눈동자는 분명 노란 꽃이 핀 정원을 향해 있었지만 사실은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가 고양이가 된 건, 아마도 ‘그곳’에 호랑이 모습의 맹수형 몬스터가 가득했기 때문이겠지. 루시는 흉내를 내는 걸 좋아했거든.”
아마 반쯤 실패해서 고양이가 되어 버린 걸 거야.
루나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득한 슬픔, 그리고 후회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루나는 조디악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잃어버린 언니.
그저 그렇게만 보였다.
루나에게서 다시 시선을 거둔 은하는 정면의 꽃밭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같은 방향을 응시하며 루나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언노운 게이트는 배수구 같은 거야. 우리는 쓰레기통이라고도 불러. 네뷸러에서 떨어져 나간 온갖 찌꺼기들이 모이는 곳이거든.”
“……찌꺼기?”
“그래. 쓸모없어진 존재, 떨어진 네뷸러의 파편,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뒤섞인 곳이지. 너도 그곳에서 루시를 만났다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곳은 상식이, 시스템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오류나 버그가 난무하는 곳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지. 그 애가 그곳에서 반쪽짜리 신수가 된 것도, 언노운 게이트라면 설명이 돼.”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은하가 물었다.
“보아하니 동생을…… 루시를 꽤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다가 언노운 게이트에서 잃어버리게 된 건데?”
“…….”
루나는 입을 닫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걸까.
은하는 확인차 다시 한번 물었다.
“한때는 조디악이었던 고양이가 사고로 언노운 게이트로 떨어진 거고, 모종의 이유로 신수가 되었다는 건가?”
“사고가 아니었어.”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 애를 거기에 버린 거야.”
“왜지? 아끼던 것 아니었나?”
“그 애를 살리려면 그래야만 했으니까.”
─다른 방법 따위 없었으니까. 루나가 덧붙였다.
“그 애는 네 이름을 빌려 언노운 게이트를 빠져나갔던 걸 거야. 사실상 루시는 조디악도 아니고 시스템이 온전히 인지한 신수도 아니니, ‘현실’에 머무를 수 없을 테니까. 말하자면 오류에 불과한 셈이야. 어떻게든 현실에 실재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했고, 그래서 네 이름을 빌린 거지.”
“그 말은, 내가 이름을 다시 주면 돌아올 수 있다는 건가?”
“그래. 그런 방법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름을 빼앗긴 네 쪽을, 시스템은 오류로 받아들일 거야.”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F급으로 판정되었던 이유, 유독 자신의 단말기만 말썽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장 좋은 건 진짜 이름을 돌려주는 방법인데……. 루시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있을 거야. 그래서 난 그 애를 찾아서 이름을 알려 주고 다시 데려오려고 했던 거고.”
거기까지 말한 루나는 반쯤 포기한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 틀린 것 같네.”
“틀렸다니?”
“그 애는 다시 언노운게이트에 갇혀 버렸을 테니까.”
“직접 찾으러 가면 되잖아. 가서 네 이름은 루시라고 말하면 되는 거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조디악은 언노운 게이트로 들어갈 수 없어. 구조적으로 그렇거든. 그래도 난 갖은 수를 써서라도 그 애를 다시 찾으려고 했어. 내가 보낸 신호라는 걸 루시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 만든 인형에 드레스를 입히고 양산을 쥐여서.”
루나는 은하가 손에 들고 있는 양산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내가 아직도 너를 찾고 있다고.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그렇게 계속. 그런데 정작 그 신호를 받고 이곳에 찾아온 건 루시가 아니라 너였지.”
그것이 바로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의 정체였나.
비록 동생을 찾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괴담 속 존재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쳤고 공포에 떨었다. 은하 역시 그 괴담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받았고.
그렇다면, 만일 루나가 루시를 찾게 된다면 더는 동생에게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괴담도 사라질 거고.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고양이를, 루시를 찾아올게. 그러면 되잖아.”
“……네가?”
양산을 응시하고 있던 루나가 은하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루시를 찾기 위해서 언노운 게이트로 뛰어들어 가겠다는 소리야? 다시는 바깥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래.”
“왜?”
루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넌 루시의 이름도 몰랐잖아. 실제로 본 적도 없다며. 그런데 왜?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애를 찾으려는 건데?”
왜냐고?
단지 늘 곁에 있었던 고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찾으려고 했다.
은하에게는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루나는 왜냐고 묻는다. 따지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은하의 진짜 속내를.
사실 은하가 고양이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은하에게 있어서 괴담을 잠재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그 애는 가족 같은 존재니까.”
“……가족?”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루나의 표정이 변했다. 아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희미한 불신을 품었다.
“루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루나의 말이 맞았다.
은하는 아직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루나의 말대로 고양이의 진짜 이름도 여태 모르고 지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뭐?”
