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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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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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
2023.03.15.
촤아아악!
은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형들을 양산을 휘둘러 박살 냈다.
분명 방에서 마주쳤을 때는 놀아 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공격해 오지 않았던 인형들이 지금은 은하를 물어 죽일 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건 아마도 루나의 영향이겠지.
촤악!
다시 한번 양산을 휘두른 은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감히 누구 흉내를 내는 거야.”
루나가 으득 이를 갈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차를 마시지 않아서? 아니, 그것보다는 ‘루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기 때문인 듯했다.
은하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아니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던 건 본인이었으면서.
하지만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눈앞의 이 소녀, 루나는 적이라는 것을.
‘역시 아까 기습을 해서라도 해치웠어야 했나.’
은하가 뒤늦은 후회를 머금는 순간,
“가짜 주제에……!”
번쩍! 루나의 눈이 밝게 빛나더니 은하의 양산에 의해 파손되었던 인형이 순식간에 원상 복구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은하는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세워 왔던 가설에 좀 더 확신을 가졌다.
저택에서 발견했던, 괴담 속 존재와 외형도 크기도 같았던 인형.
만일 은하의 예상이 맞다면, 괴담 속 존재를 현대에 보낸 건 루나일지도 모른다. 괴담 속 존재도 아마 이런 식으로 복구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해치우고 해치워도 끊임없이 계속 나타났던 걸 테고.
‘어쨌든…….’
은하는 양산을 바로 쥐었다.
상대는 인형술을 사용한다. 무기이자 전략이기도 한 인형 자체는 수가 많을 뿐 개체 하나하나가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이런 식의 전투는 이전에도 꽤 겪었다. 복계산에서 쓰러트렸던 스켈레톤, 그리고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의 생흡충이 좋은 예시였다.
그 전투에서 은하는 확실히 깨달았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적을 일일이 상대하는 건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일밖에 못 돼.’
수많은 개체를 조종 및 제어하고 있는 술사(術士), 즉 본체를 해치우는 것이 빠르다.
매혹, 소환, 창조 등의 능력으로 물체나 생명체 따위를 부리는 헌터의 경우, 헌터 본인은 생각보다 전투력이 낮았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체력이나 근력, 민첩성 등 신체적인 부분보다는 고유 능력을 사용하고 다루는 능력, 즉 마력에 훨씬 더 많이 능력치가 투자되어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특히 부리고 있는 개체의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본체는 더욱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즉 루나가 인형을 복구하고 또 조종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타이밍만 잘 노린다면 승산은 있다.’
적어도 아스트와 예가임보다는, 훨씬.
은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형들을 도움닫기 삼아 발을 굴렀다. 힘의 작용으로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휘리릭, 탁!
가장 고점에 다다랐을 때 재빠르게 양산을 던졌다 받으면서 잡는 자세를 변경,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한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사이, 은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지난 전투의 기억들.
은하는 지금까지 2개의 탑을 닫았지만, 사실 아스트에게도 예가임에게도 승리하지 못했다. 은하가 생각하기에 패인(敗因)은 두 가지.
첫째는 그들의 능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속도가 은하의 기존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우, 은하는 대강이나마 루나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속도.’
적이 눈으로 따라오지 못하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정도로 빠르게,
‘내리꽂는다.’
슈욱, 콰아앙─!!!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낙하한 은하는 마치 장검을 다루듯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그 결과 정원의 땅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주변 일대가 크게 흔들리며, 정원의 여린 꽃들이 파르르 꽃잎을 떨어트린다.
혼미한 시야 속에서 손가락을 타고 찌릿하고도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 명중한 것이다.
다만 목표물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단단해.’
마치 양산 끝이 강철에라도 닿은 듯한 감각. 그러나 소녀의 모습을 한 루나의 신체가 그 정도 경도를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휘익!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은하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은하는 가까스로 목을 뒤로 빼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상체를 뒤로 완전히 젖혀 두 팔로 땅을 짚고, 백 텀블링을 하듯 루나로부터 재빠르게 멀어졌다.
휘이이이…….
바람이 불어오며 자욱하던 흙먼지가 점차 가라앉는다. 뿌연 시야 가운데 루나의 작은 실루엣이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은하는 다음 도약을 위해 상체를 낮추었다.
이윽고 은하의 손바닥이 땅에 닿았을 때.
“그 양산, 생각보다 단단하네.”
즈즈즈…….
흙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딴 가짜, 부숴 버릴 생각이었는데.”
“……!”
은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은하가 양산으로 내리쳤을 때 느꼈던 그 단단한 감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루나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물건. 그것은 은하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우아한 양산’과 거의 완벽하게 똑같았다.
똑같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휘이익!
루나가 크게 양산을 휘둘렀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양산 끄트머리는 검은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눈앞을 스쳤다.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둥글고 커다란 포물선을 그린 다음, 양산 끄트머리가 왼쪽 끝까지 다다랐을 때…….
‘손잡이를 잡은 손목을 살짝 꺾어─.’
부웅!
‘가로로 상대를 찌른다.’
채애앵!
루나의 움직임을 읽은 은하가 자신의 양산으로 공격을 막아 내자 루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게? 마치 그런 표정이었다.
사실 놀란 건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은하는 루나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이 아니었다.
‘왜지?’
루나가 양산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방식이 은하의 방식과 거의 흡사했다.
양산을 무기로 사용하다 보니 공격 방식이 유사해진 걸지도 모른다. 양산을 펼치지 않은 채 휘두르면, 필연적으로 검처럼 다룰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언노운 게이트에서 양산을 얻었을 때, 양산을 다루는 법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려 주고 도움을 주었던 건 고양이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헛스윙을 보며 탄식합니다.]
[휘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허를 찌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그렇지! 이제야 당신의 움직임이 만족스러운지 크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짜란다, 짜란다, 짜란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은하가 루나의 움직임을 읽어 낸 것처럼 루나 역시 은하의 움직임을 읽어 낼 수 있을 거란 점이었다.
‘까다로워지겠어.’
하지만 눈치로 보아서는 아직 루나는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휘익, 탁!
양산을 맞댄 채 은하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루나는 일거 퇴각했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 양산을 잡는 손의 각도를 달리하는 것이 보였다.
인형술을 사용하고 있으니 본체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오산이었던 모양이군.’
은하 역시 루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양산을 바로 잡았다.
하나, 둘, 셋.
마치 그렇게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두 그림자가 동시에 팟! 하고 사라졌다.
챙! 채앵! 챙!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마찰음.
은하는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생각했다. 아스트와의 전투도, 예가임과의 전투도 상당히 힘들었지만 이건…… 조금 다른 의미로 힘든 전투가 될 것 같다고.
마치 거울 속의 자신과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조금만 더 전투를 이어 간다면 루나도 분명 은하와 자신의 방식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깨달았군.’
은하가 양산을 휘두르면, 루나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대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역으로 루나가 양산을 휘두르면, 은하 역시 그것을 훤히 읽어 낸 듯 가뿐하게 공격을 회피했다.
이대로라면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지금까지 이상으로 강한 힘을 주었다. 까득, 손가락 뼈마디가 둔탁한 울음을 흘리며 새하얀 손등에 푸른 혈관이 돋아난다.
은하는 여태 그래 왔듯 다시 한번 똑같이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악!
그러나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피식 웃음을 흘린 루나는 아까처럼 손쉽게 은하의 공격을 회피하고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가 기회였다.
‘도와줘, 고양아.’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권능 ▶ ‘고양이의 발톱’ 활성화.]
[그림자 속에 숨은 고양이가 당신의 움직임을 흉내 냅니다. 스킬을 포함한 모든 공격의 위력이 2배, 타수가 1회 추가됩니다.]
“……?!”
멈칫─
찰나의 순간 루나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굳어 버린 사람처럼 두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공이 극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분명 보았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루나는 재빠르게 공격을 회피했지만, 그 잠시의 동요는 꽤 커다란 흉터를 남겼다.
촤아악─!
“읏.”
루나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감쌌다.