“그 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게 그 애가 어떤 존재였는지가 중요하지.”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루나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루나도 은하를 향해 돌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애를 다시 찾을 거야. 고양이가, 루시가 그리우니까. 미안한 게 많고 고마운 것도 많아. 다시 만나면 해 주고 싶은 말은 훨씬 더 많고.”
“어떤 말?”
글쎄. 은하는 루나가 품에 꼭 안고 있는 고등어 쿠션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늘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고.”
─네 덕분에 그때의 나는, 견딜 수 있었다고.
그렇게 중얼거린 은하가 다시 얼굴을 올려 루나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우선은 그 말부터 하고 싶네.”
루나의 시선이 오랫동안 은하에게 머무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래?”
탐색하듯 은하를 꿰뚫던 시선이 이윽고 멀어졌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루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던 것 같았다.
하지만 금세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루나는,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고등어 쿠션을 은하에게 다시 가져가란 듯 내밀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고등어 쿠션을 건네받은 은하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루나는 망설이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결심했다.
“너, 그분에게 이미 눈도장이 찍혔을 테니까.”
그 순간 천갈궁의 주인, 예가임이 했던 ‘제안’이 불쑥 떠올랐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그분께 자격을 증명해 보이기만 한다면, 넌 영생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과 권력,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을 누리게 될 거야.’
분명 그도 ‘그분’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은하는 예가임이 말했던 자와, 지금 루나가 말을 하고 있는 자가 동일 인물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희가 말하는 ‘그분이라는 건…….”
“모든 조디악의 주인.”
휘이잉…….
불현듯 두 사람 사이를 서늘한 바람이 꿰뚫고 지나친다. 닮은 빛깔을 한 두 사람의 흑발이 흐드러지듯 나부낀 그 자리에서 속삭이듯, 경고하듯 들려온 짧은 이름.
“─데바(天神).”
데바……. 은하는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따라 읊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만의 낙원을 만드는 것. 각 차원의 우성 인자만을 뽑아 놓은 완벽한 세상을 꿈꾸고 계셔. 네뷸러는 아직 미완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꿈의 결정체야.”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각 차원에서 우성 인자만을 뽑는다.’ 루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조디악도 원래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었던 거야?”
“일부는. 적어도 나와 루시는 그랬지. 솔직히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
“그럼─.”
은하가 조금은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에단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에단?”
루나의 눈이 커졌다. 놀란 얼굴이라기보다는…… 왜일까.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이다.
지금까지 보였던 그 어떤 표정과도 다른, 그런 낯선 얼굴로 루나는 은하의 손목을 붙들었다.
“네가 그를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에단과 엮여서는 안 돼.”
왜냐하면 그는─.
루나가 황급히 덧붙이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이, 황금색 홍채를 제외한 나머지 흰자 부위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컥……!”
돌연 루나가 자신의 목을 잡고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 내더니 온 관절을 꺾어 가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은하가 루나에게 다가갔다. 은하의 손이 루나의 어깨에 닿기 직전,
“오지 마!”
파앗!
비명을 지르듯 버럭 소리친 루나가 손바닥으로 거칠게 은하를 밀어냈다. 하마터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던 은하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비틀거리는 시야를 바로 했다.
그리고.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루나가 풀썩 제자리에서 쓰러지더니,
파스스…….
그녀의 몸이 손가락 끝부터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한다. 마치 마모되는 바위처럼, 다 타 버리고 남은 잿더미처럼 그렇게.
“젠장! 이게 대체…….”
설마 죽는 건가? 하지만 왜? 은하는 루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둘을 제외한 다른 존재는 없었다.
“예상, 한…… 일이야…….”
바닥에 쓰러진 루나가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외부인에게 정보를 흘렸…… 으니…… 그분, 은…… 모든 걸…… 보고, 듣고 계시…….”
안 된다. 아직 물어볼 것이 많았다.
그러나 루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던 데다, 은하에게는 회복 관련한 능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루나는 먹물이 번지듯 검게 물들어 버린 눈자위를 움직였다. 정원 구석에,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물건들이 보인다.
풀을 뜯어 만든 샐러드, 분수 물에 꽃잎을 동동 띄운 차, 흙으로 만든 빵. 그리고…….
“루나? 루나!”
고등어 쿠션과,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은하를 차례로 눈에 담았다.
아.
알 것 같았다.
루시가 은하를 언니라고 불렀던 이유에 대해.
분명,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나를 여전히 그리워했던 거야.
‘바보 같게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루나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서렸다.
루나는 손바닥이 사라지고 이제는 손목마저 사라지고 있는 팔을 천천히 은하에게로 뻗었다.
절반 이상이 검게 물들어 버린 홍채가 마지막으로 은은한 황금 빛을 품었다.
“아…….”
루나를 붙잡고 있던 은하가 멈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의 기억이 은하의 뇌리에 서서히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