드레스가 찢어졌다. 은하의 공격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했던 탓에 어깨에 깊은 부상을 입은 듯했다. 손 아래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루나는 상처를 한 손으로 감싼 채 다시 은하로부터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그러나 고통 때문인지 움직임이 이전보다 둔했다. 게다가 양산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어깨에 대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의 공격도 이전보다 부자유한 상황.
그 정도면 충분한 빈틈이었다.
화르륵!
자리를 피하려던 루나의 뒤로, 마치 장벽처럼 검은 불꽃이 펼쳐졌다.
루나는 자신의 뒤를 가로막은 검은 불꽃을 한 번, 그리고 눈앞에 선 은하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찢어져 버린 드레스 천. 그 아래로 루나의 어깨가, 별자리 문양의 표식이 훤히 드러났다.
‘어깨 쪽에 별자리 모양의 타투를 새긴 사람을 봤다고 했던 것 같아.’
그루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그루의 죽은 친구, 세온이 보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눈앞의 이 소녀, 루나였던 것 같다.
루나에게서 느꼈던 그 강렬한 기운. 그리고 어깨의 저 문양.
역시 그녀는 조디악이 맞았다. 또한 그 사실이 확실해졌다면 은하가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
아스트도, 예가임도 이 손으로 해치우지 못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또각─
은하는 루나를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날개가 달려 있지 않은 이상, 뒤는 흑염 장막이고 앞은 은하가 버틴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은하는 양산을 땅에 끌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슈우우…….
곧 은하의 흑염이 양산을 고요히 휘감기 시작한다. 양산의 형태를 따라 피어오른 흑염은 당장에라도 루나를 집어삼킬 듯 점차 기세를 더하며 강렬하게 타오른다.
이윽고 그 기세가 극에 달했을 때, 은하는 조용히 양산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루나가 느릿하게 턱을 들었다.
“루시를…….”
신음하듯 떨리는 목소리.
“내 동생을 어떻게 한 거야.”
동생…… 이라고?
양산을 쥐고 있던 은하의 손이 움찔 떨렸다.
고양이와 쌍둥이자리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진즉에 하고 있었다.
만일 루나가 쌍둥이자리 조디악이라면 아스트와 예가임과는 달리 두 명이서 하나, 즉 나머지 한쪽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머지 한쪽, 즉 ‘루시’도 조디악이라는 소리다.
“…….”
새까만 은하의 눈동자가 뚫어질 듯 루나를 향했다.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루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애초에 은하가 조디악을 직접 만나려고 했던 것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비록 아스트, 예가임에게는 정보를 얻기는커녕 제대로 해치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루나라면…… 어쩌면.
‘약점은 아마도 동생.’
‘루시’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즉 루나의 입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생 루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잠시간의 침묵 후, 은하는 높게 들어 올렸던 양산을 아래로 내렸다.
“어쩌면 그 동생, 나와 잘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는데.”
“뭐?”
루나의 표정이 바뀌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은하는 루나를 꿰뚫듯 응시했고 루나 역시 은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이미 눈치챘을 텐데. 내게 이것들을 준 게 바로 네 동생인 것 같거든.”
은하의 말에도 루나의 눈빛에서는 의심과 경계가 풀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조디악이 인간에게 우호적일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은하에게는 방법이 남아 있었다.
은하는 양산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허공을 툭툭 건드렸다.
몇 초 후, 은하와 루나 사이로 어떤 물체가 푹 떨어졌다.
“이건…….”
제 눈앞에 떨어진 물체를 발견한 루나가 미세하게 손을 떨며 앞으로 뻗었다.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 고양이가 은하에게 선물해 주었던 물건이자,
“루, 시…….”
──루시가 가장 좋아했던 물건이기도 했던 것.
조심스레 쿠션을 끌어안은 루나는 곧 그것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 착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가짜라고 치부하겠는가. 이렇게, 이렇게 루시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루나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곧 조용히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흐느낌이 오열로 바뀔 때 즈음, 어느새 루나 주변의 인형들은 움직임이 멎어 있었고 루나의 양산은 보잘것없이 흙바닥을 굴렀다.
제자리에 가만히 선 은하는 시선만을 내리깔아 루나의 눈물을 조용히 지켜보았다.